임진왜란과 의병장 김천일 > E-저널 2015년 ISSN 2465-809X(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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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저널 2015년 ISSN 2465-809X(Online)

제4호(10월) | 임진왜란과 의병장 김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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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오수열, 조선대학교 교수/한국동북아학회 회장 작성일15-10-27 10:02 조회5,30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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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말

  최근 일본은 그들의 근대산업시설을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하려고 노력하였고 마침내 그 목표를 달성하였다. 그 과정에서 일본이 일제시대 강제징용 된 조선인들의 한(恨)이 서린 산업시설까지를 포함시켰고, 그들의 반인간적 행위를 은폐·축소하려 시도함으로써 양국 간에 빚어진 갈등 역시 한·일 관계의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문제는 이처럼 이웃국가로서의 친선과 우호 보다는 갈등과 대립이 현재화(顯在化) 되고 있는 양국관계의 연원이 무척 오래 되고 깊다는 데 있다. 여기에서 쓰고자 하는 의병장(義兵將) 김천일의 활동은 한·일 관계가 갈등관계화 되는데 결정적 계기가 된 조선조(朝鮮朝) 중기의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일이다.

  흔히 7년 전쟁으로 불리운 이 전쟁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국왕을 중심으로 한 정부의 무기력함이 극에 달하였고 국가의 정규군인 관군(官軍)이 거의 제 역할을 못한 반면에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일으킨 의병(義兵)이 전쟁의 전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사실이다. 김천일 또한 관직에 있다 파직되어 고향에 머무르고 있던 중 나라가 위급에 처하자 분연히 일어나 국가를 위해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 의병장 가운데 하나이다.

▣ 김천일의 성장과 시대적 환경

  김천일은 조선 중종(中宗) 32년(1537년) 음력 정월(正月) 진사(進仕) 김언침(金彦琛)과 양성(暘城) 이씨의 아들로 전라도 나주(羅州)에서 태어났다. 김천일이 태어난 다음날 모친이 산고로 세상을 뜨고, 6개월 후 부친마저 별세함에 따라 그는 외조모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김천일이 태어나고 성장하던 16세기 중반은 조선조 역사에서도 당쟁(黨爭)과 사화(士禍)로 정치는 혼란스럽고 민생은 도탄에 빠져있던 때였다. 세조(世祖)의 왕위찬탈에 참여하여 조정의 실권을 독차지하고 과전법(科田法)의 혜택으로 토지를 세습하면서 고위직을 독차지해 온 훈구파(勳舊派)에 대항하여 성종(成宗) 때부터 사림파(士林派) 들이 등장하여 대립하면서 정치가 당쟁에 휩싸이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김천일이 태어난 때의 국왕이었던 중종은 성종의 둘째 아들이었으나 연산군의 폭정으로 인한 이른바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즉위하였기 때문에 즉위 초 연산군의 폐정을 바로 잡고 훈구파들의 기득권을 혁파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를 위해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하여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사류를 등용하였으나 훈구파의 반격으로 기묘사화가 발생하는 등 재위기간 내내 당쟁이 끊이지 않아 국정은 안정되지 못하고 민심은 흉흉하였다.

  한양의 국정이 어지러운 가운데 김천일이 외조모 밑에서 자라고 있던 전라도 나주지역도 평안할리 없었다. 당시 전주(全州)와 함께 전라도의 대표적 고을이었던 나주는 드넓은 나주평야에서 생산된 곡물로 물산이 풍부하였지만 조정에 대한 과도한 공물(貢物)로 백성들의 삶은 고달프기만 하였다.
  더욱이 나주 인근지역인 영암, 강진, 장흥, 해남 무안 등지에 왜구의 침범이 빈번하여 그로 인한 피해는 백성들을 고달프게 하였고, 이를 막아주지 못하는 무능한 조정에 대한 백성들의 원망은 거의 체념으로 변해갔다.

  김천일은 처음부터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정진하였지만, 나주를 지나는 관원(官員)들이 관청에는 들르지 못할지라도 김천일의 집은 방문하여 상면할 만큼 그의 학문은 이미 경향 각지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나주지방의 수령과 학자들이 그를 조정에 천거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그의 나이 32살 때인 1567년(宣祖1年)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나 김천일은 간곡히 사양하였다.
  그러나 37살 때인 1573년(宣祖6年) 조정이 재차 그를 부르자 김천일은 이에 응하여 종6품직인 군기시(軍機寺) 주부(注簿)에 임용되었고 다음해 용안현감(龍安縣監)으로 전임되었다.
  1589년(宣祖22年) 그의 나이 53세에 다시 조정의 부름으로 한성부 서윤(庶尹), 군자감정(軍資監正)을 거쳐 같은 해 수원부사(水原府使)에 전임되었으나 기득권층과의 갈등으로 파직되었고 김천일의 관직생활 또한 여기에서 마감되었다. 그러나 만학 후 늦게 관직에 입문한 것을 감안하면 그의 관직생활은 옥사에 관련되거나 귀양살이에 처해진 바 없이 비교적 평탄하고 순조로웠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니, 이는 그의 청렴성실함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천일이 수원부사로 재임시 토호세력들과의 마찰로 파직되어 향리인 나주로 내려온 것이나 스승의 장례문제로 동인에 속하였던 정개청 등과 갈등을 겪기는 했으나 정개청이 경현서원의 원장직을 그만둔 뒤 서인에 속하였던 김천일이 후임 원장에 추대된 것으로 보아 그가 서인이기는 했어도 지역에서 두루 인망을 얻었음을 알 수 있다.

▣​ 임란전반기의 근왕 의병활동

  김천일이 임진왜란을 당하였을 때는 그가 수원부사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나주에 기거하고 있을 때로 그의 나이 이미 53세였다. 전라도 지방에서는 이미 1587년(丁亥年)에 흥양(興陽:지금의 고흥)에 대규모의 왜구가 침범하여 노략질을 당한 이른바 정해왜변이 있었고, 그후로도 남해안 지방에는 왜구의 출몰이 그치지 않았다.
  마침내 1592년(宣祖25年) 4월 14일 왜군이 부산포(釜山浦)에 상륙함으로써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국왕은 왜군이 상륙한지 채 보름도 되지 않아 백성과 도성을 버리고 피난길에 오르는 무책임한 모습을 보였다. 왜군이 도성을 점령한 것은 부산포에 상륙한지 채 20일도 되지 않는 5월 2일이었으니 관군이 얼마나 무기력 했던가를 잘 알 수 있다.

  나주에 있던 김천일은 국왕이 피난길에 오르고, 도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인근지역의 고경명(高敬命)․박광옥(朴光玉)․최경회(崔慶會) 등에게 연통하여 의병을 일으킬 것을 촉구하고 거병을 준비한 끝에 6월 3일 나주에서 의병을 모아 출진하였다.
  김천일이 송제민(宋濟民)․양산룡(梁山龍)․양산숙(梁山瓙)․임환(林懽)․이광주(李光宙) 등과 함께 의병을 모으기 시작하자 오래지 않아 300여명이 동참하였으며, 병기와 식량도 갖추어지기 시작하였다. 김천일이 이렇듯 짧은 기간에 의병을 규합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의 외가인 양성 이씨 쪽의 지원이 컸던 것과 함께 그가 나주에서 세거(世居)하지 않았음에도 이미 나주지역에서 상당한 신망을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천일이 출병하여 북상을 시작한 6월초 전황은 매우 급박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국왕이 도성을 떠나 의주(義州)에 도착한 무렵인 이때, 도성 탈환작전은 전라순찰사 이광(李洸)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는 급히 관군을 소집하는 한편 민병 4만을 모아 북상하기로 하고 절도사 최원(崔遠)으로 하여 본도(本道)를 수비하도록 임무를 부여하고 자신은 4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나주목사 이경록(李慶祿)을 중위장으로, 전 부사 이지시(李之詩)를 선봉장으로 삼아 용안강(龍安江)을 건너 호서의 임천을 경유하여 진격하도록 하였다.

  전라․충청․경상의 3도 군사로 구성된 남도근왕군이 참패한 이후 관군과 의병을 가리지 않고 조선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 김천일의 의병군 역시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김천일은 병사들을 격려하여 도성을 향해 진군하였고 마침내 6월 28일 수원에 도착하였다.
  수원은 김천일이 지난 날 부사로 재임한 곳이며 그가 재임 중 선정을 베풀었던 까닭에 인근에서 부족한 병력을 충원하기가 용이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리(地理)에 밝은 이점도 없지 않았다. 김천일은 척후병을 보내 염탐토록하고 독성산(禿城山)에 진을 친후 기습전투를 벌여 적지 않는 전과를 거두었다. 그는 전라병사 최원의 군대와 합세하여 안산(安山)으로 이동하였는데, 이때 이천(利川)에 머물며 분조(分朝)를 이끌고 있던 왕세자 광해군(光海君)으로부터 첨중추(僉中樞)겸 방어사에 임명한다는 유서(諭書)를 받았다.

  이 무렵 의주에 있던 국왕은 김천일의 의병봉기와 전공(戰功)을 듣고 그에게 장례원(掌隷院) 판결사의 벼슬을 내리고 창의사(倡義使)란 군호를 내려 의병장에 임명하였다. 이 시기에 김천일이 거둔 가장 큰 승리로는 양화도(陽花渡) 전투를 들 수 있는데, 양화도 전투는 김천일이 8월초 전라병사 최원, 경기수사 이빈(李蘋), 충청부사 변양준(邊良俊) 등과 함께 400여척의 선박으로 적을 공격하여 적 200여명을 사살한 전투로써 조선군의 사기진작에 크게 공헌하였다.

  부산포에서 상륙한 이후 관군의 무기력함 가운데 질풍노도처럼 북상했던 왜군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반격에 직면하게 되었다.
  더욱이 1592년(宣祖25年) 12월 이여송(李如松)이 이끄는 명(明)의 원군이 국내에 진입하여 이듬해인 1593년 1월 조선군과 연합하여 평양성을 탈환하고 계속 남진하여 개성을 탈환하고 임진강을 건너 파주에까지 이름으로써 도성을 되찾는 것도 시간문제로 보였다. 이때 김천일은 미구(未久)의 도성탈환작전을 돕기 위해 주변의 형세(形勢)는 물론이고 왜군의 상황 등을 염탐하여 이여송에게 전달하는 등 전투준비에 전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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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성 전투와 김천일의 순국

  행주성싸움에서 크게 패해 기세가 꺾인 왜군은 겉으로는 강화를 제의하면서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남쪽으로 군사를 후퇴시키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개전 초기처럼 전장(戰場)을 넓히기 보다는 조선의 남쪽을 안정적으로 점령함으로써 후일을 도모하려고 하였다.
  주력군을 남해안으로 퇴각시킨 왜군은 곡창지대인 호남을 점령하지 않은 채 북상했던 지난 날의 잘못을 깨닫고 호남을 장악하기 위해 그 길목에 위치한 진주(晋州)에 대해 병력을 집결시키기 시작하였다. 제2차 진주성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진주에 대한 왜군의 대대적 공격에는 아마도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우세한 병력에도 당시의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과 성민들의 결사항전으로 패배한데 대한 복수심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왜군의 진주성 공격징후에 대해 명군은 왜군이 진주성만 함락하면 더 이상 전투를 확대하지 않을 것이라며 이른바 ‘공성책(空城策)’을 내세워 지극히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심지어는 조선군 내부에서도 그러한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신료와 장수들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김천일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왜군의 계책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때마침 1593년(宣祖26年) 5월 남하하는 왜군을 추격하여 섬멸하라는 국왕의 교지가 김천일에게 내려왔다. 이미 나이 들어 몸도 쇠약해졌고, 적지 않는 군사들이 군영을 떠났지만, 김천일은 분연히 일어나 겨우 수백 명의 군사만을 거느리고 “진주가 없으면 호남도 없다.”며 진주로 향하였다.
  김천일이 진주성에 입성한 때는 6월 14일이었다. 그곳에는 김해부사 이종인(李宗仁)이 가장 먼저 도착해 있었으며 경상우병사 최경회(崔慶會), 충청병사 황진(黃進), 거제현령 김준민(金俊民), 의병장 고종후(高從厚), 의병장 이계련(李繼璉) 등이 속속 입성하여 항전태세를 갖추었다.
  당시 진주성에는 1만명 내외의 군사와 사민(士民) 6-7만 명이 있을 뿐으로, 이 숫자로 10만명에 이르는 왜군을 대항한다는 것은 거의 가망이 없는 일이었다.
  성내에는 의병과 관군이 혼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김천일과 최경회가 도절제(都節制)가 되어 김천일은 의병을, 최경회는 관군을 통솔하기로 하고 황진이 순성장(巡城將)을 맡기로 지휘체계를 확립하였다.
  6월 21일 가토기요마사(加藤淸正), 고니시유키나가(小西行長)을 필두로 한 10만에 달하는 왜군이 진주성을 총공격해왔다. 왜군은 진주성을 공격하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굴진(掘進)작업으로 성벽 밑의 토석(土石)을 파냄으로써 성책(城冊)을 무너뜨리는가 하면, 성의 동문 밖에 토성(土城)을 쌓고 망루를 만들어 성안을 내려다보며 조총을 쏘아대기도 하였다.

  이처럼 왜군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군사로 싸울 수밖에 없었던 원인으로는 왜군과의 강화교섭을 진척시키려고 했던 명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던 조정대신들의 소극적인 자세가 크게 작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명군의 지원 없이, 남해안에 집결한 엄청난 왜군에 맞서 싸우는 것은 승산이 없다는 현지 장수들의 비관론도 크게 작용한 데에서 당시 조선군의 사기가 무척 떨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전투가 계속되면서 성안 군사들의 피해가 속출하고 무기와 물자도 떨어지게 되자 김천일은 관군과 명군의 지원을 요청하는 구원특사를 보냈으나 아무런 기별을 듣지 못한 채 고립무원의 상태에 놓이게 되고, 왜군의 공세는 더욱 거세지기만 하였다. 왜적들은 성안의 병사들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심리전을 펴기 시작하였고, 치열한 전투에서 표의병장(彪義兵將) 강희보(姜希輔)가 전사하였다.
 

  마침내 전투 9일째가 되는 날 동쪽 성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왜적들이 밀물처럼 달려들기 시작하였고 얼마 안 되어 이번에는 서북문 마저 무너지자 그곳 방어를 책임지고 있던 서예원은 겁에 질려 도망쳤다. 장수의 도망치는 모습에 군사와 백성들의 사기는 더욱 떨어지고 뿔뿔히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상황이 이에 이르자 성안의 군사들과 백성들은 남강(南江) 촉석루(矗石樓)쪽으로 후퇴하여 집결할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김천일이 지휘하는 의병 정예군도 촉석루 쪽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60을 바라보는 나이에 건강하지 못한 몸으로 전장을 누볐고, 진주성에 들어와 10만 적군에 맞서 힘겨운 전투를 총지휘하면서 그의 육신(肉身)은 이미 제대로 가누기 조차 힘들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노도처럼 성안으로 몰려오는 적군을 바라보며 큰 아들 상건(象乾)과 처음 기병할 때부터 함께 행동해 온 종사관(從事官) 양산숙 그리고 군관 조인호(曺仁皓) 등이 김천일을 부축하며 “이제 주장(主將)께서는 어찌 하시렵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대해 김천일은 담담하게 말하였다. “나의 죽음은 이미 기병한 날 결심한 것이었으니 오늘까지 이른 것만도 늦었다고 할 것이다. 다만 너희들은 집을 버리고 나를 따라와 신고(辛苦)를 겪은지 2년 만에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오직 너희들이 가련할 뿐이다.”
  이어 김천일은 몸을 일으켜 국왕이 있는 북쪽을 향하여 재배(再拜)한 후 병기(兵器)를 강물에 던진 다음 큰아들 상건을 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생을 마감하였다. 양산숙 등 수십 명이 그 뒤를 따라 강물에 몸을 던졌고, 일부는 싸우다가 죽겠다며 적진으로 뛰어 들었으며 일부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눈물을 삼키며 흩어졌다.
  진주성이 함락되기 직전 김천일, 최경회, 황진 세 사람이 촉석루에 모여 죽음을 맹세한「술로 죽음을 맹세하다(把酒誓死)」라는 시 한수는 그들의 기개를 잘 보여주고 있다.

    장한 세 선비 촉석루에서(矗石樓中三壯士)
    술 한 잔에 웃으며 강물을 가리키네(一杯笑指長江水)
    강물은 도도히 흐르는데(長江之水流滔滔)
    물결은 마르지 않고 혼 또한 영원하리(波不谒兮魂不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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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한산도대첩

  제2차 진주성전투를 총지휘했던 김천일의 순절과 함께 진주성은 왜군에게 함락되었으니 1593년(宣祖26年) 6월 29일 일로 이때 김천일의 나이, 당시로서는 이미 고령에 속하는 57세였다.
이후 왜군이 전라도의 구례, 남원, 광양, 순천 등지에까지 진격하여 노략질을 자행한 데에서 진주성을 사수하려던 김천일의 주장이 얼마나 정확한 것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

 맺는말

  임진왜란이 끝난지 이미 420여년이 지났다. 그러나 한․일 관계는 여전히 좋아지지 않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평화헌법체제’에서 전쟁을 부정해오던 일본은 아베정권의 등장 후 ‘전쟁을 할 수 있는 국가’로 우경보수화 되고 있다. 상황의 변화에 따라서는 언제든지 한반도에 다시 상륙하려는 의도가 없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지난날의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아 항상 유사시에 대비해야 할 것이며 일본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것을 아전인수(我田引水)로 해석하지 말고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이제라도 이 땅을 지키기 위해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던 조선 의병들의 숭고한 뜻을 되새기며 국가의 안보를 함께 걱정하고 민생(民生)을 염려하며 동시에 민주주의를 활짝 꽃 피우는 그러한 대한민국이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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