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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저널 2016년 ISSN 2465-809X(Online)

제9호(03월) | 백의종군로의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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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임용철 작성일16-04-19 16:27 조회2,342회 댓글0건

본문

백의종군로의 인문학

 

임용철(백의종군로 순례회장)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백의종군을 두 번이나 했고 그가 간 길이 어디인지를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더욱이 그 길을 따라 걸은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왜 백의종군로를 따라 걸어야 하는가? ‘나는 걷는다’,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 등 걷기를 주제로 많은 책이 출판되어 있다. 걸으면 건강에 좋다. 건강이 목적이면 아무 길이나 걸으면 되고 관광이 목적이면 둘레길, 올레길을 걸으면 된다. 백의종군로를 걸으면 무엇이 좋을까?
  인문학(人文學)은 흔히 문사철(文史哲) 즉, 문학, 역사, 철학이라고 한다. 길 위에는 인문학이 있다. 길을 걸으면 향토의 자연을 느끼면서 고장의 삶을 엿볼 수 있다. 그 지역과 관련한 역사와 인물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호기심은 학문의 동기이다. 학문은 배우고 익히며 새로운 것을 탐구함이다.
  사람은 즐거움을 추구한다. 호기심을 채우는 것이 즐거움을 준다. 논어의 첫 글자가 배울 학(學)이고, 배우고 익힘이 즐거움이라 했다(學而時習之不亦說乎). 백의종군로와 관련하여 생기는 의문과 호기심을 고찰하자.

 

  1. 첫 번째 호기심: 난중일기에는 어떤 내용이 있나?

 

  고금을 통하여 최고 사령관으로서 전장의 나날을 7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자세히 기록한 장군은 이순신 이외에 없다. 세계에 유래가 없는 장군이다. 그가 쓴 일기는 2013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바로 그 난중일기를 보면 백의종군로가 어디인지 알 수 있다. 이순신은 정유년(1597년) 4월 1일부터 8월 3일까지 4개월간 백의종군했다. 그런데 백의종군 첫날의 기록부터 수많은 의문을 독자에게 던져준다.
初一日辛酉。晴。得出圓門。到南門外尹生侃奴家。則菶,芬及蔚與士行,遠卿同坐一室。話久.尹知事自新來慰。備邊郞李純智來見。知事歸。夕食後。佩酒更來。耆獻亦至。李令公純信佩壺又來。同醉致懇。領台鄭判府事琢, 沈判書喜壽,金二相命元,李參判廷馨,盧大憲稷,崔同知遠,郭同知嶸。送人問安.
(초일일신유。청。득출원문。도남문외윤생간노가。즉봉,분급울여사행,원경동좌일실。화구. 윤지사자신래위。비변랑리순지래견。지사귀。석식후。패주경래。기헌역지。리령공순신패호우래。동취치간。령태정판부사탁, 심판서희수,김이상명원,리참판정형,로대헌직,최동지원,곽동지영。송인문안)
이를 해석하면 아래와 같다.
4월 1일. 맑다. 옥문을 나왔다. 남문 밖 윤간의 종의 집에 이르렀다. 조카 봉과 분, 아들 울,  윤사행, 윤원경과 더불어 한 방에 앉아 오래도록 이야기 했다.
  이순신이 옥에서 풀려 나왔다는 이야기인데 그는 왜 옥에 갇혔을까? 옥에서는 얼마나 고초를 받았을까? 그리고 풀려났다면 죄 없음이 확인된 것일까? 옥은 어디에 있었나? 윤간은 누구인가? 왜 종의 집에 들어갔나? 조카 봉과 분은 누구의 아들인가? 이순신의 아들은 울 이외에 또 누가 있나? 난중일기의 상기 기사를 읽는 독자라면 누구든지 이런 의문을 가질 것이다. 난중일기를 더 읽으면 이러한 의문에 대해 답이 나올까? 이순신에 대한 다른 기록은 무엇이 있나? 그 기록을 보면 이 의문을 풀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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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 이순신 생애 종군로                          (그림 ) 대동여지도 진위-온양구간


 다음 문장을 보자.
 곧 이어 지사 윤자신이 찾아와 위로하고 비변랑 이순지도 와서 보았다. 울적한 마음을 이기기 어려웠다. 윤 지사가 돌아갔다가 저녁을 먹고 나서 술을 가지고 다시 왔다. 윤기현도 왔다. 옛 정으로 술을 권하며 위로해서 물리칠 수가 없어 억지로 술을 마시고 취했다. 이순신(李純信)도 술병을 차고 와서 같이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글에서 술을 권한 윤자신, 윤기현, 이순신(李純信)은 누구인가? 그들은 서울에 살고 있었나? 그들은 이순신의 무죄를 확신하고 출옥할 것이라 예상하고 미리 와서 기다렸을까? 이순신은 13세 서울을 떠났고 변방에서 근무했는데 서울에 아는 사람이 있었단 말인가? 이러한 호기심도 발동한다. 다음의 문장을 보면 의문은 더욱 많아진다.  
영의정, 판부사 정탁, 판서 심희수, 찬성 김명원, 참판 이정형, 대사헌 노직, 그리고 동지 최원, 동지 곽영 등이 사람을 보내어 문안했다. 취하여 땀이 몸에 배었다.
  영의정은 누구인가? 사람을 보내 무슨 말을 전했을까? 판부사, 판서, 찬성, 참판, 대사헌, 동지 등의 관직은 지금의 어느 계급에 대응하나? 그들이 보낸 사람이 출옥한 당일에 이순신을 만났다면 그들은 서울에서 벼슬하는 사람들인가? 영의정 이하 여러 신료들이 위로를 했다면 이순신의 죄는 완전 사면되었다는 것인가? 백의종군이라는 벌이 경국대전에 있나? 한 달간 옥에서 국문을 받고 한차례 고문을 당한 사람이 취할 정도로 술을 마셨단 말인가? 이렇게 의문이 꼬리를 무는 것이다.  인문학을 전공한 학자들이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을 탐구하여 논문으로 공개했다. 그러므로 난중일기를 이해하려면 난중일기 해설서를 보아야 한다. 시중에는 수십여 권의 난중일기 번역서, 해설서, 주역서가 있다. ‘학이시습지’가 요구된다. 난중일기를 읽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인문학도가 된다.

 

2. 두 번째 호기심: 백의종군로는 어디인가?

 

  백의종군로를 알기 위해 난중일기를 읽고, 대동여지도를 열람하고, 현대지도를 대조해서 종군로 지도를 그렸다. 여기 제시한 지도(그림1)에서 흑색은 정유년에 일본군이 다시 침입하자 이를 막지 못했다고 당시의 해군참모총장인 이순신을 잡아간 길이다. 남원에서 서울까지는 백의종군로와 일치한다. 적색이 백의종군로이고 녹색은 백의종군 중에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된 이후에 조선수군을 재건하며 간 길이다. 청색은 이순신이 초임장교시절에 보낸 함경도 근무지까지 간 길이다. 북방종군로의 지명은 현 지명이 아니고 대동여지도의 역참 이름이다. 여기 제시한 대동여지도(그림 2)는 전국에 널리 배포한 흑백 목판본이 아니고 화공이 조정을 위해 컬러로 그린 지도이다. 대동여지도에 보이는 옛 평택은 현재의 팽성이고 옛 아산은 지금의 인주면이다. 대동여지도에서 길은 직선으로 표시했는데 이는 실제 길을 묘사한 것이 아니고 시작 지명과 종착 지명을 연결하는 길이 있음을 의미한다.
 필자는 지난 5년간 백의종군로, 수군재건로, 한성압송로를 걸으며 각 고장과 관련한 역사, 지리, 인물에 관해 인문학적 지식에 접하게 되었다. 이공학을 전공한 필자에게 국토를 걷는 것은 새롭고 흥미롭고 즐거운 경험이었다. 이순신이 22년 무관 생애동안 행군한 거리를 지도상에서 하나하나 따져보니 7,300km나 된다. 남쪽 끝 해남에서 북쪽 끝 경원까지를 6회 종주하는 거리이다. 그 중에 백의종군로의 길이는 대략 600km이다.

 

3. 세 번째 호기심: 이순신이 과거에 합격하고 제일먼저 부임한 곳?

 

  청년 백수 이순신은 21세에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아 키우면서 과거 시험에 응시했지만 합격하지 못하다가 11년 재수 후 32세에 무과에 급제했다. 결혼 전에도 과거에 응시했을 것이므로 재수기간이 적어도 15년은 될 것이다. 급제하고도 곧 발령 받은 것이 아니라 10개월이나 기다려야 했다. 그가 엄동설한 12월에 처음으로 부임하게 된 곳은 함경도 압록강 아래 동구비보로서 지금의 삼수갑산 오지이다(그림 1 참조). 예나 지금이나 초임 장교는 최전방으로 발령받는가보다. 이순신은 솜바지 입고 언 땅을 갔다. 아내가 셋째를 임신하고 있었지만 곁에서 돌볼 수 없는 변방으로 가야 한다.
  삼수는 어떤 곳인가? 흔히 ‘삼수갑산을 가더라도...’라는 말을 한다. 이 말은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하더라도...’ 우선 저질러 놓고 본다는 뜻이다. 그만큼 험한 곳이다. 실제로 조선시대에 삼수는 교통이 매우 불편해 한번 가면 다시 오기 어려운 벽지(僻地)이다. 고도 1000m 이상의 개마고원 내륙으로 가장 추운 곳이다. 백두산 호랑이가 있어 위험한 곳이고, 민란 수괴, 범법자가 숨어 산적(山賊) 행세를 하는 위험한 곳이다. 죄인을 유배하고 추방하는 곳이다. 이순신은 이렇게 험한 지역에서 3년간 복무했다. 그는 그 후에도 함경도로 두 번이나 발령받아 2년 가까이 더 근무했다.

 

4. 네 번째 호기심: 백수 이순신은 어떻게 가정을 돌봤나?

 

  이순신의 부친은 몰락한 양반이다. 그는 아내의 고향인 아산으로 이사했다. 처가에 의존하게된 것이다. 이순신은 외가 마을에서 13세 정도의 소년에서 청년으로 자랐다. 보성 군수를 지내고 은퇴한 방진이 그 마을에 살고 있었는데 이순신을 잘 보아 사위로 맞이했다. 이순신도 처가에 의지하는 꼴이 되었다. 장인은 문과에서 자꾸만 낙방하는 사위에게 무과로 전과하라고 했다. 전과하여 말 타기, 활쏘기 등을 연마하여 응시했는데 또 낙방했다. 4년 만에 겨우 합격했다. 조선시대에는 변방을 지키는 군인에게 조정이 급여를 주는 것이 아니다. 현지에서 공물을 받아 조정이 정한 분량을 서울로 보내고 나머지를 자기들이 쓴다. 관아에 소속된 땅에서 둔전을 하거나 백성들에게 세금을 부과해 부대를 운영했다. 청년 이순신은 과거에 급제하여 공직에 나아가기 전까지 처가살이를 한 것이다.

 

5. 다섯 번째 호기심: 백의종군형은 경국대전에 있나?

 

  조선시대 형벌은 경국대전에 태형, 장형, 도형 유형, 사형 등 5가지로 규정되어 있다. 태형(笞刑)은 경범죄인에게 작은 곤장으로 죄의 무게에 따라 10대, 20대, 30대, 40대, 50대 볼기를 친다. 장형(杖刑)은 더 무거운 벌로서 큰 곤장으로 60대부터 죄에 따라 10대씩 증가하여 100대까지 친다. 도형(徒刑)은 구속수감하며 노역을 시키는 형벌이다. 죄질에 따라 도(徒, 노역)1년 장60대, 도1.5년 장70대, 도2년 장80대, 도2.5년 장90대, 도3년 장100대이다. 유형(流刑)은 중죄인을 귀양 보내는 것인데 죄가 클수록 고향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보낸다. 왕명이 없는 한 고향에 못가고 귀양 땅에서 홀로 죽어야 한다. 형량은 2000리와 장100, 2500리와 장100, 3000리와 장100이다. 조선 땅 중에는 중부지방에서 3000리 되는 곳이 없다. 죄인의 거소가 중부지방이면 어디로 보낼까? 제주도도 이렇게 멀지는 않다. 중국의 양형기준에 의거하다보니 이렇게 규정된 듯하다. 사형(死刑)은 신체가 온전한 교형(絞刑), 머리와 몸통을 분리키는 참형(斬刑)이 있다. 백의종군형은 경국대전에 없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는 관련기사가 60건 나온다. (해군역사기록관리단, 충무공이순신 백의종군로 고증, 2015년. 참조)

 

6. 여섯 번째 호기심: 백의종군은 조건부 사면인가?

 

  조선이 시행한 백의종군은 전시에 장수와 병력이 부족하므로, 죄인이라도 전투에 참여시켜 공을 세우도록 하는 조치이다. 실제로 이순신의 석방을 호소한 판중추부사 정탁은 이순신은 명장이므로 살려주어 공을 세우게 하자고 상소했다. 상소의 결과는 신경(申炅)의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에 ‘이순신을 한차례 고문하고 사형을 감하여 삭탈관직하고 충군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충군은 죄인을 군에 보내는 조치이다. 경국대전에 ‘충군에 해당하는 죄인은 도3년 장100의 형에 준한다’로 되어 있다. 이순신은 사형 받을 죄인이지만 충군조치된 것이다. 그렇다면 충군되었으므로 사형은 완전히 면했는지 궁금하다.
  난중일기 정유년 11월 17일 기사에 ‘경리 양호의 차관이 초유문(招諭文)과 면사첩(免死帖)을 가지고 왔다’는 기사가 있다. 양호는 4개월 전에 부총병 양원을 시켜 책봉사 심유경을 잡아 본국으로 송환한 실력자다. 그런 사람이 이순신에게 면사첩을 준 이유가 무엇일까? 이순신은 9월16일에 명량대첩을 이루었지만 한 번의 싸움으로 화약, 화살, 포환이 고갈되어 전투를 할 수 없기에 계속 서해를 북상하며 선유도까지 후퇴했다.
  이즈음 일본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信秀吉)가 죽은 이후로서 귀국을 위해 남으로 후퇴를 시작했고 조선 수군도 목포 앞 고하도까지 다시 내려왔다. 여기서 이순신은 명나라 장수로부터 면사첩을 받은 것이다. 만일 이순신이 명량대첩과 같은 공을 세우지 못했다면 전후에 재심해서 이순신을 사형에 처할 수도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명나라 장수는 이순신이 명량에서 크게 이긴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도 그는 이순신에게 사형을 면하는 문서를 주었다. 이 문서는 명 황제의 명을 받아 조선을 구하러 온 장수가 준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의 왕도 이 문서를 무시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런 논리로 보아 백의종군은 조건부사면으로서 전후에 재심할 여지가 있을 것 같아 보인다.
 
7. 일곱 번째 호기심: 이순신은 왜 보름 동안에 포로와 죄수를 19명이나 베었나?

 

  선유도에서 전라우수영으로 내려온 이순신은 10월 16일부터 말일까지 일본군 포로와 조선 죄인을 19명이나 처형했다. 그 이전에는 명량 해전 보름 전에 유언비어를 퍼트린 두 사람을 벤 것인데 이는 인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불가피한 조치라고 그 타당성이 인정된다. 그러나 10월 하순에는 적이 물러가는 상황으로 민심이 별로 동요되지도 않았다. 이순신은 왜 갑자기 이렇게 많은 사람을 극형에 처했을까?
  이순신은 10월 1일 선유도에서 “아산 고향이 적에게 불타 버렸다”는 공문을 받았다. 마음이 불안하고 잠을 이루지 못한 이순신은 다음날 일찍 아들 회를 배에 태워 고향으로 보내 소식을 알아오게 했다. 보름 후, 소식이 왔다. 당시의 일기를 보자.
10월 14일 맑다. (전략) 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했다. 봉한 것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아찔하여 어지러웠다. 대충 겉봉을 뜯고 열(둘째 아들)의 편지를 보니, 겉에 ‘통곡’ 두 글자가 씌어 있어 면의 전사했음을 알았다. 어느새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한고!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가 마땅하거늘,(중략)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를 갔느냐. 남달리 영특하여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은 것이냐.(후략)
  사흘이 되었는데 슬픔은 더해갔다. 전라우수영의 영내에서는 마음 놓고 통곡할 곳도 없었다. 몸속 깊은 곳에서 치솟는 울음을 이를 악물어 참았다. 그는 멀리 떨어져 있는 강막지의 집으로 갔다. 당번 군관을 물리치고 낡은 소금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가마니 위에 엎드려 목 놓아 울었다.
“이 원수를 갚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 차수약제 사즉무감(此讐若除 死則無憾)” 이순신은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었다. 이순신은 밖으로 뛰어나와 영으로 달려갔다. 옥에 갇혀 있던 왜적 13명을 베었다. 왜적에 부역한 송언봉도 베었다. 상복을 입고 7일이 지났건만 비통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적에게 붙었던 윤해, 김언경을 베었다. “호부대설국욕(好赴大雪國辱), 잘 (준비하여) 나아가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 6개월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모습도 떠올랐다. 보름이 지나도 마음의 고통은 가시지 않았다. 저녁나절에 적에게 붙었던 정은부, 김신웅을 베었다. 선비집 처녀를 강간한 김애남도 목 베었다. 열아홉을 베어도 나라의 치욕은 조금도 씻기지 않았고 원수를 갚지도 못했다. 이순신은 1년 후 노량에서 비로소 소원을 성취하고 어머니와 막내아들을 만나러 저 세상으로 갈 수 있게 된다.

 

8. 걸으며 사색하는 인류

 

  지구에 70억의 인구가 있는데 이들의 DNA는 구석기 인류와 다르지 않다. 현생 인류의 하드웨어는 구석기 인류이고 소프트웨어는 21세기 인류이다. 인종에 따라 DNA에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99% 이상 동일하다. 개체에 따라 외형과 내장 세포에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DNA에 의해 발현된 전체의 속성에 비하면 개인차는 극히 미세하다. 인간에 대해 이해하려면 DNA를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그 DNA는 석기시대에 형성되었다. 그러므로 인간에 대한 이해는 석기시대 인류의 삶을 이해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인류는 석기 시대에 어떻게 살았을까? 석기시대의 생활에 가장 유리한 속성을 지닌 종족이 생존하여 후손을 남겼고 우리는 그 후손이다.
  석기시대의 생활은 수렵생활이다. 사냥을 잘 하려면 동료 간에 협조하여 사냥감을 포획하기 위해 작전을 짜야한다. 기다리고 추적하는 동안에도 계속 잘 잡기 위해 궁리를 해야 하는 삶이다. 해가 지면 잠을 자고 해 뜨면 사냥한다. 잠자는 동안은 생각하지 않는 시간이다. 구석기인들은 움직이면서 생각했다. 플라톤과 칸트는 걸으며 사유했고, 베토벤도 산책하며 악상을 떠 올렸다. 아인슈타인은 물리학에 문외한인 친구와 걸으며 이야기하는 가운데 생각을 정리했다.
  백의종군로는 그 길 위에 인문학적 소재를 많이 담고 있다. 더욱이 난중일기라는 세계적인 저작물과 연관되어 있어서 인문학 문제의 실마리를 풀기 좋다. 백의종군로를 걸으면 인문학적 호기심이 더욱 자극되고 탐구하려는 의욕이 크게 일어난다. 백의종군로를 순례하면 충무공의 삶을 묵상하고 고통을 느끼게 되므로 내 마음과 육신의 병을 치유할 수 있다. 백의종군로에 있는 문화유산을 답사하면 지역의 역사, 문화, 음식, 풍류를 접하므로 즐겁고 마음이 뿌듯해진다. 백의종군로 주위의 자연을 접하고 시골의 마을을 지나게 되면 국토의 아름다움과 고장을 지키는 주민에게 고마움을 느끼게 된다.
  백의종군로 전 구간을 20개 내지 30개 정도의 소구간으로 나누면 하루에 20km 내지 30km씩 매월 주말에 한두 번 걸어서 1년에 다 걸을 수 있다. 직장인, 학생, 주부, 노인들도 다 걸을 수 있다. 백의종군로를 걸으며 건강도 챙기고 즐거움도 누리고 생각의 힘도 키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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