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호(4-5월) | 노량해전에서 발휘한 이순신의 전술과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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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제장명(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장) 작성일18-04-26 09:33 조회6,898회 댓글0건본문
노량해전에서 발휘한 이순신의 전술과 리더십
제장명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장
Ⅰ. 머리말
역사적으로 볼 때 전근대시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 후 주갑(60년)이 되던 해에는 반드시 기념행사를 거행해 왔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4주갑이 되던 1832년에는 남해 관음포 곁에 이락사라는 사당을 세웠으며, 6주갑이던 1952년에는 6.25전쟁 와중에도 진해에 이순신동상을 세웠다. 2018년은 이순신이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전사한지 7주갑(420년)이 되는 해이다. 이 뜻 깊은 해를 기억하기 위해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승리한 요인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노량해전은 420년 전인 1598년 11월 19일 당시 철군을 준비하던 일본군을 조명연합수군이 차단하던 과정에서 벌어진 해전이다. 이 해전에서 조명 수군은 일본군선 200척을 분멸시키는 최고의 전과를 거두었다. 그렇지만 조선수군의 통제사 이순신은 전투 막바지에 적의 총탄을 맞아 전사하였다. 이 해전을 끝으로 임진왜란 7년 전쟁은 종료되었다.
임진왜란 시기 이순신의 수군전술은 당대 병법서의 일반적 원칙을 피아간의 전력을 고려하여 발휘하였다. 다시 말해 일반적으로 이순신이 추구한 전술의 형태는 조선의 우수한 전선과 화포를 이용하여 원거리에서 적선을 당파하고 근접하여 적선을 무력화시킨 후 분멸시키는 형태였다. 이것은 이순신 스스로 그러한 전장 환경을 조성한 후에 계획된 전법을 구사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그 결과 조선 수군은 일본군에 연전연승을 거둘 수 있었다.
그렇지만 노량해전은 다른 해전과는 전장 환경이 달랐다. 무엇보다 조선군 단독이 아닌 명군과 연합작전을 수행했다는 것이고, 원거리에서 공격한 일반적인 전술이 아니라 근접전을 치렀다는 점이 특징이다. 근접전은 일본군이 선호한 전술이었기에 조선 수군이 승리하기에는 쉽지 않은 전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수군이 승리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러한 점에 관심을 가지고 노량해전의 승리요인을 이순신이 발휘한 전술과 리더십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아울러 노량해전이 끝난 후 이 해전 승리에 대해 조선 조정이 어떤 인식을 하였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Ⅱ. 노량해전과 조선수군의 전술
1. 전선과 무기체계의 우수성
노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승리한 요인 중 으뜸은 전선과 무기의 차이 때문이었다. 노량해전 당시 조선 수군은 주력 군선으로 판옥선을 보유하고 있었다. 판옥선의 우수한 구조에 대해서는 일본과 명에서 공통적으로 인식하였다. 예컨대 종전 후 일본의 정세를 정탐하고 돌아온 전 별제(別提) 노인(魯認)이 언급한 바에 따르면 노량해전에서 패한 일본군들이 ‘명나라와 조선의 병선이 비록 크지만은 빠르기가 나는 용과 같고 또 가까이 접근하여도 붙잡고 올라가기가 어려우며 대포도 무서워 수전하기가 어려웠다.’고 하였다.
노량해전 당시 명의 통판(通判) 여민화(黎民化)는 선조를 만난 자리에서 “귀국의 전선은 그 제도가 매우 좋으니, 반드시 미리 많이 제조하여 해변에 배치해 두고 몰래 와서 정탐하는 적이 있으면 낱낱이 죽여 없애도록 해야 합니다”라고 언급하였듯이 명나라에서도 그 우수성을 충분히 인정하였다. 그랬기에 명 수군의 도독 진린(陳璘)과 부총병 등자룡(鄧子龍)은 조선의 판옥선을 각각 빌려 타고 전투에 임했던 것이다.
한편 명 수군의 전선은 조선의 판옥선보다 크기는 작았으나 나름대로 전투에 기여한 바가 있었다. 명의 전선은 사선(沙船)과 호선(號船)이 주로 참전하였는데, 주로 호선의 효용성이 높았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서로군 대장 유정(劉綎)의 사후 임무를 맡았던 이덕형은 “당선(唐船)은 선체가 작아 큰 바다에서는 좋지 않으나 작은 포구에 드나들며 탄환을 쏘고 칼을 쓰는 데에는 매우 신통하였다”고 하였다. 이것은 예교성 수륙합공전 때 예교성 아래의 포구에서 일본군을 공격할 때 명군이 역전했던 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의 판옥선이 선체가 커서 좁은 포구에서 활동하기에 불편했던 데 비해 명의 전선은 판옥선의 단점을 보완하는 효과를 보였던 것 같다. 따라서 전투가 매우 치열하게 펼쳐졌던 관음포 입구에서도 크게 활약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명 수군의 전선은 비록 판옥선보다 작았지만 각종 포를 장착하여 사용함으로써 일본군을 압도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당시 명군이 사용한 포는 호준포(虎蹲砲)와 불랑기(佛狼機)가 대표적이었다. 호준포는 명나라가 평양성 탈환 전투에서 사용하여 큰 효과를 보았는데, 좁은 공간에서도 사용이 편리하여 노량해전에서는 전선에 탑재하여 사용되었다. 불랑기도 평양성 탈환전에서 사용하였는데, 노량해전에서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조총 외에는 도검류로만 승부를 겨룬 일본에 비해 조선과 명은 대형 화포를 장착 사용함으로써 전력 면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고 보아진다.
2. 이순신의 탁월한 전술
위에서 언급한 조명수군의 전선과 무기체계를 근간으로 발휘한 조선 수군의 전술이 탁월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는 지휘관인 이순신이 전술을 잘 구사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러한 전술은 크게 노량수로 좌단과 관음포라는 2가지 해역을 전투 장소로 이용했다는 측면에서 살펴 볼 수 있다.(그림 참조)
(그림 노량해전 상황도)
출처: http://www.yi-sunsin.com/02battle/04_01_10.jsp
우선 이순신은 일본의 구원군이 노량수로를 넘어올 경우 조명 수군은 광양만에 갇혀 협공을 당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여 일본의 구원군이 오기 전에 먼저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고자 하였다. 다시 말해 묘도 쪽에 주둔하고 있었더라면 조명 수군은 좌우 양쪽에서 일본군의 협격을 받아 조명 수군에의 접근이 용이해져 등선을 허용할 가능성이 컸다. 일본군의 등선을 허용하여 패한 칠천량해전의 사례를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노량수로의 서단으로 이동해 간 것은 적어도 예교성에 있는 적을 묶어 둔 상황에서 한 쪽만 집중적으로 공격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조명 수군이 노량수로 서단에 먼저 도착한 것은 또 다른 전술적 이점이 있었다. 당시 피아간을 막론하고 최종목표는 화공전(火攻戰)에 의한 적선분멸이었다. 노량해전 당시 북서풍이 강하게 부는 겨울철을 맞이하여 풍상(風上) 쪽을 선점함으로써 화공전을 펼치는 데 유리한 위치를 확보했다는 점이다. 예컨대 ‘11월 18일 4경에 여러 곳의 구원병이 크게 몰려와 드디어 대전이 벌어졌는데, 포와 화살은 쏘지도 않고 불뭉치 만을 적선에 던져 2백여 척을 소각시켰다.’고 한 기록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다음으로 전투 중반 이후 일본군을 관음포로 진입하도록 유도하여 관음포에서 전투를 수행한 점을 들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이 지휘한 수군 전술의 핵심은 무엇보다도 화포의 명중률 제고를 위한 진형의 형성이라고 할 수 있다. 노량해전 당시에는 근접전이 전개됨으로써 별도의 진형 형성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이 경우 조선 수군은 근접전을 치르는 가운데서도 화포의 명중률 제고를 위한 전술 구사에 집중하였다. 이를테면 일본군이 관음포 안으로 진입하도록 유도한 것도 그 한 가지 방법이었다. 관음포는 포구가 깊숙하여 외해와 연결된 곳으로 착각할 수도 있는 곳이었는데, 이곳으로 일본군을 몰아넣은 것은 조선 수군의 전술적 승리였다. 일본군은 포구 깊숙한 막다른 곳까지 갔다가 퇴로를 찾아 입구 쪽으로 되돌아 나옴으로써 입구 부근에 일본 군선들이 몰려 있게 되었다. 이것은 조명 수군의 화포공격에 좋은 표적이 되었다.
여기서 일본군이 왜 관음포 안으로 들어갔는지 그 이유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일본군이 관음포 안으로 들어간 이유에 대해 일반적인 시각은 관음포가 매우 깊숙했기 때문에 바다로 오인한 적들이 퇴로인 줄 착각하여 진입했을 경우를 상정하고 있다. 다른 시각으로는 관음포가 막다른 곳인 줄 알지만 현재의 전세가 매우 불리하므로 다른 곳으로 이동할 겨를이 없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필자의 시각으로는 조선 수군의 전술로 인해 일본군은 어쩔 수없이 관음포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즉 근접전이 계속될 경우 조선 수군의 사상자도 많이 발생할 것이기 때문에 적을 관음포 안에 가둬두고 집중 포화를 퍼붓는 작전이었다. 그동안 조선 수군의 전술을 고려해 볼 때 이러한 전술에 대한 신뢰도가 높다고 판단된다.
어쨌든 이순신의 주도하에 조명 수군이 노량수로 좌단으로 선제 기동한 것과 관음포에 격전지를 조성한 것은 해전 승리에 탁월한 전술이었다고 볼 수 있다.
Ⅲ. 노량해전과 이순신의 리더십
1. 조명 연합작전의 성공
조선 수군이 노량해전에서 승리한 배경에는 명 수군과의 효율적인 연합작전이 이루어진 면도 간과할 수 없다. 명 수군이 노량해전에 적극적으로 참전하게 된 배경을 보면 한마디로 이순신의 능란한 외교술과 리더십이 기여한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명 수군 함대가 고금도에 도착했을 때 이순신은 진린(陳璘)의 성품이 거만하고 포악하다는 사실을 사전에 파악한 후 이에 대해 강온(强穩) 양면의 적절한 외교술을 발휘하였다. 그 결과 다른 명 장수들의 태도와 다를 바 없이 전투에 소극적이었던 진린을 감화시켜 전투현장에 이끌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배경에는 이순신 자신의 뛰어난 인품과 리더로서의 능력도 한 몫을 했다. 이순신의 뛰어난 리더십과 전략 전술, 그리고 일본군을 격멸하는 데에 전력투구하는 모습에 진린은 같은 무장(武將)으로서 탄복했을 것이다. 그래서 수시로 군중(軍中)의 대소사(大小事)에 대하여 자문을 구했고, 명나라로 가서 벼슬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으며, 선조에게 글을 올려 극찬을 표하기도 했다.
진린의 명 수군은 예교성 공격전 때 전선 수십 척이 분멸되는 피해를 입어가면서도 전투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나아가 노량해전 본전에 임해서는 진린과 이순신이 서로 구원을 했을 정도로 상호 협조가 잘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진린의 명 수군이 고금도에 도착했을 때부터 이순신이 발휘한 리더십이 꾸준히 성과를 내었던 것을 의미한다. 아울러 명 수군 400여 척의 규모는 외양만으로도 피아간의 사기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특히 해전 초반 풍상 쪽을 선점하여 일본군을 공격할 때 화공전이 필수적이었다는 점을 인식한 이순신은 조선보다 화공무기를 많이 보유한 명군의 활약을 기대한 점이 돋보인다. 이순신은 당시 조선 수군에게는 부족한 화공무기가 명군에 구비되어 있다는 점을 파악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당시 조선 수군은 칠천량해전 패배 이후 수군력 재건에 매진해 왔지만 그 이전의 성세를 구가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런 형편에서 명군의 활약은 조선 수군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었다. 이렇게 볼 때 화공무기를 많이 확보한 명 수군을 노량수로 좌단 가까이 포진 시킨 것도 한 이유라고 생각된다.
2. 수군 장졸들의 적극적인 참전
노량해전에서 승리한 요인 중 빠질 수 없는 부분은 당시 참전한 수군 장졸들이 적극적으로 싸웠다는 점이다. 이는 조선 수군 장졸은 말할 것도 없고 명나라 장졸들 역시 분투하였다. 이는 당시 참전자들의 개인적인 성향과 능력에 기인한 바도 컸다고 할 수 있지만 이순신이 발휘한 리더십이 출중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휘하 장졸들이 위기 상황에서 그들의 능력을 한껏 발휘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한 이순신의 리더십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활동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장수들은 가리포첨사 이영남(李英男)·낙안군수 방덕룡(方德龍)·흥양현감 고득장(高得蔣)·군관 이언량(李彦良)·순천부사 우치적(禹致績)·안골포 만호 우수(禹壽)·사도첨사 이섬(李暹) 등이었다.
전투가 진행되면서 이순신 휘하 막하장수들은 생사를 도외시한 채 적극적으로 참전하였다. 예컨대 가리포첨사 이영남은 자기가 탄 배를 몰아 적선을 크게 충격하고 화전을 수없이 쏘게 하여 적선을 무력화시킨 뒤 맹사(猛士)를 거느리고 적선에 뛰어 올라 여러 명의 적을 찔러 죽이다가 유탄에 맞아 쓰러지게 되자 그 종사들이 침몰직전의 적 선상에서 겨우 그를 구해낼 수 있었다.
또 낙안군수 방덕룡(方德龍)은 삼지창을 옆에 끼고 적선에 뛰어 올라 ‘하나’의 호창으로 한 사람을 죽이고, ‘둘’의 호창으로 또 한 사람을 죽이니 종사들도 이에 제창하여 닥치는 대로 적을 무찔렀다. 격전의 와중에 그도 또한 가슴에 부상을 입은 가운데서도 분전하여 적선을 온전히 노획하였다.
흥양현감 고득장(高得蔣)도 적선에 뛰어들어 군관 이언량과 서로 앞을 다투어 참하면서 돌진하고 뱃간을 여러 곳으로 뒤지면서 적을 죽이다가 모두 난투 끝에 죽었다.
이때에 순천부사 우치적은 적장 한 사람이 대궁을 휘어잡고 루선 위에 높이 앉아서 독전하는 것을 보고 쏘아 죽였다.
안골포 만호 우수는 사도첨사 이섬과 서로 신호하면서 두 배를 같이 몰아 적선 양현으로 동시에 총통을 쏘고 화전을 쏘았으며 장차 적의 배 위로 뛰어 올라가려고 할 때에 이미 배에 불이 크게 일어나고 탄약이 유발하므로 이순신의 배를 찾아 가까이 가서 보호하고자 하였다.
해남현감 류형은 무예가 뛰어나 화살이 다하면 활을 버린 다음 창을 쥐고 싸웠으며, 창자루가 부러지면 쌍검을 들고 항상 군사들의 진격로를 헤쳤다. 그는 적의 조총에 맞아서 일시 쓰러졌다가 북소리를 듣고 다시 일어나 칼을 들고 적선에 돌입하여 전투에 전념하였다.
한편 동이 틀 무렵 이순신이 전사한 후 송희립은 이순신의 죽음을 감춘 채 갑옷과 투구를 자신이 입은 가운데 계속하여 북을 치면서 싸움을 재촉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인지한 나머지 군사들도 송희립의 지시에 따라 입을 굳게 다물고 전투에 전념하였다. 송희립은 이순신의 유훈을 잘 지켜서 전투 승리에 기여한 것이다.
명 수군 장수들도 적극적으로 참전하였다. 명나라 장수 중 부총병 등자룡(鄧子龍)은 70세의 노장으로, 조선의 판옥선 1척을 빌려 타고 전투에 임하여 큰 활약을 하였다. 그러나 혼전의 와중에 뒤에서 쏜 명군의 포탄에 잘못 맞아 그가 탄 배 중앙에서 불이 나기 시작하였다. 이때에 적병이 함상으로 뛰어 올라와 백병전을 벌인 끝에 등자룡은 중상을 입게 되고, 부하들 다수도 부상을 당하였다. 결국 등자룡은 전사하고 말았다.
유격장 계금(季金)은 예교성 전투에서 부상당한 왼편 팔을 동인 채로 바른 손에 미첨도(眉尖刀)를 들고 적 7명을 참살하였다. 부총병 진잠(陳蠶)은 진린의 배를 호위하면서 진격하여 호준포와 위원포를 쏘았다.
명나라 함선에서도 각종 포로써 일시에 散彈을 쏘아 공격하였는데, 이 와중에 진잠의 중군 도명재(陶明宰)는 적장 가바야마 히사타카(樺山久高)의 배를 급히 쫓다가 유탄에 맞아서 전사하였다.
이미 알려졌듯이 『호남절의록』의 이순신 동순제공(同殉諸公) 58명 중 21명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듯이 참전 장졸들은 근접전을 치르면서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하였다. 이전에 치렀던 다른 어떤 해전보다도 위험한 전투 상황에서도 참전 장졸들은 죽음을 도외시 한 채 전투에 임했던 것이다. 그 결과 대승을 거두었다.
Ⅳ. 노량해전의 역사적 의미와 평가
노량해전은 임진왜란 전체 전투 중 가장 큰 전과를 거둔 해전이다. 명의 급사(給事) 서관란(徐觀瀾)은 노량해전의 승리를 남양대첩(南洋大捷)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 숙종 때 예조판서였던 조상우(趙相愚)는 임진왜란 3대첩 중 첫 번째로 이순신의 노량대첩을 꼽기도 하였다. 이긍익(李肯翊)도 임진왜란 3대첩에 노량전투를 포함하였다. 영국의 발라드(G.A.Ballard) 제독은 ‘조선의 트라팔가 해전’이라고 평가하였다.
아울러 노량해전에서 일본군에 대승을 거둠으로써 주변국들에게 조선 수군의 우수성이 크게 각인되었고, 동시에 명 수군에 대한 인식도 긍정적으로 변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나아가 이 해전에서의 큰 승리는 전쟁의 참상에 망연자실해 있던 조선 백성에게 큰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임진왜란 7년 전쟁으로 국토가 황폐화되고 백성들의 마음은 극도로 피폐해진 상황이었다. 이때 마지막 해전에서 대첩을 거뒀다는 소식은 적개심을 넘어 절망 속에 빠져있던 조선 백성에게 한줄기 활력소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이 해전에서는 이순신을 비롯하여 많은 전사자가 발생하였다. 당시 최고 지휘관을 중심으로 하는 군대 운영의 특징상 승첩을 거두고 전사한 수군의 최고 지휘관인 통제사 이순신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꼬리를 이었다.
비변사 관료들은 통제사 이순신이 임진왜란 초기 가장 중요한 해전이었던 한산도해전 승리의 장본인이었다는 점과 칠천량해전의 패배 이후 몇 척 남지 않은 전선을 정비하여 명량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사실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아울러 노량해전에서는 가장 큰 규모로 승리를 거둔 후 전사한 사실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이러한 이순신에 대해 비변사는 좌수영 본진의 해변에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자고 건의하였고, 이에 선조도 따랐다.
한편 명군의 서로군 대장 유정(劉綎)의 접반사로 순천 지역에서 활동하던 좌의정 이덕형(李德馨)은 그동안 원균의 말을 듣고 이순신은 재간은 있어도 진실성과 용감성은 부족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이번 일을 통해서 그 선입견을 바꿨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전라도 백성들이 이순신을 칭찬하고 있고, 고금도 통제영을 한산도보다 더 큰 규모로 만든 점을 높이 평가하였다. 더욱이 함께 일하는 동안 이순신의 능력에 감탄하여 수군에 맞는 주장(主將)을 얻어서 안심했었는데, 전사한 것을 애통해 하면서 정부 차원의 포장을 건의하였다.
이러한 수군에 대한 긍정적 인식은 종전 후 수군이 대일 방어에 가장 중요하다는 인식으로 발전하였다. 이것은 해변가 고을의 육군에 소속된 장정들을 모두 수군에 편성한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이덕형은 ‘수군의 위용은 금성탕지(金城湯池)가 푸른 물결 위에 진열되어 있는 것과 같을 정도로 견고한 면이 있었다.’고 언급하였다. 그만큼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보여준 조선 수군의 능력과 위용에 대해 조선 조정에서는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Ⅴ. 맺음말
이순신이 전사한 노량해전은 그동안 임진왜란 최대의 승전으로 평가되어 왔다. 임진왜란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의미 깊은 해전으로서 높게 인식되어 왔으며, 여러 가지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해전이다.
본고에서는 노량해전의 승리 요인을 조선수군의 전술과 이순신의 리더십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조선 수군의 전술은 무엇보다도 당시 전선과 무기체계의 우수성이 근간이 되었다. 이 부문은 다른 해전에서의 승리요인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기본 요인인 것이다. 그런데 다른 해전에서는 조선 수군 단독으로 치른 해전인 만큼 조선의 전선이 우수한 점을 거론했지만 노량해전에서는 명 수군의 전선도 크게 활용되었다. 관음포와 같은 좁은 포구 안에서 화포를 장착한 명 수군의 전선은 탁월한 기동성으로 해전 승리에 일조한 것이다.
이러한 전선과 무기체계의 우수성을 십분 활용하여 조선 수군의 전술이 효율적으로 구사되었다. 조선 수군 전술의 핵심은 노량수로 좌단의 풍상 쪽에 위치하여 바람을 등진 채 화공전을 수행한 것과 전투 중반 이후 관음포에 적선을 몰아넣어 조선 수군이 보유한 화포의 명중률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한 형태였다.
다음으로 전투에 소극적이고 군공을 탐하는 명 수군 도독 진린을 전투현장에 이끌어 적극적으로 참전하게 한 이순신의 리더십이 효과적으로 발휘되었다. 이 와중에 4개월간 이순신과 함께 지낸 명 수군 장졸들도 이순신의 뛰어난 인품과 능력에 매료되어 작전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대규모 세력을 형성한 양국 수군의 단합된 힘은 일본 수군을 압도하였던 것이다.
이순신의 리더십이 적극적으로 발휘되어 수군 장졸들의 적극적인 참전이 이루어졌다. 이것은 전선에 탑승하면 공동운명체라는 점을 인식하면서 근접전을 치를 수밖에 없는 환경이 조성된 면이 강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죽음을 도외시 한 채 참전한 장수들의 역전이 가능했던 것은 이순신이라는 위대한 리더를 믿고 따랐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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