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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호(10월) | 동아시아 해양 영토분쟁과 역사적 배경-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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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윤명철 (동국대 교수, 유라시아 실크로드연구소장) 작성일17-11-24 01:01 조회2,16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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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해양 영토분쟁과 역사적 배경-2

윤명철 (동국대 교수, 유라시아 실크로드연구소장)

3. 일·중 간 해양영토 갈등의 역사적 배경 - 센카쿠 제도(釣魚島)

  1) 현재 해양영토 분쟁의 상황


 중국과 일본 간의 분쟁은 도서 및 영해(동중국해)에서 센카쿠 제도(조어도)분쟁으로 나타나고 있다. 동아시아의 질서는 물론 한국의 이익과도 직결된 중대한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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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한중일 해양영토 현황.
(출처 : 한국 해양연구원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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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 중일 동중국해 영유권 갈등 현황.
(출처 : 부산일보 2012,08,16)

​일본 명칭은 센카쿠(尖角)열도이고, 중국 명칭은 釣魚島이다. 오키나와에서 약 300㎞, 대만에서 약 200㎞ 떨어진 동중국해남부에 위치해 있다. 가장 큰 섬은 조어도로, 동서 약 3.5km, 남북 약 2km에 이르는 섬이다. 해발이 높은 곳은 362m이다. 주된 섬이나 암초는 다음과 같다.  우오쓰리 섬(일본어: 魚釣島 (うおつりじま)) 댜오위 섬(釣魚島)4.32km² 383m을 비롯한 여러 개의 섬들이 있다.
 현재 오키나와현 이시가키시(石垣市)에 속하고 개인의 소유지도 있으며, 2005년부터 해상보안청이 어조도등대(魚釣島燈臺)를 운영하고 있다.
반면에 중화인민공화국은 이 섬을 대만성의 부속도서라고 주장한다. 1960년대 말 국제연합극동경제위원회((United Nations Economic Commission for Asia and the Far East)에서 ‘동중국해상 천연자원 매장량에 대한 보고서’(Sediments of Shallow Portions of East China Sea and South China Sea) 즉 『Emery Report』에서 이 해역에 대규모의 석유와 천연가스 유전이 있다고 밝혔다. 그 후 이 해역은 양상이 복잡해졌다. 그리고 1972년 오키나와의 일본 반환이 정식으로 발효되었고, 센카쿠 제도도 여기에 포함되게 된다. 그러자 대만에 이어 중국까지 영유권 분쟁에 본격 개입하기 시작했다.
중국은 1992년 2월에 ‘영해법’을 제정하여 釣魚島를 중국령으로 표기했고, 2004년 3월 중국인의 조어도 상륙 시도, 중국 해양탐사선의 일본 배타적 경제수역(EEZ, Exclusive Economic Zone) 침범 등으로 조어도(댜오위다오)에 대한 영유권 분쟁이 격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일본의 입장은 오키나와 반환협정에서 센카쿠 제도는 직접적으로 명기되지는 않았지만, 1953년 12월 25일 민정부 포고 제27호로 지정되어 그 범위 안에 센카쿠 제도도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선점한 이상 소극적으로 대처했으나 중국의 유도전략과 일본 내부의 보수 우익들의 행동으로 인해 변화하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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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 오키나와 반환협정에 명시된 반환구역, 왼쪽 중간에 센카쿠 제도 위치

​ 한편 중국 측은 1972년 이래로 대만뿐만 아닌 중국까지 가세한 형국으로 변했다. 중국 정부는 1992년 2월25일, 전국인민대회를 통해 ‘중화인민공화국 영해 및 접촉수역법’을 제정했고, 센카쿠 제도를 ‘조어(釣魚)열도’라는 이름으로 영토에 포함시켰다. 이로 인하여 군부가 개입할 명분과 권한을 준 셈이었다. 현재는 유사시 센카쿠의 일본해상자위대를 지원할 미 해군의 항모세력을 중국 연안에서 2000km 떨어진 곳에서부터 위협할 수 있는 ‘대함탄도미사일’(ASBM)까지 개발, 2009년부터 배치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2012년을 기점으로 어선, 해양조사선, 순시선이 센카쿠 주변해역에 자주 출몰한다. 심지어는 일부에서는 ‘오키나와의 중국에의 귀속문제를 정식으로 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은 류큐로 부터 철수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등의 주장도 있다.
하지만 중국·일본은 이 갈등이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는 판단을 하고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 영유권 문제는 인근 수역의 자원개발을 둘러싼 갈등 형태로 분출될 가능성이 크고, 이것은 동아시아 전체의 갈등은 물론이고 한국의 생존에도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 

  2) 해양영토 분쟁의 역사적 배경


그렇다면 이 영토갈등 또는 분쟁은 언제부터, 어떠한 형태로 발생하였을까? 이 문제는 이미 1972년 이전인 19세기 후반, 동아시아의 근대화 과정과 동아시아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 과정에서 비롯되었다. 두 나라 간의 갈등은 동중국해 해상의 대만과 오키나와에서 최초로 발생하였다. 일본은 1874년 5월 대만에서 유구(琉球)의 표류민이 살해당하자, 이를 명분으로 삼아 3천명의 병력으로 대만에 상륙하였다. 이어 1875년에는 유구를 점령하였고, 1879년에는 琉球國을 오키나와현(沖繩縣)으로 만들었다. 그 후 1885년 8월, 일본은 센카쿠 제도 일대에 대하여  측량 조사를 한 후에 이 섬들이 무인도라고 주장하면서 1895년 1월 14일, 일본의 내각에서 현지에 표식을 설치하는 결정이 떨어진 이후 센카쿠 제도를 일본 영토에 편입하였다. 이어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그 해 4월에 맺어진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요동반도, 대만, 팽호열도 등을 할양 받았다. 그런데 2차대전이 일본의 패전으로 끝나자 상황이 복잡해졌다. 대만과 팽호열도는 중화민국의 대만성(省)으로 개칭되었다. 반면에 난세이 제도와 오가사와라(小笠原) 제도 등을 포함한 북위 29도 이남의 섬은 전부 미국의 신탁 통치령이 되었고, 센카쿠 제도도 그 안에 포함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72년에는 전부가 일본으로 반환되었다. 일본은 이 해역인 난사이제도가 유구국권이었으므로 당연히 일본 영토였고 더구나 이미 선점해 있므므로 국제법상으로도 정당하다는 주장이다.  결국 이 문제는 자원의 문제와 미중간의 해양경쟁으로 인하여 더욱 복잡해질 수밖에 없고, 더구나 중국이 주변인 이어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으므로 이는 우리의 미래와도 직결된 문제이다. 

 
4. 일·러 간 해양영토 갈등의 역사적 배경-북방 4개 도서(쿠릴열도)  


1) 현재 해양 영토분쟁의 상황


일본과 러시아 간에는 ‘북방 4도 분쟁’ 또는 ‘쿠릴 열도 분쟁’이라고 불리우는 영토분쟁이 발생하게 된 치시마 열도(千島列島 : 쿠릴열도)의 남부에 있는 에토로후(択捉島), 쿠나시리(国後島), 하보마이(歯舞諸島), 시코탄(色丹島)의 4개 섬을 반환하라고 요구한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나서 1951년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일본은 치시마(쿠릴) 열도와 일본이 1905년의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획득한 사할린남부 및 부속도서 전부의 권리 및 청구권을 포기하였다. 그런데 이 조약은 6.25전쟁(한국전쟁) 중에 체결되었으므로 소련은 서명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본은 이것을 근거로 삼아 북방 4도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1956년부터 쿠나시리, 에토로후섬은 쿠릴열도의 일부가 아니라 일본 고유의 영토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한편, 소련은 일본이 외교를 회복하면서 1956년 일소 공동선언을 하면서 하보마이와 시코탄 2개 섬을 양도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근래에도 옐친 정부와 푸틴 정부도 몇 차례에 걸쳐 일부를 반환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하지만 일본정부 및 우익들의 견해차이가 있고, 또한 러시아도 실제로는 반환할 의사가 없으므로 기존의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북방영토를 반환하는 시도를 하고 있으며, 국민들 또한 자발적으로 그러한 움직임을 갖고 있다. 현재 홋카이도 일대에서는 이 섬들을 찾자는 운동들을 민간단체들이 펼치고 있으며 정부는 전시실의 마련, 교육 홍보 서명운동 등을 지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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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 대일본혜등려부의 표주 1930년.  가무이와카 곶에 세운 표지석 . 홋카이도 자료관에 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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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  國境標石拓本 1906년 북위 50도에 세운 것

​ 2) 해양영토 분쟁의 역사적 배경


그렇다면 이 영토갈등 또는 분쟁은 언제부터, 어떠한 형태로 발생하였을까? 동아시아에서 벌어지는 모든 영토갈등이 그러하듯이 이 분쟁 또한 근대화 과정과 동아시아의 헤게모니 쟁탈전과 깊은 연관이 있다. 러시아는 16세기 후반부터 극동 시베리아 지역에 진출하였다. 점차 동진을 계속하여 오호츠크해 캄차카반도에 상륙하였고 물론 베링해를 발견하였다. 1792년, 예카테리나 2세의 명령을 받은 북부 연해주 수비대장인 아담 락스만(Adam Laxman : Адам Кириллович Лаксман)이 홋카이도의 네무로 항에 도착하였다. 그는 구조한 일본인 표류인을 양도하는 명분을 갖고 일본에게 정식으로 통상할 것을 요구하였다. 해금정책을 고수한 도쿠가와 막부는 통상을 거절했다. 그러면서 막부는 서둘러서 치시마(쿠릴) 열도의 섬들을 ‘東에조치’에 배속시켰고, 1799년에는 막부의 직할령으로 지정해 러시아의 남하 정책에 적극적으로 대항했다. 이어 1808년에는 마미야 린조(間宮 林蔵)를 가라후토(사할린)지역으로 파견하여 그 지역을 탐험하고 측량을 실시했다. 그는 연해주로 건너가 아무르 강의 하구까지 탐사하였다. 일본은 그의 활동을 기념하여 사할린과 아무르 사이의 타타르 해협 끝을 마미야 해협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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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 홋카이도 자료관에 세운 마미야 린조의 동상과 설명문

이처럼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러시아가 남진하는 과정에서 무력충돌도 발생했다. 막부는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미일화친조약을 맺은 상태였는데, 러시아는 이 기회를 틈타 1855년 2월7일 ‘일러화친조약’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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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 쿠릴열도에 있어서 시기에 따른 러일 양국 국경의 변화, 1855년의 국경선은 일러화친조약 당시,

1875년의 국경선은 가라후토치시마 교환조약 이후, 1945년의 국경선은 현재의 국경선이다.

​즉 에토로후섬의 이남은 일본령으로, 우르프섬의 이북은 러시아령으로 삼았다. 이어 1875년 5월7일,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가라후토 치시마 교환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으로 러시아는 우루프섬 북쪽 쿠릴열도의 18개 섬 전체를 일본에 양도하고 일본은 홋카이도를 집중적으로 개척하는 한편 치시마(쿠릴)열도 전체를 손에 넣었다. 이는 러시아의 해군력이 북태평양으로 진출하는 것을 억제할 수 있었다. 러시아는 반면에 이미 1877년에 본격화된 튀르크와의 전쟁(1877-1878)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상황이 또 다시 달라졌다. 일본은 강대국으로 변신하면서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면서 북상을 했다. 여기에 조선에 대한 종주권, 영국의 대 러시아 정책 등이 상호작동하면서 러일 전쟁이 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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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 사할린에 상륙한 일본군의 모습​

​육지와 바다에서 벌어진 러일전쟁은 가라후토 작전(樺太作戦)으로 끝났다. 결국 러시아는 1905년 9월 5일 서명된 포츠머스 조약에서 북위 50도 이하의 사할린 섬 절반을 일본에게 영구히 양도하였다. 따라서 일본은 북방 4도 이북의 쿠릴열도 전체 뿐 만 아니라 도쿠가와 막부시대부터 영유권을 주장한 사할린의 절반까지 손에 넣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일본인뿐만 아니라 징용간 조선인들이 사할린에서 한동안 거주한 것이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 거의 끝나갈 무렵 상황은 또 다시 역전되었다. 러시아는 1945년 8월 8일, 일소 중립조약을 폐기하면서 만주를 침공하였고 일본과 전쟁을 벌였다. 일본의 항복이 조인된 9월 2일 이후에도 소련은 일방적으로 일본을 공격하다가 9월 5일에야 중지하였다. 이것은 북방 4도를 포함한 쿠릴열도 전체를 장악하려는 의도였다. 결국 이때 러시아는 북방 4개 섬을 다시 장악했고 지금껏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동아시아의 동북쪽 끝인 소위 ‘북방 4개 도서(남쿠릴 열도) 분쟁’은 이러한 동아시아의 근대화 과정과 질서재편과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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