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호(4-5월) | 대한민국의 해군전략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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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양 욱(한국국방안보포럼 WMD대응센터장 / 해군발전자문위원) 작성일18-04-24 14:03 조회2,458회 댓글0건본문
대한민국의 해군전략을 찾아서
-해양 뿐만 아니라 한반도 전구 전역에서
적을 압도할 해군력이 필요하다-
양 욱
한국국방안보포럼 WMD 대응센터장
/ 해군발전자문위원
<동북아에서 가장 강력한 해군함으로 평가되는 세종대왕급 이지스함은 우리 해군의 핵심 전투함이다.>
대한민국이 처한 해양환경은 도전의 연속이다. 세계에서 가장 급성장하는 해군인 중국을 좌로 두고, 세계에서 3위 정도로 볼 수 있는 일본을 우로 두고 있다. 좀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한 때 미국과 세계 해양에서 경쟁하던 러시아 해군이 있다. 그러나 가장 골치 아픈 존재는 북한이다. 비록 북한의 해군력은 연안해군에 불과하지만, 무려 80여척이 넘는 잠수함정을 보유한 치명성을 가지고 있다. 현대전에서 그리 쓸모가 없을 듯한 잠수정이 실제로는 얼마나 큰 위협이 될 수 있는지, 우리 해군은 천안함 피격을 통해 피와 뼈를 깎는 고통을 통해 배웠다.
미약했지만 힘찬 시작
이러한 척박한 해양안보 환경 속에서 대한민국 해군의 시작은 미약했다. 광복 후 1주일도 안된 8월 21일 손원일과 윤지창에 의해 해사대가 창설되었고, 같은 해 11월 해방병단(海防兵團)으로 발전하여 도서와 해안의 경비를 맡은 것이 해군의 시작이었다. 해방병단은 일본군이 남긴 시설을 활용하여 조함창을 세운 후 폐선을 수리하여 취역시켰다. 특히 해군은 일본군 위주가 아니라 상선사관 위주로 건군이 되어, 어느 군보다 더욱 정통성을 갖고 대한민국을 지키기 시작했다.
<상선사관과 선원을 주축으로 모인 해방병단은 대한민국 해군의 시초가 되었다. >
사설기관에 불과했던 해방병단은 미군정청으로부터 곧바로 그 존재를 인정받고, 1946년 1월 조선해안경비대로 발족했다. 1948년 정부수립 이전까지는 함정 105척과 3천여 명의 인원을 확보하여 동년 9월 5일 대한민국 해군으로 발족했다. 조선해안경비대의 총사령관이던 손원일 제독은 해군의 발족과 함께 초대 해군참모총장이 되었다.
<대한민국 해군의 아버지인 손원일 제독>
그러나 창군 초기 우리 해군은 일본군이 건조를 완성하지 못했던 경비정이나, 구 일본군의 소해정, 미군으로부터 인수한 구형 소해정과 상륙정 등이 전부였다. 게다가 불순세력이 군에 침투하여 그나마 미약한 우리 군함을 납북하는 사태도 빈발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1949년 8월 17일 우리 해군의 기동부대는 북한의 몽금포항을 공격하여 적함 4척을 격침시키고 경비정을 나포해오는 성과를 거두면서, 우리 해군의 과감성을 적에게 인식시키기도 했다.
한편 우리해군은 창군 후에도 제대로 된 전투함이 없었다. 여기에 독자적 건함능력은 부재하고 미군의 원조조차 제한되자, 해군 스스로 함정건조를 위한 모금활동을 벌여 백두산함 등 4척의 전투함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힘겨운 전력건설이 시작되는 가운데, 6·25 전쟁이 벌어지자 도입한 전투함들은 속속 활약하기 시작했다. 특히 대한민국 최초의 전투함인 PC-701 백두산함은 대한해협 해전에서 북괴의 무장수송함을 격침함으로써 우리 후방을 노리던 북한의 유격전 시도를 사전에 차단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전투함인 PC-701 백두산함은 우리 해군의 모금활동으로 도입되어 6·25전쟁 첫날부터 전승을 거두었다.>
연안해군에서 대양해군으로
6·25 전쟁을 거치면서 우리 해군은 미군으로부터 초계호위함(Patrol Frigate, PF) 등 약 30척인 인수하면서, 내해방어 수준의 해군에서 근해방어가 가능한 해군으로 성장했다. 전후 한국함대와 예하조직, 해군대학과 교육단 등 각종 조직들이 구체화되면서, 독자적인 영해방위가 시작되었다.
미국의 함정대여법에 따라 대여형식으로 1963년까지 모두 54척의 함정을 인수하면서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1956년 2월 2일 경기함과 강원함을 시작으로 호위구축함(DE)이 도입되고, 1963년에는 DD-91 충무함이 도입되면서 구축함(DD) 시대가 개막되기도 했다. 여기에 더하여 베트남 파병으로 해군의 역할도 증가하면서 파월이 종료된 1970년에는 우리 해군의 세력은 99척으로 증가했다.
<대한민국 최초의 구축함인 DD-91 충무함>
그러나 진정한 독자적 해군력이 건조가 된 것은 1970년대부터였다. 1972년 대한민국 최초로 개발된 국산 전투함정인 제비급 고속정 ‘학생호’ 2척이 전력화됨으로써 스스로 건함할 수 있는 시대의 여명이 열렸다. 이후 PK, PKM의 뒤를 이어 PGM(유도탄고속함)이 국내에서 건조되었고, 1980년 최초의 호위함인 FF-951 울산함과 1983년 최초의 초계함인 PCC-751 동해함, 그리고 1984년 최초의 잠수정인 돌고래급 SSM-051이 해군에 인도됨으로써, 현대적 해군의 모양을 갖춰나가게 되었다.
<대한민국이 최초로 독자적으로 개발한 제비급 고속정>
해군력은 국력과 비례하기 마련이다. 1980년대 대한민국의 경제력이 성장하고 오대양 육대주로 뻗어나가면서 드디어 우리 해군도 대양해군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1990년부터 환태평양 훈련에 참가를 시작했고, 1992년 장보고급 잠수함, 1995년 P-3C 해상작전기, 1998년 KDX-I급 광개토대왕함, 2003년 KDX-II 충무공이순신함, 2007년 LPX 독도함, 2008년 KDX-III 세종대왕 이지스구축함 등이 본격적으로 전력화되면서 대한민국 해군은 삽시간에 대양해군으로 성장했다.
<대한민국 대양전력의 주력인 충무공이순신급 구축함>
시련이 만든 성장
그러나 이렇게 대양해군으로 성장하는 과정이 결코 순탄하지는 않았다. 과거 연안해군 전력을 겨우 키워오던 1960~70년대 북한은 간첩선으로 유린하면서 무장공비들을 침투시키고 게릴라전을 펼쳤다. 특히 1967년 1월 19일에는 동해에서 어로보호작전을 펼치던 경비함 PCE-56 당포함이 북한의 해안포 기습에 격침되었고, 1970년 6월 5일에는 연평도 인근에서 해군의 I-2형 방송선이 납북되기도 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 해군은 침투하는 적함을 차례로 격파하면서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연안의 제해권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북한은 당포함 격침사건을 일으키는 등 도발을 서슴치 않았다.>
더 이상 해상침투가 용이하지 않자, 이제 북한은 반잠수정이나 잠수함정 등을 통하여 공작원을 침투시키기 시작했다. 하지만 함정이 대형화하면서 센서가 발달하고, 특히 해안경계 시스템까지 강화되면서 적의 이러한 시도도 차례대로 격파되기 시작했다. 1996년의 상어급 잠수함 좌초나 1998년의 유고급 잠수정 포획은 이러한 우리 해군력의 강화를 보여주는 반증이 되었다.
이렇게 해군력에서 현격한 격차가 생겼음에도 북한은 1999년 6월 초부터 서해 NLL을 침범하면서 우리 어선을 위협했다. 이에 우리 해군이 밀어내기 작전을 펼치며 평화로운 대응을 벌이던 와중, 6월 15일 북한군이 사격을 가했다. 우리 해군은 이에 침착히 대응하면서 적 어뢰정과 중형경비정을 침몰시켜면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렇게 1차 연평해전에 일방적으로 패배한 북한은 2002년 6월 29일 사회적인 관심이 한일 월드컵 경기에 몰리던 시국을 틈타 우리 해군 357정을 기습공격하여 6명이 전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2009년 11월 10일 북한 경비정이 NLL을 또 다시 침범하고 심지어 우리 해군에게 조준사격을 가하자, 우리 해군은 대응에 나서 적 경비정을 일방적으로 제압했다.
<북한의 무모한 도발에 대응하여 우리 해군은 1차 연평해전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러한 명백한 전력차를 놓고도 북한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마치 1차 연평해전의 패배를 2차 연평해전의 기습으로 보복했듯이, 결국 2010년 3월 26일 우리 해군의 초계함인 천안함을 잠수정을 활용한 어뢰공격으로 기습했다. 이러한 공격 후에 발뺌으로 일관하던 북한은 같은 해 11월 23일에는 연평도에 포격을 가함으로써 천안함 폭침이 자신들의 소행임을 간접적으로 인정했다. 이후 우리 군은 참수리 고속정을 대체할 윤영하급 미사일 고속함과 PKMR 신형 고속정, 포항급·동해급을 대체하는 인천급·대구급 신형 호위함(FFX)을 전력화하면서 북한의 위협에 대응했다.
<북한은 비열한 천안함 공격으로 자신들의 해군력 열세를 부정했다.>
새로운 위협의 등장
한편 김정일이 사망하면서 김정은이 새롭게 정권을 이어받자, 북한은 핵과 미사일 능력을 보강하면서 위협의 단계를 새롭게 높혀나갔다. 기존의 스커드와 노동 미사일 전력을 강화하는 것을 넘어서, 준ICBM에 해당하는 화성12형과 ICBM에 해당하는 화성14형·화성15형의 시험발사를 속속 진행하면서 대한민국을 넘어서 안보동맹인 미국에 대한 공격능력을 준비해가고 있다. 특히 2015년부터는 ‘북극성’ SLBM(잠수함발사 탄도미사일)을 고래급 잠수함에서 발사하면서 완전히 다른 차원의 능력을 보유하고자 모든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북핵위협에 대응하는 미국의 확장억제의 중심에는 항모전력 등 해군력이 있다.>
이러한 위협에 대응하여 우리 군도 북핵억제에 역량을 모으고 있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에 대하여 우리 군이 채택한 대응전략은 한국형 3축체제이다. 한국형 3축체제는 북한의 도발이 명백하게 임박한 경우 선제타격을 하는 킬체인(Kill Chain), 킬체인으로 무력화되지 못한 미사일을 요격하는 한국형미사일방어(KAMD),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우리에게 피해가 있을 시에는 적의 중심부에 심각한 피해를 입히겠다는 대량응징보복(KMPR)의 3가지로 구성된다.
<이지스 구축함 등 첨단 전력은 순항미사일 공격능력과 함대공 미사일의 탄도탄 요격능력으로
북핵의 억제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
그러나 인류의 전쟁사 속에서 비핵수단만으로 핵을 막겠다는 계획은 없었다. 미국의 MD도 결국 미국 스스로가 보유한 막강한 핵전력을 전제로 하는 전략적 능력일 뿐이다. 한국형 3축체제도 결국은 핵전략으로 볼 수는 없다. 근본적으로 북한의 핵위협을 막는 것은 결국 핵을 가진 동맹국인 미국의 확장억제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재래식 확장억제 가운데 상당수는 결국 토마호크와 같은 정밀타격무기체계에 바탕하는데,
우리 군은 현무3 계열의 순항미사일을 해군이 운용한다.>
확장억제는 과거 핵우산의 개념을 넘어서, 핵전력뿐만 아니라 재래식 전력을 포함하여 정치·외교적 수단을 모두 동원하여 동맹국에 대한 적의 공격을 억제하는 것을 말한다. 사실 핵을 터부시 하는 미국의 전략문화 속에서 오로지 핵전력만으로 동맹에 대한 안보약속을 지키는 것이 어렵다보니 소위 비핵 ‘전략자산’을 활용하는 사례가 빈번하다. 당장 최근 북한 핵실험이나 각종 도발로 빈번히 발생한 한반도의 긴장국면에서 한국을 찾은 니미츠급 항공모함이나 오하이오급 순항미사일 잠수함(SSGN) 또는 B-1B 랜서 전략폭격기(START협정에 의해 핵폭격능력 제거) 등은 모두 핵무장을 하고 있지 않다. 결국 실제로 미국이 제공하는 확장억제의 상당부분은 재래전력이라고 볼 수 있다.
<김정은은 2017년 9월 3일 수소폭탄 탄두를 공개한 이후 전격적으로 6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북핵 억제를 위한 해군력의 필요성
미국이 제공하는 재래식 확장억제의 상당부분은 결국 지상의 적을 분쇄하는 정밀타격무기들이다. 항공모함이 전쟁억지에 도움이 된다고 하는 것도 바로 같은 맥락이다. 제해 제공권의 싸움을 거치겠지만, 결국은 수많은 함재전투기들이 엄청난 량의 폭탄을 적 지상표적을 향하여 투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척에 최대 154발의 토마호크 미사일을 탑재하여 이지스 구축함전대의 지상타격능력을 능가하는 능력을 가진 오하이오급 SSGN도 결국 은밀히 적 지상목표물을 제거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인하여 전쟁 억제에 기여한다. 궁극적으로 해군도 적의 지상거점을 압도할 수 있어야 전쟁을 막거나 이길 수 있다.
<2017년 9월 15일의 화성-12형 IRBM 발사는 이동식 발사차량에서 직접 실시된 것으로 적의 공격을
사전에 탐지할 시간이 줄어들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미국 스스로의 사정에 의하여 우리는 종종 이러한 전략자산이 제때 전개되지 못하는 일들을 겪어왔다. 지난 2015년 8월 목함지뢰도발·포격도발의 긴장 상황에서 임무교대 관계로 미 7함대에는 전진배치된 항모가 없었다. 한참 4월 위기설로 급박했던 4월15일경에도 트럼프 대통령이나 해리스 태평양사령관의 발언과는 달리 칼빈슨 항모전단은 한반도 주변에 없었다. 확장억제의 공백이자 우리 안보의 빈틈으로 인식될 수 있는 사안들이다.
결국 미국이 제공하는 확장억제능력 가운데서도 재래식 전력이라면 우리의 능력으로 충분히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있다. 특히 그중에 우리 해군력으로도 대체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바로 수상함 전력에서 투사하는 순항미사일과 잠수함 발사 순항미사일이 그런 존재들이다. 또한 독도함과 결합되는 해병대 전력 역시 북한의 움직임을 묶어놓을 중요한 비수가 된다. 아덴만 여명작전의 주역인 해군 특수전여단 ‘UDT/SEAL’ 전력은 사전에 적진에 침투하여 해군의 순항미사일이 타격할 표적을 식별하고 정확한 유도임무를 수행하거나, 상황이 되면 직접 적 수뇌부에 대한 참수작전을 수행할 수 있다. 만약 SM-3 탄도탄 요격미사일을 도입한다면 한반도 전역에 대한 미사일 방어능력도 해군이 제공할 수 있다. 즉 킬체인-KAMD-KMPR의 3가지를 해군이 모두 제공하고 있으며, 특히 3면이 바다인 한반도의 환경으로 인하여 적의 예상방어선을 우회하는 공격이 가능하다. 한마디로 북핵 억제를 위한 핵심전력으로 우리 해군은 충분한 역량을 갖추고 있다는 말이다.
다만 이러한 해군의 능력은 특히 킬체인이나 KMPR과 같은 공세적 작전능력의 면에서 충분히 강조되고 있지 못하다. 해군의 훈련들이 전형적인 함대기동의 해상훈련 뿐만 아니라 지상의 적 목표를 정밀하게 제거해나가는 능력들을 위주로 좀더 강조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특히 북한이 핵능력을 완성해나가는 지금과 같은 시기에 있어서는 우리 군의 모든 역량이 이러한 공세전력의 양성과 새로운 전략의 구상에 집중되어야만 할 것이다.
<우리 군은 육군의 현무2 탄도미사일을 6분만에 발사하며 대응능력을 과시했다.>
핵능력의 진화
게다가 2017년 북한은 또다른 능력을 과시했다. 9월 3일 일요일 정오에 6차 핵실험을 벌였다. 마치 6.25 당시의 남침공세처럼 북한의 핵실험은 전격적이었다. 북한은 우선 그날 아침 노동신문을 통하여 김정은의 핵무기연구소 방문을 보도하면서, 수소폭탄의 탄두를 공개했다. 북한은 신형 수소탄두가 수십kt에서 수백kt까지 파괴력을 설정할 수 있고, 살상력 뿐만 아니라 EMP 효과까지 낼 수 있다고 자랑했다. 수소탄두를 공개하면서 북한은 이를 “국가핵무력완성을 위한 마감단계”로 평가했다. 그러나 노동신문에 공개된 사진 몇 장만 가지고서는 그런 주장을 쉽사리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북한은 이를 핵실험으로 입증했다. 2016년의 5차 핵실험이 이전의 핵실험과 다른 점은 핵탄두를 직접 터뜨려보았다는데 있다. 즉 과거의 핵실험은 핵폭발능력 자체를 검증하는 것이었다면 작년 9월 9일의 핵실험은 북한이 확보한 소형화된 핵탄두의 능력을 검증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결과 나온 파괴력은 10~20kt으로 추정되었다. 히로시마(15kt)나 나가사키(21kt) 급의 파괴력에 해당하지만, 수소탄으로 보기에는 턱없이 약한 파괴력이었다. 그래서 6차 핵실험이 일어나면 수소폭탄급의 파괴력이 아닐까 다들 걱정해왔다.
그래서 6차 핵실험을 바라보는 걱정은 컸다. 만탑산의 지질학적 특성상 수평굴착만으로도 수백 킬로톤(kt)의 파괴력까지도 실험이 가능하다는 관측도 있었다. 한 분석에서는 2017년 2월 중순까지 쌓인 토사량 만으로 추정해봤을 때 약 282kt의 핵실험까지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핵실험장이 붕괴하여 방사능 누출이 일어나면 피해를 보는 건 북한 자신이다. 위험성이 그리도 큰데 북한이 과연 그런 정도의 핵실험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일각에서 있었다.
그 러나 북한은 이런 모든 가정과 희망적 관측을 비웃듯이 9월3일 정오에 핵실험을 실시했다. 바로 그날 아침 노동신문에 공개했던 수소탄 탄두를 터뜨린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엄청났다. 우리 정부의 관측으로는 진도 5.7, 미국 지질조사국(USGS)은 진도 6.3, 일본은 6.2로 관측했다. 북한의 핵 위협을 애써 무시해온 중국과 러시아조차 각각 진도 6.3과 6.4로 평가했다. 핵실험에 관해서 가장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CTBTO(포괄적 핵실험 금지기구)는 북핵실험을 놓고 최초에 진도 5.8로 관측했다가 최종적으로는 진도 6.1로 정정했다. 세계 각국이 평균적으로 100kt 이상의 파괴력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만큼 심각한 파괴력이라는 말이다.
해군이 신속한 대응을 주도하자
그리고 6차 핵실험을 실시한 지 보름도 안되어 북한은 탄도미사일 발사시험을 실시했다. 화성12형을 발사한 것이다. 북한은 작년 5월14일 처음으로 화성12형을 발사하면서 ICBM능력으로 진화할 수 있음을 과시한 바 있다. 그리고 6차 핵실험을 실시하기 1주일 전인 8월 29일에는 또다시 화성12형을 정상각도로 발사하면서 일본열도를 통과하는 도발을 자행했다. 그리고 9월15일 발사에서는 이전에 간이발사대를 활용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곧바로 미사일 발사차량에서 화성12형을 발사했다. 더 이상 간이발사대를 세우는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자리를 잡고 미사일을 기립하면 곧바로 발사할 수 있게 되어, 북한으로서는 화성12형의 발사준비시간을 비약적으로 줄이게 되었다. 한미양국에게 킬체인에 필요한 시간은 더더욱 줄어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북한의 도발에 대하여 우리 군은 의미 있는 대응을 하였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를 탐지한 후에 곧바로 청와대에 결심을 얻어, 북한의 미사일을 타격하는 훈련을 실시했다. 육군의 현무2 탄도미사일 2발이 발사되었으며, 사거리는 발사지점에서부터 미사일발사원점인 평양의 순안비행장까지 거리를 고려하여 해상으로 발사되었다. 이 과정에서 미사일 1발이 작동불능으로 해상으로 추락하는 일도 있었지만, 적 미사일 발사 후 6분 만에 곧바로 대응할 수 있었다는 점이 가져다주는 메시지는 크다.
그런데 이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은 우리 군 내부에 다양하게 있다. 여태까지의 대응을 보면 우리 군은 지난 7월 화성14의 두차례 발사 때에 한미연합군이 현무2와 ATACMS 미사일을 발사했고, 8월말 화성12형의 발사 때에는 공군의 F-15K가 폭탄투하훈련을 실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태까지 북한의 도발 이후 수분 내에 사격으로 대응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해군도 사실 이러한 능력은 해군이 가장 잘 투사할 수 있다. 이지스함으로 적 미사일의 궤적을 가장 빨리 탐지할 수 있어 즉각적인 대응이 가능하며, 특히 사전에 해상에 표적지역을 설정해놓는다면 오히려 육군의 사격보다도 더욱 안전한 발사가 가능하다. 훈련은 거듭할수록 실력이 늘어나는 법이다. 우리 해군은 킬체인과 KMPR 능력을 가다듬어 이후 북한의 도발이 미사일 발사시험이든 아니면 실전이든 상관없이 가장 먼저 대응하고 가장 심대한 타격을 줄 수 있도록 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 해군은 과거 대함유도탄 발사 등으로 대응능력을 과시한 바 있으나, 즉각적 지상타격능력을
과시하면서 북핵억제를 주도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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