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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호(01월) | 살라미스 해전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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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조덕현 작성일17-02-13 10:15 조회4,21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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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라미스 해전에 관한 연구


조덕현(충남대학교)

Ⅰ. 들어가는 말

  살라미스 해전Battle of Salamis은 기원전 480년 9월에 아테네 인근 섬인 살라미스와 육지 사이의 해협에서 일어난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 제국과 그리스 도시국가 연합군 사이에 벌어진 해전이다. 살라미스 해전은 같은 해에 시작된 제2차 페르시아 전쟁의 정점을 이루었다. 수적으로 훨씬 열세였던 그리스 연합군은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 장군에 설복되어 페르시아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해상 작전을 수행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다시 페르시아 함대와 싸우기로 하였다.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 1세 역시 결정적인 전투를 원하고 있었다. 테미스토클레스의 속임수로 페르시아 함대는 살라미스 해협에 진입하여 두 입구를 막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해협의 폭이 너무 좁았기 때문에 페르시아의 함선들이 이동하려고 시도하다가 흩어져 이들의 수적 우세는 장애가 되고 말았다. 이에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리스 함대는 전열을 가다듬어 페르시아 함대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최소한 200여 척이 넘는 페르시아 함선이 침몰하거나 나포되었다.
  이에 따라 크세르크세스는 대부분의 군대를 이끌고 아시아로 퇴각하였으며,  마르도니오스만 남겨 그리스 정복을 완수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그리스에 주둔하고 있던 페르시아군은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그리스 군에 의해 격퇴당하였으며, 미칼레 전투에서 페르시아 해군이 패하였다. 그 후 페르시아는 더 이상 그리스 본토를 정복할 시도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살라미스 해전과 플라타이아이 전투는 페르시아 전쟁의 전환점이 되었으며, 이때부터 그리스의 폴리스 연합은 반격에 나섰다. 역사가들은 페르시아 전쟁에서 아테네 연합군의 페르시아에 대한 승리가 고대 그리스 발전의 초석이 되었으며, 특히 살라미스 해전은 페르시아 전쟁의 흐름을 바꾸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해전으로 평가하고 있다.


Ⅱ. 해전의 배경 : Cause

  고대 그리스인은 기원전 8세기 이전부터 이미 도시국가polis를 건설하고 페니키아인Phoenician으로부터 조선술과 항해술을 배워 해양활동을 하였으며, 기원전 5세기에는 에게해Aegean Sea와 흑해에서 페니키아와 카르타고Carthage 세력을 축출하고 동부 지중해의 해상무역을 독점하였다. 또한, 그리스는 소아시아 연안, 트라키아Thrace, 시실리와 남부 이탈리아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무역 거점을 확보하였다.
  현편, 기원전 530년경에 페르시아가 현재의 중동 일대를 통일하고 강대한 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에게해 연안의 소아시아 도시국가들이 아테네Athens의 지원을 받아 항거하자 페르시아의 군주 다리우스 1세Darius I가 이들 도시국가들을 정복하고 그 세력을 확장시키기 위해 그리스 원정을 결심하였다. 이후 페르시아의 그리스 원정은 세 차례회에 걸쳐 전개되었다.
  페르시아의 제1차 원정은 기원전 492년에 시작되었는데, 이때 페르시아 원정군은 바다와 육지를 공격하면서 트리키아와 마케도니아Mecedonia 일대를 평정하였으나, 지상군을 지원하던 페르시아 함대가 에게해 북부 아토스Arthos 곶 근해에서 폭풍을 만나 대부분의 함정을 잃게 되어 철수하고 말았다. 기원전 490년에 실시된 제2차 원정은 에게해를 횡단하여 직접 마라톤Marathon 부근에 상륙한 페르시아군이 마라톤 전투에서 패배함에 따라 역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 기원전 481년에 다리우스 1세의 아들인 크세르세스Xerxes가 당시로서는 사상 최대 규모인 18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제3차 원정에 나섰다. 이때 페르시아군은 헬레스폰트Hellespont에 2개의 부교를 설치하여 1주일 동안 해협을 건너간 다음 트라키아, 마케도니아를 거쳐 그리스를 침공하였다. 한편, 지상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수송선과 함께 전투함 1,300척으로 구성된 페르시아 함대가 에게해 북부 연안을 따라 출동하였다.
  이러한 대규모 페르시아 원정군을 맞이하여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혼란 속에서 결속하지 못하고 분열되었는데, 아테네와 스파르타Sparta 등 일부 도시국가들은 결연한 항전을 주장하였으나, 많은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페르시아와의 대결을 회피하고 항복하였다. 아테네에서는 강력한 함대를 건설하여 페르시아구의 침략에 대항하자는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와 강력한 함대를 가지고도 페르시아의 막강한 지상군을 저지하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아리스티데스Aristides가 정책 대결을 벌였다. 시민투표 결과 테미스토클레스가 승리하자 그는 시민들에게 호소하여 서둘러 전투함을 건조하여 200척에 이르는 3단노선trireme으로 구성된 함대를 건설하였다.
  한편, 그리스 남부의 펠로폰네소스Peloponnesos 국가들은 북부의 독시국가들을 포기하고 육상방어가 유리한 코린트 지협Isthmus of Corinth에 방어선을 구축하자고 주장하였으나, 테미스토클레스는 그보다 먼저 북방에 방어선을 구축하자고 주장하였다. 스파르타는 아테네 함대의 능력을 믿고 테미스토클레스의 전략을 지지하였다. 그리스 연합함대의 세력 중에서 아테네의 전선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테미스토클레스는 동맹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연합함대의 지휘권을 스파르타의 에우리비아데스Eurybiades에게 위임하였다.


Ⅲ. 해전의 경과 : Conduct

  페르시아 원정군은 순조롭게 진격을 계속하였는데, 진격해 갈수록 인근 국가들의 지원을 받아 그 세력이 더욱 강해졌다. 이에 비해 분열된 그리스는 병력의 절대적인 열세로 인해 북부 도시국가들을 포기하고 지상군을 이용하여 산악 통로인 테르모필레Thermopylae에 방어선을 구척하고 연합함대가 우측 연안을 방호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그리하여 그리스 연합함대는 본토와 에우보이아Euboea 섬 동북쪽 해협에 있는 아르테미시움Artemisium에 집결하여 그리스의 지상군을 엄호하였다. 기원전 480년 8월,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Leonidas가 지휘한 그리스 방어군 6,000명이 테르모필레 통로에서 페르시아 대군을 맞이하여 선전분투하였지만 병력의 절대적인 열세로 인해 전멸하고 말았다. 페르시아군은 테르모필레 방어선을 돌파한 후 계속 진격하여 9월에 아테네마저 점령하고 더욱 기세를 올렸다.
  한편, 그리스 연합함대가 아르테미시움에 집결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페르시아 함대는 200척의 전선을 에우보이아 섬 남쪽으로 보내 그리스 함대의 퇴로를 차단한 후 공격하려는 작전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리스함대가 이러한 정보를 알고 먼저 페르시아함대를 공격하였다. 양측 함대는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승패가 결정되기 전에 밤이 되어 각각 퇴각하였다. 그날 밤에 심한 폭풍우가 몰아쳐 에우보이아 남쪽으로 항해하던 페르시아의 전선 200척이 거의 좌초당하여 대파당하는 불운을 겪었는데 그리스함대로서는 매우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육상에서 테르모필레 전투가 벌어졌던 제2일과 제3일에도 해전이 있었으나 역시 결정적인 승패를 내지 못하고 양측이 철수하였다. 이와 같이 3일 간에 일어났던 해전을 아르테미시움 해전이라 부른다.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그리스 방어군이 전멸하자, 그리스 연합함대는 아르테미시움을 떠나 아테네에 인접한 살라미스 섬Salamis Island으로 이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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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페르시아군의 원정로

 

  아테네가 점령당했다는 소식이 살라미스에 대기하고 있던 그리스함대에 전해지자 펠로폰네소스의 해군 지휘관들은 코린트 지협으로 후퇴하여 방어선을 구축하자고 주장하였다. 테미스토클레스가 이를 적극 반대하였는데, 그는 아테네와 살라미스의 피난민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과 우세한 적의 함대가 위력을 발휘할 수 없는 좁은 해협에서 방어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전략·전술적인 판단 때문이었다. 또한, 후퇴할 경우 각 도시국가에서 파견된 전선들이 자기 도시국가를 방어하기 위해 함대가 분산될 우려가 있다고 역설하였다. 
  격론이 벌어지고 있는 회의에서 코린트의 지휘관이 “조국을 잃는 자는 침묵을 지켜라.”고 조롱하자, 테미스토클레스는 “200척의 아테네 전선이 도시이며, 이 전선에 가족을 승선시켜 이탈리아로 이주할 수도 있다.”고 응수하였다. 결국 그리스 연합함대의 지휘관 에우리비아데스는 아테네함대 없이는 페르시아함대에 대항할 수 없었기 때문에 테미스토클레스의 제안을 받아들여 살라미스에 머물면서 해상에서 결전을 벌이자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페르시아함대 역시 지상군의 진격에 맞추어 항진하여 살라미스에서 동쪽으로 8마일 떨어진 팔레론Phaleron 만에 집결하였다. 크세르세스는 함대를 방문하여 장병들을 격려하고 해상지휘관들에게 해전에 관하여 문의하였다. 거의 모든 지휘관들이 즉시 공격하는 것이 최상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크세르세스는 장병들을 격려한 후 해전을 준비하였다.
  한편, 그리스함대는 공포와 불안에 떨고 있었는데 특히 펠로폰네소스 부대의 동요가 심했다. 그 이유는 페르시아의 지상군이 펠로폰네소스를 향해 진격을 개시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리스함대에서는 펠로폰네소스로 이동하여 배수진을 치자는 논의가 다시 일어났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테미스토클레스는 전투가 지연될수록 불리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부하를 페르시아 진영에 침투시켜 그리스 군이 내부 분열로 인해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에 지체없이 공격하면 아테네 군이 협조할 것이라는 거짓 정보를 전달하도록 하였다.
  크세르세스는 이러한 정보를 믿고 한밤중에 은밀하게 전투를 준비하였다. 우선 그의 함대 가운데 이집트함대로 하여금 살라미스의 서쪽 해로를 봉쇄하게 하고, 주력부대인 500척 이상의 페르시아함대는 전투 진형을 갖추고 동쪽으로 진출하게 하였다. 또한, 병력을 인근 섬에 상륙시켜 해전이 일어나 난파선과 병사들이 표류할 경우 아군을 구조하고 적을 격멸하도록 조치하였다. 살라미스 해전이 있기 전날 밤에 격렬하게 논쟁을 벌이고 있던 그리스의 해상지휘관들에게 이집트함대가 살라미스 해협의 서쪽을 봉쇄하기 위해 항진하고 있다는 급보가 전해졌다. 따라서 퇴로를 차단 당한 그리스함대는 페르시아의 주력함대와 결전을 최선의 전략으로 간주하고 해전 준비에 착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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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살라미스 해전도

 

  페르시아 함대는 에우보이아 섬 근해에서 당한 해난과 아르테미시움 해전에서 입은 손실 등으로 400척이 피해를 입었으나 여전히 800척이 남아 있었으며, 그리스 연합함대도 약간의 손실로 인해 300여 척이 남아 있었다. 페르시아함대는 이집트함대가 서쪽 수로를 봉쇄하기 위해 살라미스 섬 남쪽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그 수로가 줄었으나 그리스 연합함대에 비하면 두 배 정도 우세하였다. 9월 23일, 날이 밝아오자 해로의 동쪽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페르시아 전선들이 진형을 갖추고 해로에 진입하였다. 나팔소리와 북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양측의 전선들이 횡렬진을 형성하고 속력을 내어 거리를 좁혀 들어갔다.
  전술상의 이점은 그리스 연합함대에 있었다. 그리스함대는 질서정연하게 전투 진형을 유지하고 있었고, 그들 자신과 가족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인 각오로 전투에 임했던 것이다. 이에 반해 페르시아함대는 수로가 좁았기 때문에 계획된 횡렬진으로 전선을 투입할 수가 없었고, 프시탈레아Psyttalea 섬 때문에 진형이 흩어지게 되었다. 또한, 그리스함대가 기대했던 서풍이 불어와 해로에 파도를 일게 하여 페르시아 전선들의 기동을 힘들게 하였다. 해협의 폭은 좁은 곳이 1마일, 넓은 곳이 2마일을 넘지 않았기 때문에, 양측이 겨우 100척으로 전투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페르시아함대가 그리스함대에 비하여 수적으로 두 배나 우세하였지만, 전방의 전선 척수는 양측이 비슷한 결과가 되었다.
  이와 같이 좁은 해역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그리스함대의 전선들은 용감하게 돌진하여 페르시아의 전선을 향해 충각해 들어갔다. 또한, 그리스함대의 우익이 무질서해진 페르시아함대의 좌익을 공격하였다. 그러자 페르시아함대의 좌익은 한창 공격을 받고 있던 그들의 우익 쪽으로 밀리어 혼란을 가중시켰다. 페르시아 전선들은 파손된 전선과 바다에 빠진 병사들 사이로 후퇴함에 때라 후위의 전선과 충돌하는 혼란을 겪게 되었다. 백병전에서도 그리스 전사들이 페르시아 군에 비하여 중무장을 하였기 때문에 유리하였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전세는 더욱 페르시아함대에 불리해졌다.
  7시간 이상 동안 계속된 이 해전에서 페르시아함대는 그 세력 가운데 절반이 격침되거나 나포되었으며 많은 지휘관을 잃고 대패하였다. 해가 질 무렵에 남은 페르시아함대는 팔레론 만으로 퇴각하였다. 한편, 섬에 상륙했던 페르시아 군은 테미스토클레스의 정적이었던 아리스티데스가 지휘하던 그리스의 지상군에 의해 전멸 당하였다. 이리하여 살라미스해전의 막이 내렸는데, 이 해전에서 그리스함대는 단지 40척을 상실하였을 뿐이다.
  살라미스해전의 결과는 즉각적으로 반응이 나타났다. 해전의 결과에 크게 낙담한 크세르세스는 그리스 원정을 중단하고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지상군의 보급을 지원했던 함대가 패해 페르시아 군이 더 이상 아테네를 점령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리스함대가 헬레스폰트의 부교를 파괴하지나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크세르세스는 서둘러 헬레스폰트로 철수하였다. 그는 철수하면서 그리스 북부를 평정하기 위하여 그의 삼촌인 마르도니오스Mardonius 휘하에 약 10만 명의 원정군을 남겨두었으나, 마르도니오스의 원정군도 그 다음 해 여름에 플라타에아Plataea 전투에서 그리스 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한편, 해전이 끝난 후 그리스함대는 해역에서 파손되어 표류하고 있던 선체를 모두 살라미스로 가져와 수리한 후 새로운 해전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적의 해상부대가 이미 철수하였음을 알고 곧 추격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스함대는 즉시 추격에 나섰으나 적의 함대를 발견하지 못했다. 이에 테미스토클레스는 헬레스폰트로 직행하여 부교를 파괴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에우리비아데스는 만약 부교를 파괴하면 진퇴양난에 빠진 크세르세스가 유럽에 머물러 결연한 행동을 취하면 오히려 피해가 더 클 것이라 판단하여 페르시아 군이 도주하도록 퇴로를 열어 줄 것을 주장하여 부교는 그대로 두었다.

 

Ⅳ. 해전의 결과와 교훈 : Consequences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그리스가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전환점은 살라미스 해전이었다. 살라미스 해전 이후에 페르시아는 감히 그리스를 다시 침공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살라미스 해전은 위기에 처했던 그리스의 운명을 구한 해전이었으며, 페르시아의 유럽 침공을 좌절시키고 유럽의 문명을 지킨 역사적 해전이었다.
  살라미스 해전에 참가한 함대 가운데 압도적인 세력을 보유했던 아테네가 해양의 새로운 패자가 되었다. 아테네는 해양력을 바탕으로 그 세력을 소아시아까지 떨쳤으며, 아테네 문명의 황금기를 이룩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 문명의 발전은 살라미스 해전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살라미스 해전에서 그리스가 극적으로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는 아테네의 탁월한 지도자 테미스토클레스의 전략적 통찰력을 들 수 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제해권을 장악하여 페르시아군의 해상교통로를 차단하는 것이 페르시아 대군을 격퇴하는 길이라 확신하고 준비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상대적으로 우세한 페르시아 함대를 격파하기 위해 살라미스의 좁은 해역을 결전장으로 선정하고 그리스의 지휘관들을 설득했던 것이다.
  그 외에 그리스함대의 승인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요인이 더 있었다. 그리스의 전선이 페르시아 전선보다 견고하였기 때문에 충각전술과 백병전에서 유리하였다. 또한, 그리스함대는 6,000명의 중무장한 지상군을 승조시켜 백병전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끝으로 그리스함대는 바람의 이점을 잘 이용하였다.    한편, 페르시아함대의 패인으로는 페르시아함대가 테미스토클레스의 허위 정보를 믿고 그리스함대를 경시하였다는 점과 우세한 세력을 가지고도 좁은 해역에서 무리한 전투를 시도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페르시아함대는 살라미스 해전 직전에 그리스함대의 배후를 차단하기 위해 이집트함대를 파견함으로써 세력을 분산시켰다.
  살라미스 해전이 주는 교훈을 네 가지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 해상교통로는 전쟁을 지배한다. 해상교통로는 원정군이나 방어군에게 모두  전쟁을 지배하는 생명선이다. 크세르세스는 페르시아함대가 패전하자 제해권을 상실하고 해상교통로를 유지할 수 없었으며, 이로 인해 지상군이 더 이상 진격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즉시 원정을 중단하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둘째, 강한 조국애는 승리의 원동력이 된다. 살라미스 해전에서 조국의 위기를 구하고 시민을 보호하겠다는 그리스 연합함대의 정신적 결의가 해전에서 승리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정신 전력의 중요성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전투에서나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셋째, 전투 시 질서정연한 전투 진형의 유지는 승리의 중요한 요건이 된다. 그리스 함대는 전투 진형을 유지함으로써 시종일관 우세를 유지할 수 있었으며, 반면에 처음부터 산만해진 전투 진형을 유지한 페르시아함대는 충각전술과 백병전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질서정연한 전투 진형의 유지가 중요하다는 것은 노선시대 뿐만 아니라 범선시대와 추진기시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넷째, 그리스인의 관용을 들 수 있다. 그리스 연합함대의 세력 중에서 아테네의 전선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테미스토클레스는 동맹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연합함대의 지휘권을 스파르타의 에우리비아데스에게 맡겼다. 이러한 관용은 연합함대의 사기 진작에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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