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호(10-11월) | 이순신의 전력증강 노력에 비춰본 국방개혁 의지의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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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임익순(충남대 국방연구소 ) 작성일18-11-16 16:15 조회3,485회 댓글0건본문
이순신의 전력증강 노력에 비춰본 국방개혁 의지의 중요성
임익순
충남대 국방연구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를 방위하기 위해 전력을 증강하고 유지하는 것은 경제의 발전과 아울러 무엇보다 중차대한 과업임에 틀림없는 사실이다. 현대의 국가들이 경제발전을 뒷받침하는 군사력의 건설에 모든 과학기술을 총동원하여 앞서가려고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전력을 증강하는 데에는 예산과 제도 못지않게 그 과업을 완수하겠다는 의지도 중요하다. 아무리 많은 예산이 투입된다고 하더라도 의지가 없다면 빈껍데기에 불과할 수도 있다.
왜의 공격을 앞두고 조선의 조정이 보여준 행태는 예산도 제도도 부족했지만 무엇보다도 의지가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그로 말미암아 임진년부터 7년 동안의 전란으로 국토가 유린당하는 치욕을 겪도록 하였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상의 방어를 통해서만 왜의 야욕을 꺾을 수 있다는 굳은 신념으로 수군의 전력을 증강하기 위해 노력한 이순신의 자세는 그 결과도 중요하지만 전력을 증강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순신이 예산도 제도도 미흡한 상황에서 수군의 전력을 증강하려고 했던 과정을 살펴보고 현대의 우리에게 군사력 건설을 포함한 국방개혁의 추진에 있어 얼마나 의지가 중요한지를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이순신이 수군의 전력을 증강한 것은 크게 세 개의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 시기는 이순신이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임명된 1591년 2월부터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 4월까지이며, 두 번째 시기는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1593년 8월부터 1594년 4월까지이고, 세 번째 시기는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1597년 8월부터 사로병진 작전이 시행되는 1598년 6월까지이다.
거북선과 왜란의 대비
이순신이 임진왜란 전에 전쟁에 대비한 조치 중 가장 돋보이는 것이 거북선의 건조이다. 거북선의 건조에 대한 일부 이견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이 군관 나대용을 감독관으로 하여 3척의 거북선(여수 본영 1척, 순천부 1척, 방답진 1척) 이순신은 2차 출전에 대한 장계에서 거북선을 몇 척 건조했는지 밝히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충무공전서 』권9 부록인 「행록」에 3척을 건조했다는 기록과 견내량해전에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왜장 협판안치의 기록인 『협판록」에 거북선 3척이 참전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이 근거에 따라 임진왜란에 참전한 거북선은 3척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을 건조한 것은 당시의 조선 수군의 전투력과 기술수준 등을 고려해 보았을 때 대단히 획기적이고 창의적인 사고의 산물이라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
이순신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인 1592년 2월부터 4월까지 네 번에 걸쳐 거북선의 건조와 관련된 기록을 『난중일기』에 남겨놓고 있다.
2월 8일 일기 “이날 거북선에 쓸 돛베 29필을 받았다.”
3월 27일 일기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 것을 시험했다.”
4월 11일 일기 “이날 비로소 베로 돛을 만들었다.”
4월 12일 일기 “배를 타고 거북선에서 지자‧현자 포를 쏘아 보았다.”
이어서 거북선을 처음 출전시킨 것이 2차 출전의 첫 번째 전투인 5월 29일의 사천해전부터였다는 것을 장계를 통해 밝혔다.
6월 14일 장계 “(상략) 신이 일찍이 섬 오랑캐들의 침입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별도로 거북선을 만들었습니다. 이물에는 용머리를 붙이고 그 아가리로 대포를
쏘며 등에는 쇠못을 꽂았습니다.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어도 밖에서는 안
을 들여다 볼 수 없으므로 비록 왜적선 수백 척 속에라도 쳐들어가 대포를 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야 돌격장이 그것을 타고 나왔습니다. (하략)”
위에서 열거한 일기와 장계의 내용에 따르면 이순신은 이미 1592년 2월 8일 이전에 거북선의 건조를 마친 것을 알 수 있다. 이순신은 거북선의 선체에 대한 건조를 마치고 거북선 3척에 쓰일 돛베를 조달하기가 어려워 이것을 지원해 줄 것을 건의하여 조치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거북선에 장착될 돛은 2개월여 뒤인 4월 11일에 완성을 하였고, 다음 날인 4월 12일에 이 돛을 달고 시험운행을 하면서 지자총통과 현자총통을 아울러 설치하고 시험발사를 하여 일차적인 거북선의 완성을 본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완성된 거북선을 1차 출전인 옥포해전 등에는 출전시키지 않았는데 이것은 시험운행 및 화포발사 시험을 하는 동안 문제점을 보완하려는 의도가 있었거나 해로나 지형에 대해 익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출전할 경우 혹시 있을 수 있는 사고를 우려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은 1차 출전을 승전으로 마무리하고 임금의 몽진소식을 듣고 5월 9일 본영인 여수로 돌아왔다. 난중일기의 기록이 1차출전일 다음 날인 5월 5일부터 그달 5월 28일까지 빠져있음으로 인해 1차 출전 복귀 때부터 2차 출전 전인 5월 28일까지 20일 간의 행적을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순신은 1차 출전 장계를 통해 전선을 정비하고 사변에 대비하도록 예하 장령들에게 지시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이순신은 이 기간을 이용하여 출동했던 전선의 정비와 함께 거북선을 정비하고 추가적인 시험을 통해 완성도를 높임으로써 2차 출전 시부터는 거북선을 대동 출전시키기로 결심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순신의 거북선 건조에 따른 일련의 궤적은 현대적인 개념의 무기체계 개발절차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물론 판옥선을 기본 모델로 하여 개량한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현대의 군함이나 전투기의 무기체계 개발에 있어서도 기존의 모델을 기초로 성능개선과 함께 몇 가지의 기능을 추가하여 새로운 무기체계를 개발하는 사례가 있듯이 거북선의 건조는 분명히 새로운 무기체계의 개발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현대의 무기체계 개발은 성능과 함께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개념 및 기술개발단계-체계개발 및 시연단계-생산 및 배치단계-유지 및 폐기단계로 구분하여 적용하고 있다. 강자영 외, “국내 개발 무기체계의 체계안전에 관한 연구”,『한국항공운항학회지 』17권 2호(2009), p.24.
여기서 앞의 세 단계가 핵심적인 무기체계 개발 단계이며, 체계개발 및 시연단계는 다시 설계-제작-시험평가-보완 단계로 세분하고 있다.
이순신의 거북선 개발에 대한 기록을 이 단계에 대입하면 거의 유사하게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순신은 거북선의 목적 개념을 기록해 두지는 않았지만 거북선의 외형과 실전에서의 운용 등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이순신이 설정한 거북선의 목적은 갑판 위에서 활을 쏘고 총통을 발사하는 전투원들을 적의 화살 등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는 것과 근접전 시에 적이 아군의 배에 올라와서 백병전을 하지 못하게 하면서 이러한 보호를 발판으로 적 함대의 중심으로 쳐들어가 총통을 발사하고 직접 부딪힘으로써 적선을 격파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Underwood, H. H. 최재수 역, “임진왜란과 이순신장군의 해전”,『해양전략 』75호(1992), pp.78〜79.
임진왜란 중 전선배가계획
이순신의 거북선 개발이 신무기체계에 대한 숙고의 결과물이라면 현행 수군함대의 전력을 증강하고자 하는 노력의 산물은 “전선배가계획”에 의한 현용 전력의 확충이다. 김재근,『조선왕조 군선 연구 』(서울: 일조각, 1980), p.164.
이순신은 전쟁이 발발한 지 1년여가 지나 화의교섭으로 소강상태에 접어든 1593년 5월 10일에 장계를 올려 전라좌우도의 수군세력이 전선 100여 척에 불과함으로 충청도 수군을 계속 지원하도록 건의하였다. 그 이유는 왜적들이 웅천과 창원, 김해, 양산 등지에 웅거하고 있으므로 이들을 격퇴시키려면 육전으로 바다로 밀어내야 하고 이때 수군이 왜적을 바다에서 격멸해야 하므로 전선이 적절한 규모로 확보되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순신과 이억기는 임진왜란 초기에 확보하고 있던 전선 48척의 2배 정도인 96척으로 추가 건조하거나 정비하여 증강하였지만 전체 조선 수군의 전력이 사후선 또는 협선을 포함하여 200여 척에 불과하므로 왜군의 500척 이상의 수군을 격파하려면 전선을 계속 확보하여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순신은 1593년 8월에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자 삼도의 수군을 증강하기 위한 ”전선배가계획“을 같은 해 9월 10일에 건의하였다. 이순신은 전라좌도의 5관 5포에서 전선 60척을 정비하고 전라우도15관 12포에서 90척을, 경상우도에서 40척을, 충청도에서 60척을 정비할 수 있으므로 현재의 100여 척에서 250척으로 증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하고 추진하였다. 아울러 전선과 더불어 전선을 지원하는 종선인 사후선 또는 협선의 비율을 1:1로 정하여 마찬가지로 250척을 확보하여 총 500척 규모의 대 함대를 구축하여야 왜적을 격퇴시킬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김재근(1990), 상게서, pp.162〜163.
이순신이 1593년 9월에 장계를 올려 건의한 “전선배가계획”과 실적은 다음의 <표>와 같이 요약할 수 있다.
<표> 군선증강계획과 실적비교
구분 | 기존 군선 수 (계사 5, 14) | 증강 계획 (계사 9, 10) | 증강 결과 (갑오 3~4월) | 비고 | |
전라 좌도 | 전선 | 42 | 60 | 60 | - 순천 10, 흥양 10, 보성 8, 광양 4, 낙안 3척, 등 35척 |
협선 (사후선) | 52 | 60 | 69 | ||
전라 우도 | 전선 | 54 | 90 | 65 | - 증강 21척 건조 완료 했으나 수군을 충원 못하였음 |
협선 (사후선) | 54 | 90 | 64 | ||
경상 우도 | 전선 | 25 | 40 | 25 | - 계사 8월 30일 일기: 25척이 증감 없이 유지됨 |
협선 (사후선) | - | 40 | 25 | ||
충청도 | 전선 | - | 60 | 10 | - 충청수사 구사직이 전선을 인솔, 1594, 3, 16일에 도착 |
협선 (사후선) | - | 60 | 10 | ||
계 | 전선 | 121 | 250 | 160 | - 증강완료된 조선 수군의 규모 : 328 척 |
협선 (사후선) | 106 | 250 | 168 |
이 표는 김재근의 위의 책과 1593. 5. 14〜1594. 4. 2일 장계 내용을 참조하여 작성하였음.
1594년 춘계에 해상에서의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기 위하여 같은 해 2월 경 까지 완수하려던 이 계획은 몇 가지 문제로 인해 차질을 빚어 전체적인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하였다. 전라우도는 가장 많은 전선의 정비를 할당하였지만 수군의 관할 구역 15관중에서 9관이 육군으로 이속되어 건조 중인 20여 척을 일시에 중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21척은 완공이 되었지만 격군이 없어 기한을 맞추어 통제영에 도착시키지 못하였다. 한편 충청도는 60척이 할당되었는데 관찰사가 임의로 20척을 감제하는 등으로 뒤늦게 10척을 건조할 수 있었다.
이순신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으면서 추진한 “전선배가계획”의 추진결과를 1594년 3월과 4월에 보고하였다. 이에 따르면 전라좌도에서는 35척을 건조하여 목표를 초과하여 달성하였으나 전라우도에서는 21척을 추가로 정비하는데 그쳤고, 충청도에서는 10척 만을 정비하여 통제영에 도착하였다. 그 결과 조선 수군의 전선은 원균의 경상우도 세력인 25척을 포함하여 160척이 되었고, 사후선 또는 협선 168척으로 총 328척의 함대로 증강되었다. 이와 같은 전선의 규모는 이순신이 통제사에서 파직될 때까지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은 거북선의 화포에 대한 시험뿐만 아니라 판옥선에 장착할 화포와 화약을 준비하는데 상당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이순신은 전란초기의 해전에서 승리한 원인을 화포사용과 판옥선의 우수성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전선의 건조와 함께 화포 및 화약의 준비를 철저히 하였다. 이순신은 1593년 1월에 전년의 해전에서 화약을 모두 사용하여 소진된 상황을 보고하였다. 이때에 즈음하여 이순신은 군관 이봉수가 염초 제조방법을 알아내어 1천여 근을 만들었고 이를 본영과 각 진포에 나누어 준 사실을 보고하면서 석유황이 부족하므로 1백여 근을 내려 보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순신은 같은 해 윤11월에도 새로 건조한 전선에 비치할 지자와 현자 등 총통을 만드는데 소요되는 철이 부족한 상황과 승려들을 시켜 쇠붙이를 수집하였으나 여의치 않은 상황 등을 보고하면서 총통 제작에 소요되는 철과 함께 석유황 2백여 근을 지원해 줄 것을 함께 요청하였다.
이순신은 이와 같이 화약 준비와 함께 지속적으로 각종 총통을 제작하였는데, 특히 1593년 5월에는 왜군의 조총을 개량한 정철총통을 만들어 조정에 올려 보냈다. 이순신의 일기에 따르면 이 총통의 성능은 왜군의 조총보다 더 우수했다고 한다. 이순신은 정철총통뿐만 아니라 기존의 천‧지‧현‧황자 등 총통 제작도 계속하였다. 이 총통들은 기간 중 새로이 건조한 전선에 비치하도록 했으며, 이순신의 본영에서도 그의 지휘 하에 총통을 제작하였다. 이순신이 강화교섭 기간 중에 준비한 총통과 화약은 이분의 「행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1597년 초에 이순신은 원균과 통제사직을 교대할 때 군량은 본영 것만 9,914석, 화약 4천 근, 총통은 각 전선에 실린 것을 제외하고 남은 3백 자루를 인계했다고 한다.
이순신의 화포제작과 화약의 제조는 『경국대전 』의 규정에 근거하고 있다. 이것은 모든 변방의 수령이나 장수들이 공통적으로 하도록 되어 있는 것으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장수들이 준비를 했다고 보아야 한다. 이순신의 전쟁대비에 있어 화포와 화약의 제조 또한 규정에 따른 것이지만 특별히 정성을 다하면서 자신의 능력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하는 실천 자세를 보여준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삼도수군통제사 재임명과 수군의 재건
이순신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무기인 거북선의 개발과 실전배치 및 운용, 전선배가계획에 의한 수군의 증강, 전선의 증가에 따른 화포와 화약의 제조 등 왜의 수군을 격멸하기 위한 조치를 추진하고 1597년 2월 통제사 직에서 해임과 동시에 투옥되었다. 같은 해 4월 초에 출옥한 뒤 백의종군 처분을 받고 도원수 권율을 보좌하면서 남해안 연해의 실정을 많은 부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칠천량해전에서 원균의 조선수군이 궤멸당하고 원균도 패사하자 삼도수군통제사에 재기용되었다. 거북선을 포함하여 300여 척에 이르는 막강한 조선 수군이 순식간에 거의 모든 세력을 잃어버린 상황에서 가용한 전선과 군사가 얼마나 있는지도 모른 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고난의 행군을 시작한 것이다. 이순신은 통제사 직을 다시 제수 받은 8월 3일부터 왜군과의 조우를 피해 구례를 거쳐 전라우수영이 있는 해남방향으로 행군을 시작하였다. 이후 이순신은 15일 동안 약 250km에 이르는 장정을 통해 잔여 수군을 수습하고 왜군의 서해 진출을 저지하기 위한 수군재건을 추진했던 것이다.
<그림> 통제사 재임명 후 이순신의 수군수습 행적
이순신은 통제사로 재임명된 8월 3일부터 벽파진으로 옮긴 8월 29일까지 거제현령 안위와 발포만호 소계남이 지휘하는 전선 2척을 비롯하여 회령포에서 배설로부터 인수한 전선 10척을 포함하여 12척의 전선으로 함대를 편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명확한 근거는 없지만 전선 1척을 추가로 획득하여 13척의 전선과 초탐선 32척을 수습하여 왜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이렇게 작은 규모의 함대세력을 지휘하여 9월 16일 왜 수군의 133척 함대를 명량해협 너머 우수영 앞바다에서 격퇴시키고 왜군의 서해 진입을 차단한 뒤 계속해서 수군의 재건활동을 추진하였던 것이다.
명량해전 이후 수군재건에 있어 이순신이 당면한 문제는 병력의 충정과 군량 확보, 그리고 함대의 월동준비 등이었다. 명량해전 이전에는 잔여 전선을 운용하던 격군과 사부를 토대로 과거 이순신 휘하의 장병들이 다시 모여들어 전선의 전투력을 증강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명량해전 이후에도 계속되어 이순신 휘하로 자원해서 모여든 장병들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자원하여 편입되는 군사들 이외에도 이순신은 장수들을 파견하여 병력을 모집하도록 하였는데 이런 활동을 통해 확충된 병력은 『이충무공전서 』의 부록 「기실 」과 『징비록 』의 기록을 종합해 볼 때 명량해전 전후로 1500여 명이던 병력이 1598년 2월 17일 고금도로 이진할 때에는 두 배 이상 증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명량해전 이후부터 노량해전 사이의 기간에 증강된 함선의 수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다만 노량해전 이후 실록의 기록을 토대로 추정해 볼 근거는 있다. 노량해전이 발발하기 전에 조명 연합군은 울산, 사천, 순천 등 남해안 일대에 웅거하고 있는 왜군을 격퇴시키기 위해 육로 3개 경로와 수로 1개 경로 등 사로병진(四路竝進)으로 공격하기로 하였다. 사로병진 작전에 참가하는 명나라 병력은 모두 92,100명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조선군은 모두 20,985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명수군은 19,400명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특기할 것은 조선 수군의 수가 7,300여 명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명량해전 직전의 약 2,000명의 수준에서 무려 5,300여 명이 늘어났다는 것을 보여준다.
<표> 사로병진 작전 시 조명연합군의 병력현황
이를 전선 척수로 계산하기 위해 명량해전 때 13척의 판옥선을 보유했을 때와 비교해 본다면(판옥선의 정원을 평균 130명으로 추산할 경우) 7,300여 명의 수군이 승선하려면 모두 56척의 판옥선을 보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판옥선 정원을 완전히 채웠을 경우에 해당된다. 실제로는 판옥선 정원을 채우지 못했을 것으로 보며 無軍船도 일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이 때 조선수군의 전선은 약 70척 정도로 추산된다. 명량해전에 동원된 13척의 전선을 1년이 채 되지 않는 기간에 5배 정도에 이르는 수준으로 증강하였던 것이다.
국방개혁 의지의 중요성
국방개혁은 국방을 담당한 부서만의 책임은 결코 아니다. 현대의 군대가 당면한 국방개혁은 군사력 건설뿐만 아니라 군사력의 운용을 포함한 제도 전반에 걸쳐 군대의 제 분야에 대한 혁신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국방개혁은 군 통수권자를 포함한 범정부적 지원과 국회의 도움이 없이는 추진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국방개혁 중 전력을 증강하는 문제는 특히 많은 예산이 투입되는 부담이 있어 국가의 경제 발전이라는 큰 틀에서 고려되다 보니 늘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당면한 북한의 위협뿐만 아니라 통일 이후의 주변국 위협에 대비해야 하는 국방 담당자들은 고민이 클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로 국방개혁을 통한 군사력의 증강은 의지의 문제로 귀결되는 경향을 보인다. 국방을 담당하는 관계자를 포함한 정부와 정부의 정책을 법률적으로 지원하고 감시하는 국회가 과연 국가의 방위를 위한 전력의 증강을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지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앞에서 이순신의 수군 전력 증강에 대한 사례를 제시한 이유는 개인적인 노력의 중요성을 논하려고 한 것이 아니다. 조선의 조정이 투입할 예산도 없이 괜한 간섭만 하는 조정을 향해 불만을 토로하기보다는 자신의 증력 범위 안에서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는 자세를 본받으면서 중앙정부와 국회가 과연 그러한 의지가 있는지 묻고자 하는 의도였다. 의지는 한 사람으로부터 출발하지만 만 명이 같은 의지를 가지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소망을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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