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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호(6-7월) | 한산도대첩과 조선 수군의 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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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제장명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장) 작성일18-06-25 10:34 조회6,010회 댓글0건

본문

 

한산도대첩과 조선 수군의 전술

 

 

 

                                                      제장명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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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리말

  임진왜란 시기 이순신이 지휘한 해전 중 가장 널리 알려진 해전은 바로 한산도대첩이다. 한산도대첩에서 조선 수군이 승리함으로써 일본군의 수륙병진전략을 무산시켰기에 이 해전은 400여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흔히 한산도대첩은 한산도해전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상 한산도해전과 안골포해전을 총칭하여 한산도대첩이라고 부른다. 이순신이 조정에 올린 장계인 『임진장초』에 보면 「제3차한산도승첩계본」이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에 한산도해전과 안골포해전을 포함하고 있다.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견내량파왜병장에도 두 해전을 함께 수록하고 있다. 

  한산도대첩에 대한 많은 연구 성과에도 불구하고(한산도대첩에 대한 연구 성과는 임진왜란사 또는 이순신의 일대기를 다룬 단행본에 거의 빠짐없이 기술되고 있다. 대표서적으로 이민웅 『임진왜란해전사』청어람미디어, 2004.(92~101쪽)를 들 수 있다. 한산도대첩을 다룬 논문으로는 金馹起․李在均,「閑山大捷과그 影響」『삼척공업전문학교논문집』2,1970; 鄭鎭述,「閑山島海戰硏究」『壬亂水軍活動硏究論叢』海軍軍史硏究室, 1993, 등이 있다.) 일반적으로 이 두 해전에 대해서 개략적인 소개만하고 있을 뿐이지 구체적으로 조선 수군이 사용한 전술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절차가 어떠했는지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해전에서 승리한 구체적인 요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한산도대첩은 어떻게 해서 벌어지게 되었는지, 이순신이 이끈 조선 수군은 어떤 전법으로 승리할 수 있었는지에(한산도대첩에서 발휘한 조선 수군의 전술에 대해서는 제장명의 논고(「이순신의 수군전략과 한산대첩」『軍史』(제60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6) 참조.) 대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이 오늘날 한국 해군의 전술에도 어느 정도 참고가 되리라 생각된다.

 

 

Ⅱ. 한산도해전과 조선 수군의 전술

  1. 배경 

  이순신이 이끈 조선 수군의 통합함대는 제2차 출동(사천·당포·당항포·율포해전)에서 72척의 적선을 분멸시킨 후 진을 해체하고 각자 주둔지로 복귀하였다.(『李忠武公全書』 卷之二, 「狀啓一」 ‘唐浦破倭兵狀’) 그러다가 일본군의 전선이 계속 경상도 지역에 출몰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각도의 수군은 서로 소통하면서 전선을 정비하고 경상도 쪽 적의 정세를 자세히 탐문하였다. 

  이때 조선 수군에게 7차례에 걸쳐 참패를 당한 일본군 전쟁지도부에서는 작전회의를 열어서 패배한 원인을 분석하였다. 이때 일본군 수뇌부는 2가지 면에서 잘못되었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하나는 일본 수군이 단합하지 못하고 분산된 가운데 조선 수군과 싸우는 바람에 패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 수군의 최고 지휘관들이 해전에 참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파악한 것이다. 7차례 해전 중 일본군의 전선 수가 가장 많았던 해전은 옥포해전으로 30척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李忠武公全書』 卷之二, 「狀啓一」 ‘玉浦破倭兵狀’) 아울러 개전 시기 경상도 수군의 자멸에 따라 조선 수군이 궤멸되었다고 판단한 일본의 정예 수군지휘관들은 한성까지 올라가 육전에 참가하고 있었다. 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육전에 참가하던 일본의 수군지휘관 3명을 남쪽으로 내려 보내 서로 협력하여 조선 수군을 무찌르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 구키 요시다카(九鬼嘉隆),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등의 수군지휘관들이 남하하여 함대를 형성하여 서진하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조선 수군은 역사적인 제3차 출전을 하게 되었다. 이유는 당시 일본군선이 가덕·거제 등지에서 10여 척 혹은 30여 척씩 떼를 지어 출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전라좌·우도 수군은 이들을 물리치기 위해 7월 4일 저녁 때 모여 7월 5일까지 작전계획을 논의하였다.(『李忠武公全書』 卷之二, 「狀啓一」 ‘見乃梁破倭兵狀’)

 

  2. 경과

  이순신과 이억기가 이끄는 전라좌·우도수군은 7월 6일에 전라좌수영을 출발하였다. 도중에 곤양과 남해의 경계인 노량에서 원균이 이끈 경상우도의 전선 7척도 합류한 후 진주 땅 창신도에 이르러 밤을 보냈다. 여기서 전라좌우도 전선의 숫자가 몇 척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7월 7일에 동풍이 크게 불어서 항해하기 어려운 가운데 고성땅 당포에 이르러 날이 저물어 밤을 지내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고성땅 당포는 현재의 통영 미륵도의 서쪽에 있는 지명으로 조선시대 만호가 주둔하던 수군진이 있었으며, 약 한 달 전(6월 2일) 당포해전이 벌어진 곳이다. 당시 미륵도는 목장이 형성되어 있어서 말을 키우는 지역이 많았다. 이러한 일을 하는 사람을 목자(牧子)라고 불렀다. 

  이때 피란하여 미륵산(현재 높이 461미터)에 올랐던 미륵도의 목자 김천손은 산 정상에서 망을 보던 중 오후 2시쯤 견내량 쪽에 도착하는 일본 수군함대 70여 척을 발견하였다. 이들은 와키사카 야스하루가 거느린 일본의 정예 수군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지시에 따라 조선 수군과 일전을 펼치기 위해 서진해 온 것이었다. 다른 수군지휘관보다 먼저 도착하여 준비를 마친 와키사카는 7월 6일 김해를 떠나 영등포를 거쳐 이날 견내량에 도착한 것이다. 김천손은 매우 놀라 당황하다가 마침 당포 쪽으로 들어오는 조선 수군 함대를 바라보고 급히 달려와 적정을 보고하였다.(『李忠武公全書』 卷之二, 「狀啓一」 ‘見乃梁破倭兵狀’)

  김천손의 정보를 토대로 이순신은 여러 장수들을 모이게 하여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당시는 삼도수군통제사제도가 시행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각도 수사간 협조체제였다. 이에 이순신은 경상우수사 원균, 전라우수사 이억기를 비롯하여 핵심 지휘관 및 참모들과 작전계획을 수립하는 회의를 가졌다. 이순신 주도하에 열린 회의에서 원균이 의견을 제시하였는데 앞서 7번의 해전을 통해 보았듯이 일본군의 전력이 약하니 바로 견내량으로 쳐들어가서 공격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이순신은 다른 의견을 제시했는데, “견내량은 수로가 좁고 암초가 많아 우리의 판옥대선이 전투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그리고 적이 만약 패하게 되면 육지로 올라가게 되므로 우리 백성들을 해치게 된다. 따라서 적을 일망타진하기 위해서는 한산도 앞 해상으로 유인을 해서 물리쳐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러자 원균은 타당한 계획이라고 생각하고는 이순신의 의견에 동조하였다. 당시 한산도는 거제와 고성 사이에 위치하며 사방으로 헤엄쳐 나갈 길이 없고, 적이 비록 육지에 오르더라도 틀림없이 굶어죽게 될 것이므로 한산도 앞바다까지 유인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면 일본함대를 유인해 오는 임무는 누가 수행할 것인가? 바로 이순신 휘하 방답진의 첨사였던 동명이인 이순신(李純信)이 유인작전을 주도하게 되었다. 성실하고 침착한 그의 성정이 임무 수행에 적합하다고 평가된 것이다. 그 후 몇 가지 세세한 작전계획을 수립한 후 휴식을 취했다. 

  역사적인 7월 8일(음력, 당시 양력으로 8월 14일) 이른 아침에 조선 수군은 적선이 머물고 있는 견내량 쪽으로 항진하였다. 바다 복판에 이르렀을 때 마침 일본군 대선 1척과 중선 1척이 선봉으로 나와서 조선 함대를 탐지해 보고는 결진해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조선 수군이 추후 확인해 보니 모두 73척(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이 대열을 벌여서 대어 있었다.

  당시 조선 수군의 전선 수는 우리 측 기록에는 정확하게 나와 있지 않지만, 일본 측 기록에 의하면 58척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이중 2~3척은 거북선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본의 전선 중 전투능력을 갖춘 대·중선이 모두 60척임을 감안할 때 양국의 전선 수는 대등한 수준임을 알 수 있다.(제장명, 앞의 논문, 123쪽.)

  어쨌든 작전 계획에 따라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이 이끄는 판옥선 6척을 시켜서 선봉으로 나온 적선을 뒤쫓아서 습격할 기세를 보였다. 그러자 일본 군선들이 일시에 돛을 달고 쫓아오므로 유인함대는 거짓으로 물러나 돌아 나오자 적선들도 줄곧 쫓아왔다. 이때 유인함대는 힘을 다해 노를 저어 본대 근처에 이르자 쫓아오던 일본 군선들이 잠시 멈칫거렸다. 조선 수군의 주력함선 수십 척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에 조선 수군함대 전체가 후퇴하는 척 하자 일본함대는 조선 수군을 얕보고 계속 쫓아왔다. 조선 수군함대가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렀을 때 이순신은 여러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학익진(鶴翼陣)’을 벌여서 일시에 진격하도록 하였다. 

  여기서 학익진이란 무엇인가? 당시 조선수군의 진형은 항해할 때의 진형과 공격할 때의 진형이 구분되어 있었다. 항해할 때 사용하는 진형은 크게 5가지가 있었는데, 이는 직진(直陣), 방진(方陣), 원진(圓陣), 곡진(曲陣), 예진(銳陣)으로 이를 기본오행진이라고 불렀다.(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兵將說·陣法』 1983. 204~205쪽.) 즉 항해할 때는 이 5가지 진형 중 어느 한 가지 형태를 이룬 채 이동한다. 그러다가 적선을 발견하게 되면 이 진형을 변형하여 공격에 적합한 형태로 바꾼다. 이 공격진형도 크게 5가지가 있다. 즉 학익진(鶴翼陣), 장사진(長蛇陣), 언월진(偃月陣), 어린진(魚鱗陣), 조운진(鳥雲陣)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공격진형은 아군의 화포를 효율적으로 발사할 수 있는 위치를 선점하면서 공격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형태로 진을 형성하는 것이다. 예컨대 적이 좁은 수로 안에 있으면 장사진(長蛇陣: 긴 뱀이 이동하는 형태로 진을 형성하는 것이다)으로 공격하는 것이다. 학익진은 학의 모양으로 진형을 형성하여 적을 포위한 가운데 화포의 명중률을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다. 바로 넓은 바다에서 적을 만났을 때 주로 사용하는 진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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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익진도]​

 

  그러면 이때 학익진을 형성하라는 지시는 어떻게 했을까? 조선후기 학익진도를 보면 4가지 신호도구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가장 먼저 신호포를 발사하였다. 굉음과 함께 연기가 공중으로 치솟는 장면을 휘하 함선들은 주목했을 것이다. 그때 큰 깃발을 든 기수가 기함의 장대 위에 올라 좌우로 3번씩 깃발을 눕혔다 폈다 하였다. 이것이 곧 학익진을 펼치라는 뜻이다. 이어서 사용한 신호도구는 북이다. 북은 속도 조절에 필요한 신호도구였다. 당시는 급했기에 북을 급하게 울렸다. 만약 일본군선이 바로 쫓아오지 않았다면 천천히 북을 울렸을 것이다. 그런 후 마지막으로 나발을 이용하였다. 나발을 붊으로써 적에 대한 공격 준비가 완료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각 함선에서는 공격을 하게 되는데, 문제는 일본 군선도 나름의 진형을 형성해 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속도가 빨랐다. 만약 우리 함선과 뒤엉켜버린다면 학익진을 펼쳐도 의미가 없게 될 것이다.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학익진을 형성하는 동안 거북선이 출동하여 적의 선봉선에 화포를 쏘아 격파하였다. 

  거북선의 선제공격으로 선봉대열이 무력화되자 뒤따라오던 일본 군선들은 자연스럽게 타력(舵力)에 의해 선봉선 대열에 근접하게 되었다. 이에 조선 수군 함대는 화포를 이용하여 적선을 향해 각각 지자·현자·승자 등의 각종 총통을 쏘아서 쳐부수자 일본군들은 사기가 꺾여 도망하였다. 이에 조선 수군의 장졸들은 이긴 기세를 틈타 돌진하면서 화살과 화전을 번갈아 쏘아 적선을 분멸하고 적군을 사살하여 일시에 거의 다 없애버렸다.(『李忠武公全書』 卷之二, 「狀啓一」 ‘見乃梁破倭兵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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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산도해전 상황도]

 

  3. 결과 

  한산도 해전은 단 기간 내에 승부가 결정되고 말았다. 그것은 조선 수군의 전력이 가장 잘 응집된 가운데 효율적인 전술이 유감없이 발휘되었기 때문이다. 한산도 해전에서 조선 전선은 1척의 손실도 없이 일본전선 73척 중 47척을 분멸시켰고, 12척을 온전하게 나포하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일본 수군의 대장 와키사카(脇坂安治)는 겨우 목숨을 건져 패잔전선 14척(대선 1척, 중선 7척, 소선 6척)을 이끌고 김해방면으로 도주하였다. 일본군 패잔 장졸 400여 명은 스스로 도망하기 어려움을 알자 배를 버리고 한산도 육지로 도주했다. 이순신은 적선을 추격하려고 했지만 종일 접전으로 장졸들이 노곤하였고, 날도 어두워 끝까지 추격할 수 없어서 견내량 앞바다에 결진하고 밤을 지냈다.

 

     

Ⅲ. 안골포해전과 조선 수군의 전술

  1. 배경 

  조선 수군은 7월 9일 아침에 가덕으로 항진하려고 할 때 ‘안골포에 왜선 40여 척이 대어있다’는 탐망군의 보고가 있었다. 이순신은 즉시 전라우수사 및 경상우수사와 함께 적을 토멸할 계책을 상의하였다. 그러나 날은 이미 저물고 역풍이 크게 일어 전진할 수 없어서 거제땅 온천도(칠천도를 달리 부르는 말)에서 밤을 지냈다.

  조선 수군 함대는 한산도해전 때와 마찬가지로 7월 9일 저녁에 제장들과 함께 작전회의를 가진 후 7월 10일 새벽에 발선하였다. 작전계획을 보면, 전라우수사는 안골포 바깥바다의 가덕 변두리에 결진해 있다가 전라좌수군과 경상우수군이 접전을 시작하게 되면 복병을 남겨두고 급히 참전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2. 경과 

  조선 수군함대가 안골포에 이르렀을 때 선창에는 총 42척(대선 21척, 중선 15척, 소선 6척)이 머물고 있었다. 그중에 3층으로 뚜껑 있는 대선 1척과 2층으로 된 대선 2척이 포구에서 밖을 향하여 정박하고 있었으며, 그 나머지 배들은 고기비늘처럼 잇대어 있었다. 

  이곳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수군 장수는 와키사카와 함께 부산에 내려왔던 구키 요시다카와 가토 요시아키였고, 이들 또한 도요토미 직속의 정예수군이었다. 이들은 단독으로 출전을 감행한 와키사카를 뒤쫓아 7월 7일 김해로 이동하였고, 다음날 이곳 안골포로 옮겨 와서 정박 중이었다. 이들은 히데요시의 공격명령을 수행하고 앞서 출전한 와키사카 함대를 돕기 위해 서둘러 출발해 왔던 것이다.(이민웅, 『임진왜란 해전사』 청어람미디어, 2004, 96쪽.)

  이순신은 함대를 거느리고 학익진을 벌여 먼저 전진하고 경상우수사는 이순신의 뒤를 따르게 하였다. 그런데 안골포의 일본 수군은 싸우러 나오지 않았다. 학익진을 형성한 것은 일본군이 포구 바깥바다로 나올 것을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이순신은 포구로 진입하여 공격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을 하였다. 그런데 안골포의 지세가 좁고 얕아서 조수가 물러나면 육지가 드러날 것이므로 판옥선과 같은 대선은 용이하게 출입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였다. 따라서 여러 번 유인작전을 펼쳤지만 한산도 해상에서 선운선(先運船) 59척이 참패를 당한 사실을(이는 7월 8일 한산도해전에서 일본수군이 패전한 사실을 의미한다.) 전해들은 일본 수군은 포구 밖으로 일절 나오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순신은 새로운 전술을 구사하였다. 이를테면 포구가 좁은 점을 고려하여 일종의 ‘장사진(長蛇陣)’을 형성하여 공격하였다. 전라좌수군이 선봉에 서고 경상우수군이 뒤를 이어 안골포로 교대로 출입하여 적을 공격한 후 돌아 나오는 형태의 공격을 하였다. 그 뒤를 이어 사전 약속한 대로 전라우수군까지 합세하여 병력 집중의 원칙을 견지함으로써 전투의 효율성을 배가시켰다. 또한 공격 목표를 대장선인 대선을 위주로 선제공격하는 전술을 구사하여 적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효과를 추구하였다. 물론 이때도 거북선에 의한 공격은 매우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조선 수군의 집중공격에 일본 수군은 당하지 못한 채 다수가 육지로 도주하였다. 그런데 당시 안골포 산 속에는 많은 백성들이 잠복해 있었다. 이순신은 일본의 전선을 모조리 없앨 경우 궁지에 빠진 일본 수군들에 의해 백성들이 비참한 살육을 면치 못할 것을 염려하였다. 이순신의 대민관(對民觀)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따라서 대선만 모조리 없애고 작은 전선만을 남겨 둔 채 1리쯤 물러나와 밤을 지냈다. 일본 수군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왔을 때 일망타진할 계획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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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골포해전 상황도]

 

  다음날인 11일 새벽에 다시 돌아와 포위해 보았으나 일본군들이 당황하여 닻줄을 끊고 밤을 이용하여 도망하였다. 전투현장에서는 일본군이 전사한 군사들을 12곳에 모아 쌓고 불태운 흔적이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일본 수군은 항해가 가능한 나머지 군선으로 야간을 이용해 안골포를 탈출, 부산 쪽으로 도주하였다. 이순신은 가덕 바깥으로부터 동래·몰운대에 이르기까지 배를 늘여 세워 진을 치게 하고 조선 수군의 위세를 과시하였다. 그런 후 적에게 오랫동안 주둔할 계획인 것처럼 의심하게 제반 조치를 취한 후 밤을 틈타 철군하여 12일 오전에 한산도에 도착한 후 작전을 종료하였다. 

 

  3. 결과

  이 날의 전투결과는 다른 해전에 비해 명확하지 않다. 이순신의 장계에 따르면 정확한 척수가 나오지 않고 적선들을 거의 다 쳐부수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일본 측의 연구에 의하면 이날 구키(九鬼), 가토(加藤)의 함대는 20척의 군선을 잃었다고 한다.(이민웅, 위의 책, 97쪽.) 어쨌든 안골포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적어도 적선 중 절반 이상을 분멸시켰다고 볼 수 있고, 일본군의 대선은 거의 다 분멸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두 차례 해전에서의 일본군 피해 상황에 대한 일본 측 기록을 보면 1만 명의 군사 중 1천여 명만이 남아 있다는 언급을 통해 볼 때 한산도대첩 시 9천여 명에 육박하는 피해를 입은 것으로 볼 수 있다.(『李忠武公全書』 卷之九, 이분, 「행록」) 흔히 세간에서 한산도해전의 결과만으로 일본군 9천명이 피해를 입었다고 하지만 일본의 함선별 승조인원을 고려해 볼 때 한산도해전과 안골포해전을 합했을 때 입은 인명 손실로 볼 수 있다.

  그러면 조선 수군의 피해규모는 어느 정도일까? 우선 조선 수군의 전선은 1척도 분멸되지 않았다. 다만 인명피해는 다소 발생하였다. 이순신의 장계에 의하면 한산도해전과 안골포해전에서 입은 조선 수군의 피해는 전라좌수군의 경우만 언급하고 있다. 즉 전라좌수군의 경우 전사 19명, 부상 115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을 같은 비율로 전라우수군과 경상우수군에 적용할 경우 조선수군의 총 전사자는 50명 내외로, 부상자는 260여 명으로 추정할 수 있다.  

 

Ⅳ. 맺음말

  이상에서 한산도해전과 안골포해전의 경과를 전술적인 면에서 살펴보았다. 한산도대첩에서 조선 수군이 승리한 요인은 여러 가지로 함축하여 제시할 수 있다. 먼저 적정에 대한 사전 정보의 획득이다. 한산도해전의 경우 해전 하루 전에 미륵도 목자 김천손이 적정을 알려온 것이 해전 승리에 기여한 바가 컸다. 안골포해전에서도 탐망군에 의한 사전 정보가 입수되었기에 미리 효율적인 작전을 계획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이순신의 뛰어난 전략전술을 들 수 있다. 전장 환경을 분석한 후 조선 수군에 유리한 장소와 상황을 조성한 후 전투를 수행하였다. 아울러 사전 훈련을 한 것처럼 학익진과 장사진이라는 조선 수군의 진형을 형성한 후 공격하여 성공을 거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작전의 성공이 가능했던 것은 판옥선과 거북선이라는 전선이 상대적으로 우수했던 점과 선재화포로 대변되는 무기체계가 일본군을 압도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쨌든 한산도대첩은 일본 수군을 대표하는 3명의 장수가 지휘한 정예수군을 이순신이 실질적으로 이끈 조선 수군이 물리친 해전이다. 즉 한산도해전과 안골포해전에 참가한 일본군은 모두 일본의 정예수군이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만약 조선 수군이 한산도해전에서 승리한 후 그대로 물러났다면 이후 언젠가 나머지 일본의 정예수군함대와 전투를 벌였을 것이다. 그런 연후에야 거제도 서쪽 남해상의 제해권을 장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일본의 정예함대를 한산도와 안골포에서 연파한 것이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부연한다면 만약 한산도해전만 치렀을 경우 일본 측에서도 전열을 재정비하여 조선 수군과 일전을 불사했을 가능성도 크다. 그렇지만 안골포해전에서 그들 수군의 최고지휘관이 지휘했음에도 패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접전(接戰)을 기도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와 같이 그동안 한산도대첩은 한산도해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산도해전과 안골포해전을 총칭하는 것으로 이 해전이 당시 전황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당시 일본 육군이 평양성까지 점령했지만 바다를 통한 보급지원이 한산도대첩에 의해 무산됨으로써 일본군의 북진이 좌절되고 말았다. 이 해전 승리는 일본군의 수륙병진 전략을 한꺼번에 무산시켰다고 볼 수 있다. 아울러 일본의 정예수군이 조선 수군에게 패함으로써 일본군은 더 이상 바다에서 조선 수군과 전투를 하지 않고 해전을 회피하게 되었다. 이 해전은 임진왜란 전황에 미친 영향이 매우 컸기에 임진왜란 3대첩에 빛나고 최근 들어 세계 4대 해전에 이름을 올리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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