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호(4-5월) | 미국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이순신 제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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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조덕현(충남대학교 초빙교수) 작성일18-04-24 17:02 조회4,085회 댓글0건본문
미국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이순신 제독
-조선말기와 일제강점기를 중심으로 -
조덕현
충남대학교 초빙교수
Ⅰ. 서 론
임진왜란 직전의 조선은 피폐한 정치 상황과 문란한 군정, 해이해진 국방의식 등으로 인해 한 마디로 토붕와해(土崩瓦解)의 형국이었다. 1592년 일본군이 부산포에 상륙한 후 불과 20여일 만에 수도 한양이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진 것만 보더라도 당시의 전쟁 상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스럽게도 조선 수군, 그 중에서도 이순신이 이끈 전라좌도 수군은 철저하게 전쟁을 준비하였고, 옥포해전에서 최초로 승리한 이래 임진년(1592) 한 해 동안 모든 해전에서 전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순신은 임진왜란의 마지막 노량해전까지 참전한 거의 모든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위기에 처한 조선을 구하는데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런 점에서 이순신은 한국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사 속에서도 군인(軍人) 중의 군인(soldier of soldiers), 전사(戰士) 중의 전사(warrior of warriors)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역사에서 이순신이 없었더라면 임진왜란 이후 우리의 역사는 어떻게 진행되었을까를 생각하면 혼미해 진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들 때 이순신은 반드시 등장하는, 그야말로 우리 역사상 위인 중에 한 사람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순신의 활약이나 명성에 비해 그에 대한 연구는 서구나 미국에서 넬슨 제독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 비한다면 그리 활발하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미국인들의 이순신 연구 경향을 소개하고 있는 연구는 거의 정리할 것이 없다. 홍이섭(洪以燮)은 1948년에 발간된 『新天地』 지에 “외국문헌에 보인 이순신 장군”을 발표하였다. 그는 논문과 서적 및 편지 5편에 대해 간단하게 소개하면서 충무공 이순신에 대한 기초적・다각적・종합적 연구와 자료 정리 그리고 그 결과의 번역 소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1966년에는 해군의 편집부가 “외국지에 나타난 이순신 제독”을 게재하였다. 특집으로 기획된 이 글은 세 가지 자료를 두 쪽으로 간단하게 소개하고 있다. 이후 미국인들의 이순신 연구와 평가에 대한 국내의 연구는 사실상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행스럽게도 해군사관학교 군사전략학 교수로서 오랫동안 해전사와 전쟁사를 강의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김주식 교수가 2011년 “이순신에 대한 서구의 연구와 평가”라는 논문을 통해 이순신에 관해 서구에서 연구된 28권의 저서와 논문들을 분석하여 체계적으로 소개하였다.
Ⅱ. 이순신에 대한 미국인들의 연구
1. 조선 말기
이순신과 거북선이 서구인에 의해 최초로 언급되거나 서구에 소개된 것은 1870년대 말 이후 조선의 개방정책에 따라 조선을 방문한 서구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1882년 미국의 동양학자로서 주로 일본의 역사에 대해 연구했던 그리피스(William E. Griffis)가 고대부터 당대까지 조선의 정치・사회・교육・종교・민속 등을 개관한 저서를 발간했는데, 여기에 임진왜란과 이순신에 관한 내용이 약 80여 쪽에 걸쳐 서술되어 있다. 그는 조선 수군이 일본이라는 용의 발톱에서 진주를 빼앗아 용으로 하여금 몸이 뒤틀리고 구겨지게 만들었다고 평가하였다. 수군의 승리가 조선인에게 미친 영향은 대단하여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적에게 저항하도록 고무시켰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순신에 대한 서술은 매우 적다. 그는 이순신의 업적을 개인이 아닌 조선 수군의 활동으로 서술하였으며, ‘명 수군 제독 이순신’이라고 오기하고 있고, 조선의 전선과 병사들이 훌륭하고 조선 장수들이 전술을 개발하여 함대를 훌륭하게 지휘했으며, 조선 수군의 해전 승리가 정유재란의 운명을 결정지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그리피스의 서술 경향은 그가 주로 일본에 머물면서 조선이 아닌 일본의 역사에 대해 연구했기 때문에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1884년에는 미국 무관 포크(George C. Foulk) 해군소위가 고성 지방의 해안가 백사장에 놓인 늑재(肋材)가 거북선의 것이라는 말을 지방민으로부터 들었다. 포크는 그해 11월 1일 한양을 출발하여 43일간 900마일에 이르는 남해안 여행을 한 기록을 남겼다. 이 여행기의 11월 21일자 기록에는 다음의 문구가 있다. “국가와 백성을 위해 일본군을 많이 죽인 통영의 영웅(hero of Tongyong)은 자신의 힘의 과시가 목숨을 잃게 한다는 것을 알고 일본함대가 잘 보이도록 기함의 높은 곳에 서 있다가 적의 권총이나 소총에 명중당해 죄인으로 죽는 것을 피했다.” 여기서 통영은 삼도수군통제영이 위치해 있던 남해안 요충지를 그리고 통영의 영웅은 이순신을 지칭하고 있다.
이순신과 거북선에 대한 내용이 미국의 문헌에 분명하게 나타난 것은 1892년부터였다. 1887년에 조선에 온 미국 감리교 선교사 존스(Geo Heber Jones)는 자신이 창간한 세 개의 잡지 중 하나에 “일본의 침략”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서울에서 걱정하고 있던 일본군 당국자들에게 짙게 드리운 구름이 남쪽에서는 이미 나타났다. 해상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재앙뿐이었다. 침략 직전에 해안가 외진 곳의 관리로 부임했던 이순신은 일본함대의 어떤 사령관도 필적할 수 없는 전투 능력을 가진 해군사령관으로서 성장하였다. 그는 첫 해전에서 일본함대를 격파하였으며, 이 해전에서 일본군이 9천 명을 잃은 것으로 보고되었다. 이때부터 이순신은 일본군을 발견할 때마다 격렬하게 공격했으며, 미국혁명기 모니터(USS Monitor) 함의 원조인 자신의 유명한 거북선 덕분에 한반도 연안 해역에서 일본군을 문자 그대로 휩쓸어버렸다. 이순신은 조선 해역에서 일본군을 소탕하고 있었던 것이다.”
1905년에는 미국 감리교 선교사로 조선에 왔던 헐버트(Homer B. Hulbert)의 책이 출판되었는데, 이 책에서 9개 장 120쪽이 임진왜란과 관련된 부분이다. 헐버트는 이순신이 해상에서 거둔 전대미문의 성공 이유를 스스로 발명하여 건조한 소수의 특수 함선 즉 거북선의 보유 때문으로 보았다. 또한 그는 한산도 해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위대한 세계 해전 중 하나는 그렇게 끝났다. 그렇게 믿는 것은 당연하다. 이 해전은 참으로 한국의 살라미스 해전(Salamis of Korea)으로 불릴 수 있다. 이 해전은 침략에 대한 사형선고를 의미했다. 이 해전은 일본이 침략의 가장 중요한 동기인 중국의 콧대를 꺾는 것을 실패하게 만들었다.” 노량해전에 관한 부분에서는 먼저 이순신의 전사 사실을 서술한 후 그를 “한국의 넬슨(Nelson of Korea)”으로 불릴 수 있는 인물로 간주하였다. 헐버트의 주장에 따르면, 이순신은 “조선을 직접 구한 사람”이었으나 종전 후까지 살아있다면 정적들이 자신을 끌어내릴 것을 예견하고 전투 도중에 죽음을 선택하였으며, 이 때문에 전후에 이순신에게 많은 명예가 안겨졌다.
헐버트는 1년 후인 1906년에 발간한 다른 저서에서도 이순신에 대한 칭송을 이어갔다. “일본군이 증강되지 못하도록 한 것은 이순신 제독의 충성심과 천재성 덕분이었다. 이순신은 세계의 위대한 영웅들 중 그 누구와도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조선인이었다.” 또한 이순신에 의한 일본 수군의 패배는 일본군의 침략 의지를 약화시켰기 때문에 “이 전쟁의 전환점이었다.” 1596년 일본의 고니시는 “무서운 이순신이 여전히 살아있고 그가 바다에 있는 한 일본군이 한반도에 증원군을 보낼 수 없었기 때문에 일본으로 기꺼이 떠나려 했다. 그들은 이 한국의 넬슨(Korean Nelson)에 의해 이미 18만 명을 잃었기 때문에 그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최후 해전에서 적함을 다 격파하였지만 이 해전에서 치명상을 당했다. 그러나 조국이 침략자들에게서 자유로워졌음을 보았기 때문에 치명상을 당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전쟁에서 살아남더라도 조정에 있는 자기 적들이 결국 자신을 죽일 궁리를 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조선시대에 미국인들에 의해 소개된 이순신에 대한 내용을 정리하면 이순신이 위기에 처한 조선을 구한 구국의 영웅이었으며, 영국 해군 역사상 가장 존경받고 있는 넬슨 제독과 비교하여 이순신을 한국의 넬슨이라고 칭송한 점과 한산도 해전을 서구의 살라미스 해전과 비교한 점이 흥미롭다.
2. 일제 강점기
일제 강점기에 서구인에 의한 이순신 연구는 1921년에 처음으로 나타났다. 영국 해군성 정보부 차장과 작전부장을 역임하고 1921년에 중장으로 전역했다가 1924년에 예비역 대장이 된 발라드(George Alexander Ballard) 제독은 전역한 1921년에 일본 해양력의 역사에 관한 저서를 발간하였다. 이 책은 서론과 결론을 합하여 모두 11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임진왜란에 관한 부분은 2개 장 31쪽이다. 이 저서는 서구의 이순신 평가와 이순신의 세계성에 대해 언급할 때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있다.
1933년에는 미국 장로교 선교사이자 교육자로서 한국에 체류하고 있던 언더우드(Horace H. Underwood)가 한국 선박사에 대한 책을 발간하였다. 언더우드의 저서는 서구뿐만 아니라 미국 내에서 이순신과 거북선을 연구할 때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있으며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지금까지 참고해 온 난관과 불리한 조건 그리고 해양 개발의 궁극적인 미비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이 그들 역사에서 유일하게 실제 해군 전역에서 그처럼 한결같이 승리한 것은 기이한 일이다. 그것은 이순신이라는 동시대인과 그의 유명한 거북선 혹은 귀선에 대한 이야기이다.” 비록 한국에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악조건들이 있었지만 그들이 당시 보유하고 있었던 우수한 해양기술이라면 모든 해전에서 승리를 했어야만 했다. 지금부터는 이순신과 그의 걸작인 거북선에 대해서 기술해보고자 한다.
“먼저 당시 전쟁의 의의를 살펴보자. 일본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었던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중국 본토까지 침략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일본군 24,000명의 병력은 큐슈 섬에 집결하여 800척의 함선을 이용하여 1592년 5월에 출항한 후 부산에 도착했다. 첫 함대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고니시(Konishi)가 지휘했는데, 기록에 따르면 그의 부대원들 중 대부분이 기독교인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두 번째 함대는 불교신자였던 가토(Kato)가 지휘했는데 이 부대 또한 지휘관의 영향을 받아 대부분 불교신자들이 주를 이루었다. 이 두 개의 함대가 부산에 상륙한 후 단 20일 만에 수도 한양까지 진격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 이순신은 전라도의 함대 사령관의 도움을 받아 여수를 떠나 옥포만에서 적군을 물리쳤다. 이 날은 음력 5월의 7번째 날이 되던 때였다. 곧이어 6월 초에는 당포에서도 해전이 일어났고 7월 초에는 한산대첩이 있었다. 위에서 언급한 해전들 모두 일본이 패했고 함선들은 거의 초토화 수준이었다. 여러 해전들을 차례로 치른 이순신은 다시 여수로 돌아가 휴식을 취했다. 그 동안 이순신은 병력들을 다시 준비시켜 부산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을 몰아낼 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는 180여 척의 함선들을 이끌고 부산으로 향했다. 카디스의 드레이크처럼 이순신은 부산에서 정박 중이던 500여 척의 일본 수군과 맞서 싸웠다. 필사적으로 싸운 결과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일본함선들을 크게 손상 또는 침몰시켰고 지원군 없이 손상을 입은 아군 함선과 부상 당한 수군들을 후퇴시켰다.”
“이순신이 개입했던 이러한 여러 차례의 해전들은 해군 역사상 가장 중요한 교전 중에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결국 이와 같은 해전들 때문에 히데요시의 중국 본토 침략의 꿈은 좌절되었고 평양까지 영향을 미쳐 평양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을 후퇴하게 만들었다. 네 차례의 해전들의 정확한 통계는 알 수 없지만 각 교전 당 약 700여 척이 참전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수차례 교전들이 있었지만 심도 있게 다뤄지지는 않는다.”
“필자는 교전을 언급하면서 교전의 어두운 면들을 부각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순신의 활약은 그의 노고를 왕이 치하했을 정도로 두드러졌다. 이를 시기하고 질투하던 정적들의 계략으로 인해 결국 이순신은 체포되어 한양으로 올라가 고문을 당해야만 했다. 그의 후임자였던 원균은 치욕스러운 패배를 당했으며 그의 함대는 초토화되었다. 이러한 틈을 타서 일본은 다시 조선을 넘볼 수 있게 되었으며 이때가 1597년 봄이었다. 조선은 이러한 혼란 속에서 믿을 사람은 이순신 밖에 없다고 판단하여 이순신을 다시 복직시켰다.”
“이순신은 뛰어난 전략을 바탕으로 지리적 조건을 최대한 활용했으며, 그의 리더십으로 부하들에게 용기를 심어주어 약 300여 척으로 구성된 적군의 함정들과 다시 한 번 교전을 펼치게 되었다. 이후에 이순신은 중국의 진린 장군의 자리를 대신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순신은 서열상 2위였지만 특유의 절제력과 뛰어난 전술로 실세였던 것이다. 이 두 사람은 협력하여 순천에 위치한 일본 요새를 함락시켰고 이 교전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이순신의 난중일기나 다른 역사 기록들을 더 살펴보아야 한다. 히데요시는 1598년에 사망했고 그의 예하에 있던 모든 부대들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조명 연합군은 일본으로 철수하던 수송 병력과 함선들을 공격해 완파시켰다. 더 심한 손상을 입혔을 수도 있었지만 조총을 보유하고 있던 일본의 거센 반격으로 인해 더 이상 효율적인 공격을 하지는 못했다. 이것이 이순신의 마지막 전투였으며 넬슨 제독처럼 이순신도 갑판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순신이 이러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거북선 때문이었다. 당시 거북선은 지금의 잠수함 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발견하기가 어려웠으며 이순신은 거북선에서 은둔할 수 있는 장소를 잘 활용했다. 그의 뛰어난 항해술을 바탕으로 건조한 거북선은 교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따라서 거북선의 탄생 배경과 특징들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국은 오랜 기간 동안 일본의 해적들로부터 자국의 배들을 보호해 줄 함선들이 필요했다. 당시 조선 수군은 선원들을 보호해주는 떠다니는 성이었던 ‘판옥선’을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역사 기록을 통해 1414년에 왕이 거북선의 실전 투입을 생각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거북선은 어느 순간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라 여느 위대한 발명품처럼 과거의 노력들이 축적되어 서서히 탄생한 함선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북선이 점차 더 넓은 영역에서 활용되면서 해군 역사상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 함선이 되었다. 다시 말해 거북선만큼 당시에 큰 성공을 거두고 적군에게 위압감을 준 함선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해전에 대해 자세한 사항들을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단편적인 사실들만으로 당시 용감했던 수군들의 모습과 4,000년이 넘는 한국의 항해 역사 속에 우뚝 선 이순신의 모습을 보았으면 한다. 이순신 시대는 다시 오지 않는다. 지금 우리 곁에 거북선은 없지만 적어도 한국인이라면 이순신의 위대한 정신을 지녔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 본다.”
1943년에는 미국의 군사사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인 키랄피(Alexander Kiralfy)가 일본의 해군전략에 관한 글에서 이순신에 대해 언급하였다. “이 중요한 순간에 이순신이라는 한 조선의 제독은 신기한 함선을 많이 포함한 함선들의 합류를 주도했던 거북등의 드레드노트급(turtle back dreadnought)이나 장갑 거북선(armored kopukson)을 타고 나타났다. 서해안으로 기동하려던 일본군 전선과 수송선은 전멸했다. 일본의 보호전대가 박살나버린 것이다. 그는 일본 수군의 패배를 해상통제권(command of the sea)을 빼앗긴 점과 조선의 수군과 그 무기체계에 대한 과소평가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이 글은 철저하게 일본의 입장에서 기술한 것으로서 이순신보다 일본 수군의 문제점을 주로 분석하고 있어 이순신에 대한 언급이 매우 적다.
1944년에는 미국 해군잡지에 이순신에 대한 글이 게재되었다. 임진왜란 기간 동안 일본 수군의 패배를 일본 역사에서 유일한 패배로 간주하고 있고, 또한 발표 시기가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때임을 감안할 때, 이것은 일본 해군의 패배 사례를 통해 일본이 무적이 아니며, 따라서 태평양 해전에서 미국이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장병들에게 주기 위해 쓰인 것처럼 보인다. 참고문헌이 없어 어떤 자료를 이용했는지 알 수 없지만, 첫 장에서 발라드의 저서 중 일부를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토요토미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으나 역사에서 거의 언급한 적이 없는 이순신은 동양에서 당시까지 알려진 어떤 것보다 우수한 함선을 건조했는데, 그것은 당대의 드레드노트 전함(dreadlought of her day)이자 세계 최초의 철갑선(world's first ironclad warship)이었다.” “유능하고 정력적인 이순신은 해상통제권을 확보하여 적의 해상교통로와 보급로를 지배함으로써 침략군의 이동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또한 중국 수군이 조선에 파병되었을 때, 이순신은 뛰어난 정치력과 기지로 난국을 극복하였다.”
“반대쪽에는 조국에 대한 침략과 약탈에 대해 보복하려는 동양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바다의 전사(the greatest sea fighter in eastern history)가 있었다. 고대 한국의 전설에 따르면, 이순신은 살아있을 시간이 조금밖에 없음을 알고 가공할 적에게 접근하면서 말했다. ‘오늘 내가 죽을 것이다. 내가 일본군에게 한 번 더 승리한다면 나는 만족하면서 죽을 것이다.’ 이 전투 이후 일본은 죽음을 무릅쓰면서 본국 국경을 감히 벗어난 적이 없었는데, 이는 그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패배했는지를 보여준다.”
IV. 결론
이상에서 미국인들이 알고 있는 이순신에 관한 자료들을 저서와 논문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집필자들의 신분이나 직업은 해군사가・군사학자・중국사학자・동양사학자 등을 포함한 역사가가 제일 많다. 그러나 한국사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은 드물고, 서구 군사사와 일본사 및 중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다음으로 많이 나타나는 신분은 선교사, 해군장교, 저널리스트 등이다. 집필자를 시대별로 살펴보면, 조선 말기에는 선교사가, 일제 강점기에는 군사학자와 군인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자료가 나타난 시기를 보면, 조선 말기와 일제 강점기에는 비슷한 분포를 보이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내용을 바탕으로 향후 이순신 연구를 위한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이순신 영어 이름의 통일이다. 이순신의 영문명(Yi Sun-Sin / Yi Sun-Shin)에 따라 검색 결과가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순신을 외국에 보다 정확하게 알리기 위해 우선적으로 선행되어야 할 문제이다. 둘째, 이순신 제독이라는 호칭의 통일 문제이다. 국내에서는 ‘이순신 장군’ 또는 ‘이순신 제독’이라고 해도 이해하는데 문제가 없지만, 장교 계급의 영어 표기는 육군/공군/해병대는 동일한데 해군만 다르다. 장군에 해당하는 영어 표기는 ‘General’이지만 해군 제독에 해당하는 영어 표기는 ‘Admiral’이다. 우리가 표현하는 이순신 장군을 영어로 표기하면 ‘General Yi’가 되어 ‘Admiral Yi’와는 전혀 다른 표현이 된다. 따라서 국내에서부터 이순신 제독으로 호칭을 통일해야 할 것이다. 셋째, 우리 문화와 이순신 제독을 세계에 알리기 위한 구체적이며 전략적인 방안 마련과 실천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중국의 경우 전세계에 3,600개가 넘는 공자학원(孔子學院, Confucius Institute)을 운영하며, 중국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학생들과 학자들을 중국에 초청하여 다양한 경로를 통해 중국문화를 홍보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우리도 보다 더 적극적이고 체계적인 방법을 통해 우리 문화와 이순신 제독을 세계에 알리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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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본부, “외국지에 나타난 이순신 제독,” 「海軍」, 통권 제158호,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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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adwater, John D. USS Monitor: A Historic Ship Completes Its Fi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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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lbert, Homer H. The Passing of Korea (Read before the Society,
1906).
Kiralfy, Alexander. “Chapter 19. Japanese Naval Strategy,” ed. Edward
Mead Earle, Makers of Modern Strategy: Military Thought fr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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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nstam, Angus. Union River Ironclad, 1861-65 (New York: Ospr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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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ith III, Roy C. “Yi Sun Sin Defeated Japan at Sea,” United Sta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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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derwood, Horace H. Korean Boats and Ships (Read before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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