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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저널 2016년 ISSN 2465-809X(Online)

제9호(03월) | 명량해전이 주는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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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조덕현 작성일16-04-19 16:22 조회3,006회 댓글0건

본문

명량해전이 주는 교훈

 

 

조 덕 현(군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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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사, 육사, 공사 교수부에 40기에 해당하는 동기생이 각각 두 명씩 있다. 가끔씩 공사 국어교수로 있는 동기생과 통화를 하는데, 공군에서 우리 해군을 부러워하고 있는 것이 한 가지 있다고 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일까 궁금했다. 그것은 해군에는 충무공 이순신과 같이 추앙할 인물이 있는데 공군에는 아직 그런 인물이 없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공군은 1949년 10월 1일에 창설되었으니 이제 겨우 67년이라는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1907년 12월 7일, 뉴욕 타임즈 1면에는 “앞으로 인류가 하늘을 나는 물체를 타고 비행을 하기 위해서는 수백 명의 과학자가 모여서 백만 년 이상 연구해야 가능할 것이다.”라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10일 뒤인 12월 17일에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발명하였다. 그러니 공군의 역사는 가장 길게 잡아도 109년인 셈이다.  미국 오하이오 주 데이턴(Dayton, Ohio)에 소재한 공군박물관(U.S. Air Force Museum)에 전시되어 있는 라이트 형제의 복엽기. 지금 시각으로 보면 골동품처럼 보이지만 당시에는 인간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획기적인 발명품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상상만 했던 물체를 비행기라는 실물로 만든 Orville Wright(1871~1948 : 좌), Wilbur Wright(1867~1912 : 우) 형제. 두 사람은 데이턴 시골 마을의 자전거 수리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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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만년 우리 역사는 수많은 전쟁과 사건들이 있었다. 오래 전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오늘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건은 어떤 것이 있을까?  그중에 하나가 바로 임진왜란(1592~1598)이 아닌가 생각한다. 임진왜란 기간 중 일어났던 많은 해전들 중 명량해전을 통해서 이 해전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찾고자 한다.
  명량해전은 1597년(선조 30년) 음력 9월 16일(양력 10월 25일) 정유재란 당시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지휘한 조선 수군 13척이 명량해협에서 일본 수군 130여 척을 격퇴한 해전이었다.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이순신은 원균과 윤두수를 비롯한 일부 서인 세력의 모함을 받아 파직 당한 후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일본 수군과 결전을 벌였지만 칠천량 해전에서 참패하여 수많은 장병들과 대부분의 전선을 잃고 조선은 제해권을 상실하였다. 이에 선조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되자 이순신을 다시 복권하여 삼도수군통제사로 기용하였다. 선조는 이순신을 통제사로 복권시키는 대신 품계를 낮추어 조선 수군의 지휘 체계에 혼란을 야기하였다. 이순신이 파직 당할 당시 그의 계급은 대감급인 정헌대부 정2품이었다. 그러나 선조는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권하였지만 정3품 계급을 부여하였다.
  당시 조선에는 수년 간의 전쟁으로 인해 이미 계급 인플레가 심했으며, 수군 수사의 기준 품계인 정3품을 가진 장수들이 많았다. 계급은 같은데 보직만 다른 상황이 일어났던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이순신이 이전에 통제영을 오랫동안 장악하였으며 그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에 그나마 수군을 통제할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장수들의 불만이 표출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이순신과 전라우수사 김억추는 여러 면에서 의견 충돌을 일으켰다. 김억추는 명량해전이 끝난 후 교체되었으나 이순신이 전사한 후 다시 전라우수사로 기용되었다.
  이와 같이 조선 수군은 지휘 체계의 혼란으로 인해 각종 잡음이 끊이지 않았으며 시작부터 불안한 출발을 하였다. 더욱이 조선 수군에게 남은 전선은 겨우 12척에 불과하였다. 이순신이 1597년 음력 8월 18일 회령포에서 전선 10척을 거두었고, 그 후 2척이 더 회수됨으로써 12척이 남은 전선의 전부였던 것이다. 이후 명량해전을 앞두고 김억추와 송여종의 지원으로 1척이 추가되어 모두 13척이 되었다. 선조는 칠천량에서의 패전 손실이 커서 수군을 폐지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이순신은 선조에게 다음과 같은 장계를 올려 수군폐지불가론을 주장하였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선이 있으니, 죽을 힘을 다하여 막아 싸운다면 능히 대적할 방책이 있사옵니다.(今身戰船 尙有十二 出死力拒戰則猶 可爲也)”

  그 후, 이순신은 남해안 일대를 돌아다니며 흩어진 병사들을 모아 수군 재건에 진력했다. 이순신은 음력 8월에 일본 전선이 어란포(현재 해남군 어란리 근처)에 나타난 것을 격퇴한 후, 음력 9월에 일본 수군이 어란포로 진입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음력 9월 15일에 벽파진에서 해남의 우수영(右水營)으로 진을 옮겼다. 이때, 어란포의 일본 수군은 구루시마 미치후사와 도도 다카토라, 와키사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 구키 요시타카가 지휘하는 200척의 대함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일본 수군은 목포 쪽으로 흐르는 북서류를 타고 명량해협을 통과하여 전라도로 서진하여 일본 육군과 합류할 계획이었다. 명량해협은 진도와 화원 반도 사이에 있는 좁은 수로로서 조류는 당시 조선의 수로 중에서 가장 빠른 곳이었다. 일본 수군은 빠른 수로를 이용하여 남아있던 조선 수군을 격파한 후 일본 육군과 합류하여 한양으로 진격하려고 하였다.
  일본 수군은 1592년의 전훈을 교훈삼아 내륙으로 깊숙이 진격하기 전에 반드시 서해의 제해권을 장악한 후 전라도를 장악하려고 하였다. 이순신이 복귀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13척의 전선만으로는 무력하리라는 것이 일본 수군의 판단이었다. 이순신과의 전투에서 이미 패배를 경험한 도도 다카토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칠천량 해전의 승리가 일본 수군의 사기를 드높여준 탓이었다. 일본 수군은 압도적인 전력으로 이순신의 수군을 격파할 것을 결의했다.
  한편, 이순신도 일본 수군의 기동 보고를 받고 명량대첩 직전 날인 음력 9월 15일, 장병들에게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는다(必死卽生 必生卽死)’고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 足懼千夫)’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일이 있다면 즉시 군율을 적용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거듭 말하며, 장병들과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것을 결의하였다.
  전투 결과 실제 전투에 참여한 일본 수군의 전선 130여 척 중 31 척이 격침되었다. 왜군의 중형 군선에는 약 100명씩 승선하고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최소 3,000여 명이 전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에, 조선 수군의 전선은 단 한 척의 피해도 없었다. 다만, 순천감목관 김탁, 이순신의 종 계생, 안위가 지휘한 함선의 격군 8명이 전사한 것과 조선 수군의 함선이 총 13척이었던 것으로 볼 때, 전사자는 100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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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이 13척의 함선으로 일본 수군 133척을 맞아 싸운 명량해전은 해전사상 유래를 찾기 힘든 특이한 해전이었다.

  명량해전은 조선이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끄는데 결정적인 전투였다. 당시 일본 수군이 남해안 대부분의 제해권을 장악하였고 일본 육군은 1597년 음력 8월 15일 남원 전투, 8월 19일 전주성에서 조명 연합군을 대파하고 남원과 전주를 함락시킨 후 전라도를 점령하고 충청도 직산까지 진격하여 명나라 군과 대치 중인 상황이었다. 일본 육군과 수군은 수륙병진을 통해 한양 공격을 목전에 두고 있었으나, 명량해전에서 패함으로써 일본군의 수륙병진작전이 무산되었으며, 육상에서 진군의 동력이 떨어지자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에 분산되어 왜성을 쌓고 농성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후 정유재란은 농성하던 일본군을 조명연합군이 수륙 양면에서 협공하는 공성전으로 전쟁 양상이 바뀌게 되었다.
  명량해전은 세계 해전사상 특이한 해전으로 분류할 수 있다. 지상전에서는 비율이 1:10인 상황에서도 전투가 성립될 수 있다. 왜냐하면 게릴라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전은 지상전과는 달리 시야가 트인 바다라는 전장의 특성 때문에 어느 한 쪽이 전투를 거부하여 도주하면 전투가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명량해전처럼 1:10의 비율로는 전투가 성립될 수 없다.  이에 따라 고대부터 현대까지 해전을 살펴보면 양측 세력의 비율이 5:5, 5.5:4.5, 4:6 정도의 비율로 전투를 치룬 예가 대부분이었다. 
  해상지휘관이라면 열에 아홉은 12척의 배로 10배가 넘는 적을 상대로 전투를 치루는 상황을 피할 것이다. 이순신의 장계 내용 중에 “지금 신에게 아직 열 두 척의 전선이 있습니다.”라는 내용의 의미를 자세히 살펴보면 ‘I only have twelve ships’의 의미가 아니라, ‘I still have twelve ships’로 이해했다는 점이다. 즉, ‘오직 12척’이 아니라, ‘아직 12척’의 의미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오직’과 ‘아직’은 음절이 하나 다를 뿐인데 그 의미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새삼 발견하게 된다. 군사사를 연구하는 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동서고금을 통해 역사상 많은 명장들이 자신들의 경험을 통해 명언을 남겼지만 이순신의 이 표현은 가장 군인다운 표현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금으로부터 419년 전인 1597년에 일어난 명량해전이 2016년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남들은 ‘위기(crisis)’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이순신은 전화위복의 ‘기회(chance)’로 만든 용기와 지혜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명심 또 명심해야 할 점은 위기를 기회로 만들기 위해서는 평소에 먼 훗날을 내다볼 수 있는 혜안을 가지고 꾸준하게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해군은 창군 이래 그동안 노력의 성과로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쌓아왔는데, 천안함 사건 이후 몇 차례 위기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걱정하지 않는다. 지금까지도 그러해 왔듯이 지금 이 순간, 그리고 앞으로도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후예로서 우리 모두의 지혜를 모아 ‘위기를 기회로’ 만들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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