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호(11월) | 악티움 해전에 관한 연구 : 3C Theory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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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조덕현 작성일16-12-27 17:33 조회3,483회 댓글0건본문
I. 들어가는 말
제1차 세계대전 후 이탈리아 해군대학 교수를 지냈던 기우셉 피오라반조(Giuseppe Fioravanzo) 제독은 인류의 역사를 ‘노선시대-범선시대-추진기시대-해군항공시대’로 구분하였다. 그리고 전쟁사를 보다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알란 밀렛(Allan R. Millett) 교수는 ‘3C Theory’를 제시하였다. 즉, 전쟁의 배경(cause), 경과(conduct), 결과와 교훈(consequences)에 대해 단계적으로 연구해야 전쟁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런 점에서 본고는 알란 밀렛 교수의 분석틀을 이용하여 악티움 해전을 고찰하려고 한다.
II. 해전의 배경 : Cause
기원전 80년을 전후하여 로마가 해양의 치안 유지를 게을리함에 따라 해적들이 창궐하였다. 이 해적들이 로마에 대한 보급을 방해하고 심지어 아프리카로부터 반입되는 곡물수송을 차단하였기 때문에 로마는 대규모 해적 소탕전을 전개하였다. 해적 소탕전에서 혁혁한 전과를 거둔 폼페이(Gnaeus Pompey)가 케사르(Julius Caesar)와 크라수스(Marcus Licinius Crassus)와 함께 제1차 삼두정치(Triumvirate, 60~53 B.C.)를 실시하였다.
크라수스가 사망한 후 케사르와 폼페이가 권력 쟁탈전을 벌인 끝에 기원전 48년에 케사르가 폼페이를 패배시키고 독재자가 되었다. 그러나 케사르가 시해되고 안토니(Mark Anthony), 옥타비우스(Augustus Octavius)와 레피더스(Marcus Aemilius Lepidus)의 제2차 삼두정치가 시작되었다. 안토니가 동부 로마, 옥타비우스가 서부 로마 그리고 레피두스가 아프리카를 통치하였다.
그런데 케사르의 경쟁자였던 폼페이의 아들 섹스투스 폼페이(Sextus Pompey)가 로마 함대사령관이 되어 로마의 보급을 보장했지만, 로마의 운명이 그의 손에 들어간 결과가 되었다. 옥타비우스는 섹스투스 폼페이로부터 제해권을 탈취하기 위하여 자신의 함대를 건설하였으나, 쿠마에 해전(Battle of Cumae, 37 B.C.)에서 폼페이에게 패전하였다.
옥타비우스의 오랜 친구인 아그리파(Marcus Agrippa)가 옥타비우스의 새 함대를 건설하였고 안토니도 옥타비우스를 지원하였다. 아그리파는 포에니 전쟁 당시 보다 크고 견고한 전선을 건조하였는데, 이 전선들은 투석기(catapult)를 장치하고 적의 충각(ramming)으로부터 선체를 방호하기 위하여 흘수선 부근을 가로 빔으로 보강하였다.
기원전 36년에 아그리파는 시실리와 이탈리아 본토 사이의 나울로처스(Naulochus)에서 폼페이함대를 격파하였다. 나울로처스 해전에서 양측이 각각 300척의 전선을 동원하였는데, 아그리파함대는 크고 견고한 반면에 폼페이함대는 속력과 기동면에서 우세하였다. 이 해전에서 충각전술과 불화살이 사용되었으며, 특히 아그리파는 갈고리 투사기를 현측에 장착하여 사용하였다.
이 과정에서 레피더스가 옥타비우스에게 항복함에 따라 옥타비우스는 서부 로마를 확실하게 지배하였다. 그런데 기원전 32년에 안토니가 옥타비우스의 누이 동생인 옥타비아(Octavia)와 이혼하기 전에 그리스계의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Cleopatra Ⅶ Philopator)와 결혼하자 로마의 두 지배자 사이에 긴장감이 조성되었다. 결국 기원전 32년에 서부 로마를 지배하던 옥타비우스와 동부 로마를 지배하던 안토니 사이에 권력 투쟁의 내전이 벌어졌다. 이 내전에서 결정적인 전투가 바로 악티움 해전이었다.
Ⅲ. 해전의 경과 : Conduct
클레오파트라로부터 전비를 지원받은 안토니는 기원전 32년 가을에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그리스로 이동하였다.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를 통치하기 위해 안토니의 지원이 필요하였다. 안토니는 30개 군단 15만 명과 함선 500척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그의 함대에는 아그리파가 사용했던 전선과 같은 강력한 전선들이 다수 있었다. 그러나 안토니 부대는 충성심과 전투 의지가 부족하였다.
안토니는 코린트 만(Gulf of Corinth) 입구의 파트라스(Patras)에 사령부를 두고 암브라키아 만(Gulf of Ambracia)에 함선들을 정박시켰다. 옥타비우스는 안토니와의 전쟁을 의식하고 있었지만 전쟁 준비를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옥타비우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안토니가 그리스에서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머물면서 향락에 빠져 6개월이라는 세월을 헛되이 보냈으며, 이로 인해 그의 많은 부하들이 그의 진영을 떠났다.
기원전 31년 봄에 옥타비우스는 준비를 마치고 이탈리아 남부의 브룬디시움(Brundisium)과 타렌툼(Tarentum)에 군대를 집결시켜 공세작전을 개시하였다. 그런데 나울로처스 해전에서 승리했던 함대가 행방불명되었다. 다시 그와 같은 대형 전선을 건조하는 것은 시기적으로도 불가능하였으며 비용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아그리파는 갑판이 낮고 소형이지만 속력과 기동성이 뛰어난 리부리안(liburian)을 건조하여 260여 척의 함대를 재건하였다.
파트라스에 주둔한 안토니함대가 해상 보급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그리파는 해상 봉쇄부터 시작하였다. 속력이 빠른 아그리파의 전선이 수송선을 나포하자 안토니함대는 보급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또한, 아그리파는 옥타비우스함대가 악티움 북쪽으로 진출할 수 있도록 코르키라(Corcyra : 현재의 Corfu 섬)를 점령하고 아드리아 해협을 확보하였다. 안토니는 자신의 함대가 정박하고 있는 악티움에 지상군을 전진배치하고 자신의 우수한 지휘 역량을 발휘하여 지상 전투에서 승부를 결정지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옥타비우스는 안토니에게 전투 기회를 주지 않고 육지에서 안토니를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아그리파함대는 코린트, 파드라스와 레우카스(Leucas)를 점령하여 안토니를 포위하였다. 이제 악티움에 주둔한 안토니 군대는 기아와 질병 그리고 병사들의 이탈로 인해 세력이 약화되어 지상전을 전개할 상황이 되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안토니 진영에서는 로마군을 중심으로 한 주전파와 이집트군이 중심이 되어 이집트로 탈출하자는 비주전파 사이에 내분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그리파는 암브라키아 만의 안토니함대의 탈출을 봉쇄하기 위해 1개 전대를 배치하였다. 이제 안토니의 마지막 희망은 함대를 이끌고 탈출하여 이집트에서 전쟁 준비를 새로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이 계획에 클레오파트라도 지지하였으며 이집트의 함선 66척이 안토니함대에 가세하였다. 안토니는 약 300척의 함선에 2만 명의 병력을 승선시키고 승조원이 없는 전선을 불태워버렸다. 한편 250척의 옥타비우스함대에는 3만 명의 병력이 승선하였다.
9월 2일 오전에 안토니는 그의 함대를 3개 전대로 편성하여 전투진형을 갖추었다. 우익 전대는 겔리우스(Lucius Gellius) 지휘 아래 북쪽 해안 근처에 위치하였으며, 주스티우스(Justius)가 중앙전대를 지휘하였고 코엘리우스(Coelius)가 남쪽 해안의 좌익전대를 지휘하였다. 이와 대결하는 옥타비우스의 함대는 아그리파(Marcus Agrippa)가 중앙전대, 루리우스(Marcus Lurius)가 남쪽의 우익전대 그리고 아룬티우스(Lucius Arruntius)가 북쪽의 좌익전대를 지휘하였다. 아그리파는 그의 중앙전대의 전진을 보류하였는데 그 이유는 보다 대형인 안토니의 전선들이 밀집대형을 이루고 측방 해안의 보호를 받고 있어서 그들을 포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날 정오경에 북동풍이 불자 안토니는 이를 이용하여 포위망 돌파를 시도하였다. 전투 시에는 돛대와 돛을 제거해야 하는데 이날 안토니는 전투보다는 탈출하기 위하여 돛대와 돛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안토니의 양측 전대가 중앙전대보다 더 빨리 전진하였는데 이때 아그리파는 함대의 외해 쪽으로 나가면 포위하기 쉽다는 것을 알고 천천히 후퇴하였다. 안토니의 전선 1척에 대하여 옥타비우스의 전선들이 3~4척씩 무리지어 공격하였다. 이날 전투에서는 충각전술이 사용되지 못했는데 안토니의 전선은 상대방을 충각하기에는 속력이 느리고 둔했으며 반면에 옥타비우스의 전선은 상대방을 충각하기에는 자신이 위험하였다. 안토니 휘하의 많은 전선들이 불화살에 맞아 불타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전세가 결정되지는 않았다.
<악티움 해전도>
오후 1시경에 클레오파트라가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전장을 탈출하였다. 안토니도 몇 척의 갤리선과 함께 가까스로 클레오파트라를 뒤따라 탈출하였다. 이때부터 안토니의 잔여 함대는 전의를 상실하고 패배하기 시작하였다. 몇 시간이 지난 후 안토니 함대의 일부가 악티움으로 도주하고 대부분은 불타거나 나포되었다.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가 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지중해 동부의 여러 지역이 옥타비우스에게 항복하였다. 다음 해 7월에 옥타비우스가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를 추격하여 이집트에 상륙하자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는 자살하였다.
Ⅳ. 해전의 결과와 교훈 : Consequences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함대가 결정적으로 패배함에 따라 로마의 권력은 옥타비우스 1인에게 돌아갔으며 옥타비우스는 기원전 27년에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가 되었다. 악티움 해전은 로마가 공화제에서 제국으로 바뀌는 전환점이 된 역사적인 해전이라고 볼 수 있다. 그 후 약 4세기 동안 로마가 전 지중해를 지배하였는데, 로마의 지중해 지배는 로마가 광대한 제국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필수요건이었던 것이다.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우스함대가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은 결정적으로 아그리파 1인의 뛰어난 함대 지휘 능력에 달려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첫째, 아그리파는 옥타비우스를 위하여 함대를 건설하거나 재건하였다. 둘째, 아그리파는 전략적 공세를 취하고 안토니함대를 봉쇄함으로써 안토니 진영의 전투 의지를 근본부터 흔들어 놓았다. 셋째, 아그리파는 유능한 해적을 상대로 해전을 했던 경험을 살려 악티움 해전에서 자신의 무기체계에 맞는 전술을 적절하게 사용함으로써 승리할 수 있었다.
한편, 안토니함대의 패인은 전적으로 안토니의 우유부단한 지휘 때문이었다. 첫째, 그는 우세한 지상군과 함대를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헛되이 소비함에 따라 옥타비우스에게 전쟁을 준비할 기회를 주었다. 둘째, 안토니 진영은 주전파와 비주전파로 나뉘어 내분이 발생하여 국론이 분열되어 있었다. 셋째, 기아와 질병 그리고 병사들의 이탈로 인해 전력이 크게 약화되었으며 이로 인해 500척의 함선 가운데 300척에만 승조원과 병력을 승선시킬 수밖에 없었다. 넷째, 안토니는 전투보다는 탈출에 목적을 두었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전투의지가 약했던 함대의 패배를 자초하였다. 다섯째, 안토니함대의 견고한 대형 전선들이 기동력이 뛰어난 아그리파의 소형 전선들을 제압하지 못했다. 이는 안토니함대의 전투 경험이 부족했으며 함선들의 속력이 아그리파함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느렸기 때문이다.
악티움 해전이 주는 교훈을 세 가지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 함대봉쇄는 전략적인 공세행동으로서 적의 전의와 전투력을 약화시키는 심리적·전투적 효과를 가진다. 아그리파가 안토니를 고립시키기 위해 해상봉쇄를 가함에 따라, 안토니 진영은 증원이 차단되고 보급의 부족을 겪게 되어 기아와 질병으로 사기가 크게 떨어지고 급기야 병력의 이탈로 인해 전투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이와 같이 함대봉쇄는 전투 전에 이미 승패를 결정할 정도로 적에 가하는 심리적·전술적 효과가 크다.
둘째, 특별한 상황에 적합한 전술의 개발과 무기의 운용은 전투의 승패를 결정한다. 아그리파는 해적을 소탕할 때, 견고한 대형 함선으로 속력과 기동성이 뛰어난 소형 함선으로 구성된 함대를 격파한 경험이 있었다. 이와는 반대로 악티움 해전에서 아그리파는 속력과 기동성이 뛰어난 소형 함선으로 구성된 함대로 대형이며 견고한 함선들을 가진 안토니 함대를 격파하였다. 이때 그는 소형 함선으로는 대형 함선을 충각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적선을 포위하고 불화살 등을 사용함으로써 승리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특별한 상황에 적합한 전술과 무기의 사용 그리고 이를 위한 주도면밀한 계획과 훈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셋째, 지휘관의 리더십은 확고부동한 신념을 보여주어야 한다. 한때 로마를 호령하던 안토니는 전쟁 준비를 지연시키는 우유부단한 지휘를 함으로써 자신의 진영을 주전파와 비주전파로 분열시키고 군대 전체의 전의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결정적인 악티움 해전에서는 - 물론 탈출이 목적이었지만 - 치열한 전투 중에 탈출함으로써 자신의 함대 전체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해전 자체를 패전으로 몰고 갔다. 안토니는 우유부단한 지휘관의 최후가 어떠한 것인가를 잘 보여주었는데, 이는 안토니가 클레오파트라와 사욕 때문에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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