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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저널 2018년 ISSN 2465-809X(Online)

제31호(1-3월) | 영국·스페인 전쟁 해전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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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조덕현(충남대학교 초빙교수) 작성일18-03-06 01:51 조회5,17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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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스페인 전쟁 해전에 관한 연구

조덕현(충남대학교 초빙교수)

 


I. 전쟁의 배경 및 경과

 

  포르투갈과 함께 신항로 개척과 신대륙 발견에 앞장섰던 스페인은 유럽의 다른 국가보다 먼저 신대륙에 식민지를 개척하고 많은 부를 획득하여 경제적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특히 필립 2세PhilipⅡ, 재위 1556~1598 시대에 스페인은 네덜란드, 밀라노, 나폴리, 시실리 등을 영유하고 신대륙에서는 멕시코, 페루, 아르헨티나 등의 식민지와 아시아에서는 필리핀을 식민지로 두고 국위를 떨치고 있었다. 그리하여 스페인은 해외 식민지를 유지하고 금과 은을 수송하는 상선을 보호하며 지중해에서 터키와 경쟁하기 위해 유명한 무적함대Invincible Armada를 건설하였다.
  당시 스페인의 통치 아래 있었던 네덜란드는 스페인 왕 필립 2세의 종교적 ·경제적 탄압에 항거하여 1566년부터 독립운동을 벌였다. 이때 영국은 스페인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자국의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에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네덜란드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Ⅰ, 재위 1558~1603는 네덜란드 반란군에게 정치적·재정적 지원을 제공하였으며, 영국의 사략선privateer이 스페인의 해상교통로를 교란하도록 하였다.
  오늘날 네덜란드와 벨기에로 알려진 저지대 국가The Low Countries는 스페인의 통치를 받고 있었는데, 스페인이 네덜란드에서 통치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상군은 물론 무기와 보급물자를 해상을 통해 수송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영국해협English Channel은 저지대 국가와 이베리아 반도를 연결하는 해상교통로를 파괴할 수 있는 중요한 해역이었다. 그렇게 때문에 스페인의 해상교통로는 영국과 네덜란드의 사략선에 노출되어 자주 공격을 받았다. 흥미로운 것은 독립전쟁 기간에 네덜란드 상선은 적대국인 스페인의 상품을 수송하여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네덜란드 해군이 자국의 상선을 공격하는 경우도 있었다. 네덜란드 해군은 대규모 전투는 아니지만 곳곳에서 스페인 함대와 선단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영국·스페인 전쟁Anglo-Spanish War, 1567~1604 기간은 해전의 새로운 시대가 개막된 시기였다. 이 시기에 세계일주를 할 수 있는 능력과 적의 함선을 격침할 수 있는 중포를 탑재한 범선이 처음으로 출현하여 해전에 참가하기 시작하였다. 영국은 스페인에 대하여 공세적인 해양전략을 추구하였는데, 여왕을 비롯한 무역상, 은행가 등 투자가들이 일치단결된 적극적인 협력체제를 유지하고 스페인에 대한 약탈 활동을 장려하였다. 특히 노예무역상이었던 호킨스John Hawkins가 해군위원회Navy Board 위원이 되었는데, 그는 스페인의 식민지로부터 반입되는 금과 은을 차단하기 위해 선체가 낮지만 항해성이 뛰어나고 현측에 중포를 장착한 전투함의 전조를 적극 추진하였다.
  그동안 스페인과 냉전을 벌여왔던 엘리자베스 여왕은 1585년에 7,000명의 병력을 네덜란드에 파병하고 드레이크 공Sir Francis Drake에게 카리브해의 스페인 영토에 대한 해군공격을 허가하였다. 1686년 드레이크는 29척의 함선과 2,3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강력한 함대를 이끌고 신세계로 출동하여 스페인과 포르투갈 식민지에 대한 공격을 가하고 상당한 성과를 거둔 후 1586년에 귀국하였다. 영국군의 네덜란드 파병은 전략적 성과가 있었는데, 영국군은 네덜란드 군과 함께 네덜란드 연안의 수심이 깊은 항구를 통제하였다. 이는 반란군을 지원하는데 요긴했을 뿐만 아니라, 무적함대의 영국 침공이 실패하게 된 하나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이와 같이 영국은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 정치적·종교적 이유로 스페인과 적대관계에 있었다. 그러한 영국이 1585년에 네덜란드와 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스페인 왕 필립 2세는 영국에 일격을 가함으로써 네덜란드에 대한 지속적인 통치를 유지하고 영국과의 종교적·정치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필립 2세는 영국을 침공하기 위해 무적함대를 출동시키기로 결심하였다.


II. 스페인 무적함대의 패배

 

  필립2세의 요구에 따라 1586년 3월에 산타 크루즈Marquis of Santa Cruz 제독이 영국 침공을 위한 세력의 견적을 제출하였다. 그의 견적에 의하면, 최소한 50척의 대형 갤리온Galleon : 범선, 100척의 무장상선, 40척의 대형 수송선, 연안작전에 사용될 320척의 소형 보조선 그리고 25,000명의 선원과 60,000명의 병력이 요구되었다. 수십년 동안 해전 경험을 가진 산타 크루즈의 견적은 영국의 지리적 환경과 영국의 저항을 고려할 때 현실적인 요소였으나, 이는 스페인의 자원 동원 능력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필립 2세가 구상한 영국 침공계획은 무적함대가 영국해협을 항해하여 플랑드르Flanders 근해에서 네덜란드에 주둔한 파르마 공Duke of Parma의 병력 30,000~40,000을 수송하는 바지barge 함대를 상봉한 다음, 이 바지함대를 상륙장소인 테임즈 강 입구로 호송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무적함대가 19,000명의 병력을 수송하며, 스페인군의 상륙작전을 엄호하고 파르마군의 교통로를 보장하며 영국함대를 격퇴하는 것이었다.
  1587년에 스페인 무적함대의 출동준비를 방해하기 위해 드레이크의 지휘 아래 전투함과 16척의 경무장 함선 7척으로 구성된 영국전대가 출동하였다. 드레이크는 카디즈 만Cadiz Bay을 급습하여 스페인 함선 37척을 나포하거나 불태웠다. 이후 드레이크는 수주일 동안 이베리아 반도 남서해역에서 다수의 소형 선박을 나포하고 화물을 불태웠다. 이들 선박의 화물은 나무통을 제작하는데 1,700톤 정도의 재료가 소요되었는데 이것은 25,000~30,000톤의 식품과 음료수를 담을 수 있는 양이었다. 그런데 잘 말린 나무통 재료를 불태워 버렸다는 것은 결국 조잡한 나무통 재료를 사용하여 불량한 나무통을 제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였는데, 이는 식료품이 상하고 음료수가 새는 원인이 될 수 있었다.
  이러한 드레이크의 활약으로 인해 필립 2세는 무적함대의 출동은 1년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필립 2세는 여러 차례 터키와의 전역에 참가했던 유능한 지휘관인 산타 크루즈 제독을 무적함대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산타 크루즈는 침공 세력이 매우 불충분하다고 인식하였지만 국왕의 명령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산타 크루즈는 무적함대가 출동하기 전에 사망하였다.
 성실하지만 해상 경험이 적은 메디나 시도니아 공Duke of Medina Sidonia이 무적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588년 5월 23일 총 130척의 함선으로 구성된 무적함대가 리스본Lisbon을 출항하였다. 여기에는 대형 갤리온 20척, 무장상선 44척, 수송선 23척, 소형 보조선 35척 그리고 갈레아스선과 갤리선이 각각 4척이 있었다. 포 2,431중포 1,100 문이 있었으며, 승조원 8,500명과 보병 19,000명이 승조하였다. 스페인 무적함대는 적선의 현측에 접근하여 백병전을 수행하는 레판토 해전 시의 전술을 사용하려고 하였다.
  이에 대항하는 영국 함대는 하워드 경Lord Howard과 드레이크가 지휘하는 2개 전대 전투함 68척, 소형 함선 약 50척이 있었으며, 또 다른 2개 전대 전투함 53척이 도버Dover 근해에서 파르마군의 영국해협 횡단에 대비하고 있었다. 영국 함대는 중포 1,600문을 장착하고 있었다. 영국의 전투함은 스페인의 전투함보다 속력이 빨랐으며, 포의 성능과 포요원의 경험도 모두 앞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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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스페인 무적함대 원정로


  무적함대는 8월 6일 영국 침공군이 파르마군 40,000명을 수송하는 바지를 호송하기로 예정했던 곳이며 중립항인 프랑스의 칼레Calais 외해에 투묘하고 있었다. 스페인군은 플랑드르 연안에 수심이 좋은 항구를 하나도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 연안은 천해와 사주 때문에 정상적인 전투함의 항해가 불가능한 해역이었다. 더욱이 네덜란드의 낫소Justinus van Nassau 제독이 지휘한 중무장의 쾌속 평저선이 무적함대의 함포 사정거리 밖에서 파르마군의 바지를 공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평저선이 부족한 무적함대는 파르마군을 지원할 방법이 없었다.
  8월 7일 야간에 영국함대가 투묘 중인 적함대에 대하여 8척의 화선fire ship을 출동시켜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때 영국은 심리전을 이용하였는데, 영국은 이탈리아의 유명한 화선 기술자 지암벨리Federigo Giambelli - 그는 앤트워프의 지옥화염hellbunrners of Antwerp으로 유명한 화선을 설계하여 스페인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인물이었다 - 를 고용하였다고 오래 전부터 선전함으로써 스페인군을 불안하게 하였다. 화선이 접근해 오자 공포감에 사로잡힌 무적함대의 많은 함장들이 닻줄을 절단하고 도피함에 따라 무적함대는 일대 혼란에 빠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침에 영국함대가 공격을 가해왔다. 무적함대의 많은 함선들이 파손되고 인명의 손실도 많았다. 8시간 동안 계속된 이 전투에서 영국함대가 탄약이 모두 떨어져 철수하였으며, 남풍이 불었기 때문에 양측 함대는 북쪽으로 항해하였다. 메디나 시도니아는 북해를 경유하여 영국 북쪽을 돌아 귀국하기로 결심하였다. 무적함대는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일주하여 귀국할 때까지 불량한 나무통으로 인해 식량과 식수가 부패하고 이로 말미암아 기아와 갈증 그리고 전염병으로 극심한 곤란을 겪었다. 메디나 시도니아의 명령에 불복하고 많은 함선들이 아일랜드 항구에 입항하려고 시도하다가 난파당하여 무적함대는 다시 많은 함선과 인명의 손실을 입었다.
  패주한 무적함대는 9월 말에 귀국하였는데 총 44척을 상실하였다. 전투함  64척 가운데 44척이 귀항하였지만 대부분 임무 수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손실은 수천 명의 승조원과 수천 명의 유능한 보병을 상실하였다는 점이다. 그해에 영국은 반신불수가 된 채 항구에 방치되어 있던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완전히 격파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1598년에 드레이크의 지휘 아래 83척의 전투함, 60척의 수송선 그리고 19,000명의 병력과 함께 강력한 함대가 출동하였다. 그런데 이 출동은 스페인의 잔존 함대를 격파한다는 원래 목적이 리스본 원정으로 확대되어 스페인으로부터 포르투갈을 분리시키기 위한 대규모 작전으로 전개되었으며, 그 시기가 너무 늦었고 도시의 탈취 계획도 실패로 끝나고 무적함대를 완전히 격파할 호기마저 놓치고 말았다.
  수리를 마치고 재기한 무적함대가 영국을 침공하기 위해 1596년과 1597년에 두 번 더 출동하였는데, 이 원정은 폭풍으로 인해 다시 실패로 끝났다. 이후 1604년에 영국과 스페인이 평화협정을 체결하였다. 1609년에 네덜란드와 스페인이 휴전에 합의한 후 1648년에 웨스트팔리아조약Treaty of Westphalia을 통해 네덜란드가 독립되었다.

 

III. 해전의 결과와 교훈


  장기간 지속된 영국과 스페인 간의 전쟁은 유럽과 세계 역사에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영국과 네덜란드 간의 동맹은 해양력을 이용하여 네덜란드를 계속 통치하려고 했던 스페인의 노력을 좌절시켰고 영국을 정벌하려고 계획했던 막강한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결정적으로 패배시켰다. 그리하여 이 전쟁을 통해서 네덜란드와 영국은 그들의 경제와 해군을 세계적으로 팽창시킬 수 있었다. 반면에 스페인은 장기간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국력의 소모가 많았고 정치적으로 유럽의 지도력을 잃고 이후 장기간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무적함대의 패배는 범선과 대포의 우월성을 보여 주었으며, 해전에서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충각전술은 현측포격전으로 대치되었으며, 진형은 횡렬진에서 종렬진으로 바뀌게 되었다. 스페인은 무적함대의 패배로 인해 국위가 실추되었으며, 이에 따라 해양력의 쇠퇴도 뒤따랐다. 만약 무적함대의 침공이 성공하여 당시 세계 최강의 육군이었던 스페인의 중보병이 영국에 상륙하였더라면, 영국은 큰 위기를 맞이하였을 것이다. 영국·스페인 전쟁에서 스페인의 패배 즉, 무적함대의 패인과 영국의 승인을 살쳐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무적함대의 패인을 살펴보면, 무적함대의 영국 침공계획 자체가 무모하였다. 산타 크루즈의 견적과는 달리 필립 2세는 네덜란드에 주둔한 파르마군을 이용하여 영국을 침공한다는 무모한 계획을 수립하였는데, 이러한 침공계획은 무적함대의 상봉 해역 도착, 파르마 부대의 네덜란드 항구 출발과 무적함대와의 상봉 등 완벽한 시간 계획과 협조가 필요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당시의 열악한 통신체계와 군수체계로 볼 때 불가능한 일이었다. 둘째, 무적함대는 갤리선을 동원하고 백병전을 추구하는 등 노선시대의 구식전술을 버리지 못했다. 셋째, 평저선이 부족하여 파르마군이 무적함대를 상봉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영국의 승인을 살펴보면, 첫째, 영국은 헨리 8세Henry Ⅷ, 재위 1509~1547 시대부터 범선 전투함대를 건설하였으며,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 와서 범선 전투함대 전술을 더욱 발전시켰다. 둘째, 영국군과 네덜란드군이 네덜란드 연안의 수심이 깊은 항구를 장악하였다. 이는 파르마군이 무적함대를 상봉하지 못한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셋째, 드레이크의 카디즈 원정이 의외의 전략적 성과를 거두었다. 드레이크의 원정은 스페인의 전투함선을 일부 파괴한 성과도 있었지만, 나무통 제작에 필요한 재료를 소각시켜 무적함대의 군수문제를 어렵게 하였다.
  영‧프전쟁의 교훈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제해권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군사력 투사는 큰 위험이 따른다. 스페인 무적함대는 영국해협의 제해권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영국 침공계획을 감행하였는데, 이는 제해권이 군사력 투사의 선행 조건이라는 점을 무시한 행동이었다. 결과적으로 무적함대는 제해권 확보와 영국 침공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추구하다가 아무 것도 성취하지 못하고 패배하였다.
  둘째, 수단에 부합하는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필립 2세의 영국 침공계획은 수단 즉, 당시 스페인의 군사적 능력을 무시한 과도한 목표였다. 무적함대의 세력은 역전의 유능한 해군지휘관인 산타 크루즈가 산출한 세력에 비하여 절반에 못 미치는 세력이었으며, 특히 평저선또는 소형 보조선은 10%에 지나지 않았다. 목표를 설정함에 있어서 명확한 판단은 필수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셋째, 새로운 무기의 획득과 새로운 전술의 습득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전통에 사로잡힌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노선시대1571년 레판토 해전처럼 백병전으로 싸우려고 하였고, 영국함대는 범선시대 전투를 시도하였다. 다시 말하면, 스페인 함대는 화승총으로 싸웠으며 영국함대는 대포로 싸웠던 것이다.
  넷째, 기습과 배후 교란을 위해서는 경부대의 출동이 효과적이다. 1587년 드레이크의 카디즈 원정은 소수의 정예 전대가 출동하여 스페인 배후를 교란하면서 무적함대의 출동을 지연시키는 전략적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원정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경부대에 의해 기습적으로 신속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무적함대의 영국 침공과 1598년 드레이크의 리스본 원정과 같은 대규모 원정은 준비의 지연, 작전의 노출 등으로 인해 실패할 가능성이 많았다. 따라서 스페인은 영국을 침공하기 위한 무적함대의 대규모 원정을 계획하기보다는 전쟁 초기에 소수정예의 경부대를 출동시켜 영국에 대하여 반정부 투쟁을 벌였던 아일랜드 반군을 지원하는 작전을 전개하였더라면 영국의 배후를 교란하는 상당한 전략적 성과를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원정은 실패하더라도 치명적인 손실을 피할 수 있다. 
  다섯째, 해외원정/원해작전은 군수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영국 침공을 시도했던 스페인 무적함대는 전술상의 패배보다도 군수문제로 인해 더 많은 타격을 받았다. 이는 해외 원정부대가 군수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원활한 작전을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해외원정/원해작전은 대규모일수록 군수문제가 더욱 중요하다.
  여섯째, 해외원정/원해작전을 위해서는 전략적 기지의 확보가 요구된다. 무적함대가 전진기지나 우방국 기지와 같은 전략적 기지를 확보하였다면, 파르마군의 상봉과 중간 군수지원 등의 어려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일곱째, 심리전은 전투에서 의외의 성과를 가져올 수 있다. 1588년 8월 7일 야간에 영국함대가 화선으로 무적함대를 공격할 때, 영국의 심리전에 말려든 스페인 함장들이 공포감에 사로잡힌 나머지 닻줄을 끊고 대피함에 따라 일대 혼란을 야기시켰다. 이때 스페인 함장들은 영국의 화선이 특별한 폭발물을 장치하지 않은 단순한 화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그리고 이 화선을 자함에 부딪히지 않게 하면서 해안 쪽으로 보냈더라면 큰 혼란이 없었을 것이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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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 『서구해전사』 (서울 : 연경문화사, 1997).
버나드 몽고메리 저・승영조 역, 『전쟁의 역사』 (서울 : 책세상,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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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사관학교, 『세계전쟁사』 (서울 : 봉명,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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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성, 『젊은이를 위한 세계전쟁사』 (서울 : 양서각, 1992).

Howarth, David. The Voyage of the Armada: The Spanish Story, London: The Viking Press,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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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nstam, Angus. The Armada: The Great Enterprise against England1588, London: Osprey Publishing,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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