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호(10-11월) | 영국‧프랑스 전쟁 해전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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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조덕현(충남대학교) 작성일18-11-21 09:42 조회5,218회 댓글0건본문
영국‧프랑스 전쟁 해전에 관한 연구
조덕현
충남대학교
1. 전쟁의 배경과 경과
프랑스는 여러 차례 전쟁의 결과로 인해 국력이 약화되었고 국정이 혼란해졌으며, 그 여파로 프랑스혁명이 발발하였다. 영국과 프랑스의 패권 투쟁은 미국독립전쟁American Revolutionary War, 1775~1783에 이어 프랑스혁명전쟁Wars of French Revolution, 1792~1799과 나폴레옹전쟁Napoleonic War, 1799~1815으로 계속 이어졌으며, 영국 해군과 프랑스 해군의 해양전쟁도 지속되었다.
1789년에 프랑스에서 시민계급을 선두로 절대주의 아래의 구제도Ancien Régime를 타파하고 자유와 평등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혁명이 발발하였다. 프랑스혁명의 근본적인 원인은 구제도의 모순에 있었지만, 여기에 오랜 전쟁으로 인한 재정의 결핍과 미국의 독립이 영향을 미쳤다. 루이 16세Louis ⅩⅥ, 재위 1774~1792가 처형되고 혁명이 급진전되자 영국을 비롯한 유럽 제국이 혁명의 파급을 우려해 1793년 2월에 제1차 대 프랑스 동맹을 결성하고 프랑스를 공격하였다.
1796년에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이 이탈리아를 평정하고 1797년에 오스트리아를 굴복시켰다. 그리하여 제1차 대 프랑스 동맹이 붕괴되고 영국만이 적대국으로 남았다. 파리에 개선한 나폴레옹이 총재정부directory에 진언하여 이집트 원정을 감행하였다. 이집트 원정은 영국과 인도의 교통선을 단절시켜 영국의 인도 지배를 방해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1789년에 나폴레옹은 약 40,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에 상륙하여 이집트를 정복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가 나일강 해전Battle of Nile에서 영국 함대에게 패전하자, 나폴레옹은 단신으로 이집트를 탈출하여 귀국한 다음 총재정부를 타도하고 스스로 제1통령이 되었다.
이때 영국은 오스트리아 등 유럽 제국과 제2차 대 프랑스동맹을 조직하고 프랑스를 공격하였다. 정권을 장악한 나폴레옹은 인기를 지속할 필요가 있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지족적인 정복이 필요하였다. 나폴레옹은 1802년에 종신통령이 되었으며, 1804년에는 국민투표에 의하여 황제가 되었다. 나폴레옹의 대륙정책의 목표는 영국의 세계 제패를 탈취하는 데 있었으며, 영국 또한 나폴레옹의 대륙 제패를 간과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1805년에 영국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를 부추겨 제3차 대 프랑스동맹을 결성하였다. 나폴레옹은 영국 본토 침공을 시도하였으나, 1805년에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가 트라팔가르 해전Battle of Trafalgar에서 넬슨함대에 패함에 따라 나폴레옹의 영국 침공 계획은 좌절되었다.
1805년 12월에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아우스테를리츠 전투Battle of Austerlitz에서 대패하자 제3차 대 프랑스동맹이 와해되었다. 그러나 해양력을 바탕으로 끝까지 저항하는 영국을 무력으로 굴복시킬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한 나폴레옹은 경제 봉쇄로 영국에 타격을 주기 위해 1806년 11월에 소위 베를린 칙령Berlin Decree으로 대륙체제Continental System를 선포하여 대륙제국이 영국과 통상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이 대륙체제로 인해 영국도 타격이 컸지만, 유럽 제국 역시 타격을 받게 되었으며 결국 러시아가 대륙체제를 위반하고 영국과 통상을 재개하였다. 이에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응징하기 위해 1812년에 대규모 원정을 감행하였으나 오히려 대패하였다.
나폴레옹의 몰락을 가져온 것은 러시아 원정의 실패와 민족주의의 저항 때문이었다. 먼저 스페인에서 민족주의의 저항이 일어났는데, 나폴레옹이 「스페인의 궤양Spanish Ulcer」이라고 불렀던 이베리아 반도전쟁The Peninsular War, 1809~1814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스페인에서 나폴레옹의 통치에 반항하는 스페인 국민의 게릴라전이 전개되었고 영국을 비롯한 동맹군이 게릴라전을 지원하였다. 반도전쟁에서 프랑스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자신의 군사자원만을 소모하였다. 반도전쟁을 통해서 해양력의 중요성이 다시 한 번 부각되었는데, 영국은 제해권을 바탕으로 웰링톤Duke of Wellington 장군이 지휘하는 원정군을 상륙시켜 반도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으며 결국 승리를 거두었다.
1813년에 영국과 프러시아가 주축이 되어 제4차 대 프랑스동맹을 결성하고 나폴레옹을 공격하였다. 동맹군은 1814년 봄에 파리를 점령하고 나폴레옹을 엘바Elba 섬에 유배시켰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1815년 2월에 엘바 섬을 탈출하여 황제에 복귀한 후 동맹군이 프랑스를 침공하였으며, 나폴레옹은 초기에는 선전분투하였으나 결국 1815년 6월에 워털루 전투Battle of Waterloo에서 패전하여 대서양의 고도인 세인트 헬레나St. Helena 섬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이렇게 하여 무려 126년에 걸친 영국‧프랑스 전쟁이 종결되었다.
2. 주요 해전
가. 세인트 빈센트갑 해전Battle of Cape Saint Vincent
1796년에 스페인이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영국에 대항하였으며, 그해 3월에 나폴레옹이 지휘하는 프랑스 육군이 이탈리아에 침공하여 승승장구하였다. 이러한 정세 때문에 영국은 지중해에서 함대의 근거지를 상실하였다. 그리하여 영국함대는 지중해에서 철수하여 리스본을 새로운 근거지로 정하였다. 당시 영국의 지중해함대 사령관 저비스John Jervis 제독은 스페인함대를 찾아 공격할 것을 결심하였다. 이렇게 하여 발생한 세인트 빈센트갑 해전은 즉각적으로 전략적 영향이 나타났다는 점과 넬슨 제독의 용맹성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는 점에서 유명하다.
1797년 2월 14일 새벽에 코르도바de Cordoba 제독의 지휘 하에 있던 스페인함대의 전열함 27척이 지중해로부터 대서양 연안의 카디즈Cadiz를 향해 항해하고 있었다. 스페인함대는 야간에 다소 무질서한 진형을 이루며 2개의 함선군으로 분리된 상태로 항해하고 있었는데, 20척은 풍상 쪽에 위치해 있었으며, 나머지 7척은 풍하 쪽에 위치하여 첫 함선군과 7마일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었다.
15척의 전열함으로 구성된 강력한 영국함대는 저비스 제독의 지휘 아래 2열 종렬진을 형성하여 남쪽으로 항진하고 있었다. 저비스의 기함 빅토리HMS Victory는 우측 종렬진의 제7번함 위치에 있었으며, 컬로덴HMS Culloden이 우측 종렬진의 선두함이었다. 당시 제독Commodore의 직위에 있던 넬슨이 승조한 캡틴HMS Captain이 좌측 종렬진의 후미로부터 세번째에 위치해 있었다. 콜링우드Cuthbert Collingwood가 승조한 엑설런트HMS Excellent가 좌측 종렬진의 맨 마지막 함이었다.
여명에 저비스 함대는 무질서한 진형으로 항해하고 있던 스페인함대의 두 함선군을 발견하였다. 저비스는 둘로 분리된 스페인함대가 합류하기 전에 분리된 스페인함대 사이로 진출하기 위해 예하 함선에게 좌측 종렬진이 우측 종렬진 후미에 정렬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단종렬진을 형성한 영국함대는 컬로덴이 선두함, 엑설런트가 후미함 그리고 사령관의 기함이 중앙에서 약간 전방에 위치한 진형으로 항진하였다.
10:45시경에 영국 전열의 선두함은 여전히 무질서한 상태로 항진하는 스페인함대의 주력에 거의 접근하였다. 한편 스페인 함선 2척이 풍하 쪽으로부터 주력과 합류하려고 접근하는 7척과 상봉하려고 전속력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영국함대는 스페인함대 사이로 통과한 후에 종전으로 변침하여 그동안 북쪽으로 침로를 유지하고 있던 스페인함대의 주력이제 18척으로 감소됨 쪽으로 향했다. 스페인함대의 나머지 함선군이제 9척으로 증가됨은 영국 전열의 주위를 돌아 주력과 재 합류하기 위해 기동하기 시작하였다.
13:00시경에 영국함대가 스페인의 주력을 추격하고 있는 동안 영국 전열의 절반은 이미 북쪽으로 침로를 취했으나, 나머지 반은 여전히 남쪽을 향해 원래의 침로를 유지하고 있는 상태에 있었다. 이때 넬슨은 코르도바가 풍하 쪽에 위치한 9척의 함선에 접근하여 합류할 의도 아래 동쪽으로 재빨리 이동하려는 것을 간파하였다. 만약 사태가 그렇게 된다면 15척의 영국 함선은 모두 합류한 27척의 스페인 함선과 교전해야 될 입장이었다.
<그림 1> 세인트 빈센트갑 해전
그리하여 넬슨은 지시를 기다리거나 요청하지도 않고 자신의 기함인 캡틴HMS Captain 함장에게 변침하여 스페인함대의 주력에 접근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러자 콜링우드도 넬슨의 행동을 뒤따랐다. 그리하여 캡틴과 엑설런트 2척은 순식간에 스페인 함선 가운데 가장 크고 강력하게 무장한 함선 2척과 최단거리에서 접전하게 되었다. 넬슨의 예상치 못한 기동이 코르도바로 하여금 그대로 침로를 북쪽으로 유지하도록 하였다. 캡틴과 엑설런트가 스페인 함선과 접근전을 벌임에 따라 스페인 함선의 항진 속력이 늦추어졌다. 이러한 사태는 컬로덴을 선두로 열심히 추격하고 있던 영국함대의 전위에 시간을 벌어주었으며, 영국 함선들이 스페인 함선을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순식간에 스페인 함선 가운데 4척이 나포되었으며, 이 가운데 2척은 콜링우드의 지원을 받은 넬슨에 의해 나포되었다. 코르도바는 현장을 이탈하여 카디즈 방면으로 간신히 탈출하였다. 접근전을 전개하는 동안 풍하 쪽에 위치해 있던 스페인 함선 9척이 주력과 재합류하였기 때문에, 저비스도 더 이상 스페인함대에 대한 추격을 감행하지 않았다. 영국함대는 수적으로 열세하였기 때문에 손상을 피할 수가 없었다. 영국함대에서 크게 손상을 입은 함선은 가장 격렬한 전투를 벌였던 캡틴과 엑설런트였다.
세인트 빈센트갑 해전에서 저비스 제독이 스페인함대를 격파함으로써 영국함대는 다시 지중해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영국함대가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지휘관의 신속한 판단력, 왕성한 공격정신 그리고 우수한 전투 자질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저비스가 종렬진에서 함대의 선두함을 따르도록 한 명령에 복종하지 않고 자신의 독자적 판단에 의해 진형을 이탈한 넬슨의 행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나. 나일강 해전Battle of Nile
1798년 5월 19일에 나폴레옹이 이집트로 원정하기 위해 40,000명의 병력과 2,000문의 포를 탑재한 400척의 수송함대를 이끌고 툴롱 항을 출항하였다. 프랑스의 브뤼스Francois Paul Brueys 제독이 지휘한 지중해함대가 이 원정군을 호송하였다. 원정군은 6월 9~19일 몰타Malta를 경유하여 7월 1일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하였다.
당시 영국 해군은 영국해협, 브레스트, 스페인의 서해안 항구 그리고 지중해의 툴롱 부근에 분산 배치되어 있었다. 이때 넬슨은 툴롱에 주둔하고 있던 봉쇄함대를 지휘하고 있었는데, 넬슨이 종종 원거리 봉쇄distance blockade를 실시했기 때문에 나폴레옹의 수송 선단이 은밀히 봉쇄망을 돌파하여 탈출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의 탈출을 알게 된 넬슨은 즉시 추격을 시작하였다. 넬슨은 전 지중해 해역을 두 번이나 수색한 끝에 8월 1일 오후 나일 강 하구의 아부키르 만Aboukir Bay에 정박 중인 브뤼스함대를 발견하였다.
브뤼스는 13척의 전열함과 4척의 프리깃함을 보유하였으며, 기함은 120문의 포를 장착한 오리엔트Orient 함이었다. 프랑스함대는 모두 1,200문의 포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많은 승조원들이 식수를 구하기 위하여 상륙하였기 때문에 현측 포에도 인원을 제대로 배치할 수 없었다. 프랑스함대는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모두 선수 닻을 내려 일렬로 정박하고 있었다. 선두함 게리어Guerrier가 아브키르 섬 바로 남쪽에 투묘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 함선이 프랑스 전열과 육지 사이로 접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8월 1일 14:00시경 넬슨이 전열함 14척포 1,000문을 지휘하여 아부키르 만 입구에 나타났다. 그런데 2척은 알렉산드리아 근해에 있었기 때문에 아직 그곳에 도착하지 못했고, 컬로덴이 아부키르 섬 근해에 좌초되어 역시 전투에 참가하지 못했다. 따라서 넬슨은 전열함 11척으로 전투를 수행하였다.
<그림 2> 나일강 해전
넬슨의 예하 함장들은 어떻게 전투를 수행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즉, 영국함대는 1번함이 프랑스의 1번함 바로 옆에 선미 닻으로 접근하여 교전하면, 제2번함이 반대편 현측으로 접근하여 프랑스의 1번함과 2번함 사이에 접근하여 양측을 협공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여 2척이 1척을 공격하면서 공격 표적을 점차 앞으로 옮긴다는 것이었다.
16:30시에 영국함대의 선두함 골리앗HMS Goliath이 프랑스 전열과 육지 사이로 과감히 파고들어 접근하였으며 4척이 그 뒤를 따랐다. 넬슨의 기함 뱅가드HMS Vanguard와 다른 함선들은 외해 쪽에서 프랑스 전열에 접근하였다. 이리하여 프랑스의 전위와 주력함대는 영국 함선으로부터 치명적인 협공을 받았다. 20:00시경에 영국의 벨러로폰HMS Bellerophon이 오리엔트Orient 맞은 편에 닻을 내리고 포격을 가함에 따라 오리엔트는 22:00시경에 폭발하였다. 이 무렵에 영국함대는 이제 도착한 2척이 합세하여 프랑스함대의 중위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약 1시간 후에 프랑스 전열함 2척이 항복하고 다른 2척이 좌초되었다.
8월 2일 03:00시경에 영국 함선은 그때까지 전투에 가세하지 않은 프랑스함대의 후위를 공격하였다. 후위전대의 빌뇌브Pierre Villeneuve 제독은 전위를 지원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가 전열함 2척과 프리깃함 1척을 이끌고 황급히 도주하였다. 나머지 프랑스 함선들은 모두 영국함대에 제압당했다. 나일강 해전일명 아부키르 해전에서 프랑스함대가 당한 손실은 막대하였다. 프랑스함대의 손실은 전열함 11척, 프리깃함 2척, 전사자 1,700명, 부상자 1,500명 그리고 포로 3,000명에 이르렀다. 반면에 영국함대는 몇 척이 심한 손상을 입었으며, 1,000명의 전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영국함대는 프랑스 전열함 6척을 전리품으로 획득하였다.
나일강 해전은 해군전술 측면에서도 탁월한 작전이었을 뿐만 아니라, 상당한 전략적‧정치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이집트의 프랑스군이 본국으로부터 차단되어 고립되었고, 영국이 다시 지중해를 지배하게 되었다. 또한 영국은 프랑스에 대해 동맹을 재결성할 수 있게 되었다. 1799년 10월에 나폴레옹은 프리깃함 1척으로 이집트를 탈출하여 귀국한 후 쿠데타를 일으켜 프랑스의 제1통령이 되어 사실상 독재자가 되었다. 이집트에 고립된 프랑스 군은 1801년 아부키르 만에 상륙한 영국군에게 항복하였다.
다. 코펜하겐 해전Battle of Copenhagen
전쟁이 진행될수록 해전은 점차 봉쇄전의 양상으로 변해 갔다. 프랑스, 스페인과 네덜란드의 주요 항구인 브레스트, 툴롱, 카디즈 및 덴헬더Den Helder 등이 모두 영국함대에 의해 봉쇄되어 프랑스와 그 동맹국 함대의 제반 활동이 감시당했다. 중립국 선박도 영국함대의 정선 명령을 받고 전시금수품 적재 여부를 조사받았다. 이렇게 되자 프랑스의 무역이 거의 마비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런데 1801년 2월에 러시아의 황제 바울 1세Paul I의 주도 아래 러시아, 덴마크, 스웨덴 및 프러시아가 영국의 적대행위로부터 그들의 상선해운을 방호하기 위해 북유럽 무장중립Armed Neutrality of the North을 결성하였다. 그러자 영국은 덴마크를 무장중립에서 탈퇴시키기 위해 파커Sir Hyde Parker 제독의 지휘 아래 1개 함대를 발틱해에 파견하였다. 파커의 차석 지휘관은 넬슨 중장이었다. 파커는 23척의 전열함과 11척의 프리깃함 그리고 23척의 기타 함선을 인솔하여 코펜하겐 입구인 사운드해협에 도착하였다.
덴마크는 영국함대의 공격을 예상하고 사전 준비를 하였다. 코펜하겐의 수로는 사운드해협의 얕은 수심과 섬들 때문에 매우 복잡하며, 미들 그라운드 사주Middle Ground Shoal로 인해 해협은 킹스해협King’s Channel과 외측해협Outer Channel으로 나뉘어졌다. 킹스해협으로 통하는 북쪽 입구에는 강력한 트렉로너Trekroner 요새가 코펜하겐 항의 입항을 제압하고 있었으며, 남쪽 입구에는 2척의 전열함, 1척의 프리깃함, 8척의 방어함defense ship 및 7개의 해상포대 등으로 구성된 방어부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이 가운데 방어함은 낡은 전열함과 프리깃함으로 구성되었다. 전열함 단네브로그Dannebrog에 위치한 피셔Olfert Fischer 준장이 코펜하겐 방어부대를 지휘하였다.
파커가 넬슨으로 하여금 덴마크함대를 공격하도록 명령하자, 넬슨은 12척의 전열함과 5척의 프리깃함 그리고 19척의 기타 함선들을 이끌고 트렉로너 요새를 피하기 위해 남쪽으로부터 공격하기로 결심하였다. 4월 1일 야간에 넬슨은 공격부대를 이끌고 외측해협을 통해 사운드해협을 통과한 후 남풍을 기다렸다. 나머지 영국 함선들은 미들 그라운드 사주 북쪽에서 대기하였다.
<그림 3> 코펜하겐 해전
4월 2일 09:00시경에 바람의 방향이 바뀌자 넬슨은 공격을 개시하였다. 전열함 1척이 사주에 좌초되었지만, 나머지 함선들은 덴마크 함선으로부터 약 500미터 떨어진 곳에 닻을 내렸다. 영국 공격부대가 600문의 포, 60문의 캐로네이드carronade 그리고 9,000명의 병력을 보유한 반면, 덴마크 방어부대는 370문의 포와 6,000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10:00시부터 격렬한 전투가 시작되었는데, 덴마크 방어부대는 완강하게 저항하였다. 13:00시경에 이르러 영국 전열함 3척이 심하게 파손되어 트렉로너 근처에 좌초되었다. 13:30시에 파커가 자신의 기함에 「전투중지」 신호기를 게양했지만, 이미 파손된 함선을 이끌고 트렉로너를 거쳐 수로를 무사히 빠져나가기 어렵다고 판단한 넬슨은 이 신호를 무시하였다. 이전에 한쪽 눈을 잃은 넬슨은 짐짓 보지 못하는 눈 쪽에 망원경을 대고, “폴리Foley 함장, 원래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 내가 가끔 잘 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정말 아무 신호도 보이지 않구만.” 하면서 전투를 계속하였다.
2시간의 전투를 더 치르고 난 15:00시경에 11척의 덴마크 함선이 항복하였고, 넬슨은 위험한 현재의 위치로부터 무사히 이탈하기 위해 덴마크 측에 휴전을 제의하였다. 덴마크 측이 휴전을 받아들이자 넬슨은 파손된 함선을 이끌고 트렉로너를 안전하게 통과하였다. 이 해전에서 덴마크 후위전대는 15척의 함선을 잃었으며, 1,000명이 전사 또는 부상당하고 2,000명이 포로가 되었다. 영국 전위전대에서는 1,200명의 전사자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해전이 끝난 후 덴마크는 러시아의 바울 1세의 암살에 영향을 받아 영국의 요구에 동의하여 무장중립동맹에서 탈퇴하였다. 한편, 파커의 뒤를 이어 발틱해의 영국함대를 지휘하게 된 넬슨이 러시아함대를 공격하기 위해 레발Reval, 에스토니아 연안로 향했는데, 러시아함대는 이를 미리 알고 크론스타트Kronstadt로 도주해버렸다. 그러나 결국 그해 6월에 러시아도 영국의 요구에 동의함에 따라 무장중립이 와해되었다. 이와 같이 넬슨은 무력을 동원함으로써 영국에 외교적 승리를 안겨주었다.
라. 트라팔가르 해전(Battle of Trafalgar)
1803년부터 나폴레옹은 도버해협 연안의 불로니Boulogne에서 영국 침공을 준비하였다. 130,000명의 지상군이 집결하고 2,000척의 수송선이 준비되었다. 이러한 나폴레옹의 침공 준비에 대응하기 위해 영국 해군은 프랑스와 그 동맹국인 스페인과 네덜란드의 주요 항구에 대해 함대봉쇄를 가했다. 1805년 3월 당시 양측의 전열함 배치는 <표 1>과 같다.
<표 1> 양측의 전열함 배치
항구 - 해역 | 프랑스 - 동맹국 | 영국 |
Texel | 6 | 11 |
Brest | 21 / Ganteaume | 25 / Cornwallis |
Ferrol | 23 | 10 |
Cadiz | 15 / Gravina | 6 |
Toulon | 11 / Villeneuve | 13 / Nelson |
기타 | 12 | 9 / 본토예비 |
계 | 88척 | 74척 |
해협을 횡단하기 위해서는 전투함대의 엄호가 요구되었기 때문에, 프랑스 각 항구에 분산된 전대들이 봉쇄를 돌파하고자 시도하였다. 1805년 3월에 빌뇌브가 6척의 전열함을 이끌고 툴롱을 빠져나와 카디즈에서 스페인의 그라비나Federico Gravina 전대와 합류한 다음 서인도제도로 향했다.
나폴레옹은 영국을 침공하기 위해 프랑스함대의 주력을 서인도 해역에 출동시켜 영국함대를 그 방면으로 유인한 다음 프랑스함대의 엄호 아래 영국해협에 진출하려는 대계획Grand Design을 수립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함대가 서인도 해역에서 돌아와 영국해협에 진출하려고 시도하였으나, 해협을 통제하는 영국함대의 존재로 인해 해협 진출을 포기하고 다시 지중해로 향하던 중에 1805년 10월 21일 트라팔가르Trafalgar 근해에서 프랑스함대를 추격하던 넬슨함대와 조우하여 전개된 해전이 트라팔가르 해전이었다.
10월 19일 오전에 빌뇌브 제독이 지휘한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가 지중해로 진입하기 위해 카디즈를 출항하였다. 연합함대는 전열함 33척프랑스 18척, 스페인 15척, 프리깃 함 5척, 포 3,000문을 보유하였으며, 승조원은 30,000이었다. 한편, 프리깃함 전대로부터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의 동향에 관하여 보고를 받은 넬슨 제독은 즉시 연합함대의 지중해 진입을 저지하기 위하여 출항하였다. 넬슨 함대는 전열함 27척, 프리깃함 4척, 포 2,500문을 보유하였고, 승조원은 20,000명이었다.
그 다음 날인 10월 20일, 빌뇌브함대는 남서풍을 받으며 지브롤터해협에 접근하고 있었다. 즉 그들은 거의 역풍을 받으며 남남동 방향으로 항진하고 있었다. 반면에 연안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던 넬슨함대는 빠른 속력을 낼 수 있는 유리한 풍향에 위치하여 빌뇌브를 추월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일과 21일 야간에 넬슨은 연합함대를 발견하지 못하고 추월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만약 적 함대가 변침하였다면 자신이 풍하 쪽에 위치할 수도 있는 불리한 점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해 속력을 줄였다. 21일 오전에 양측 함대는 모두 트라팔가르갑 근해에 위치해 있었다.
빌뇌브는 영국함대가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를 위협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자 변침하여 북상하였다. 빌뇌브가 카디즈로 귀항하려고 하였을 때, 풍향이 서북서풍으로 바뀌었다. 이때 넬슨은 선미에서 바람을 받으며 복종렬진으로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를 향해 변침하였다. 넬슨은 좌측 종렬진12척 즉 풍상 쪽 전열의 선두함인 빅토리HMS Victory에 승함하고 있었으며, 로열 서버린HMS Royal Sovereign에 승함한 콜링우드는 우측 종렬진15척을 선도하고 있었다. 두 종렬진의 간격은 약 1마일이었다. 11:35시에 넬슨은 「영국은 각자가 자신의 의무를 다할 것을 기대한다.England expects that every man will do his duty.」라는 유명한 신호기와 함께 「더욱 접근해서 적과 교전하라.」는 신호기를 게양한 후, 그의 비망록에서 강조했던 구상에 따라 적 진형의 중앙을 향하여 예하의 전열을 진출시켰다. 빅토리HMS Victory는 바로 빌뇌브의 기함 뷔상또르Bucentaure를 향해 돌진하였으며, 뷔상또르의 선미를 살짝 스치듯 통과하면서 현측 일제사격을 가하였다.
<그림 4> 트라팔가르 해전
한편, 콜링우드는 연합함대 후위의 선두 즉, 스페인의 그라비나 제독의 차석 지휘관인 알라바Ignacio Maria de Alava 제독의 기함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넬슨을 뒤따르던 함선들은 연합함대 전열의 중위에 있는 다른 함선들을 공격하였다. 이에 콜링우드 예하의 함선들도 산개하여 연합함대 전열의 후위에 대하여 일제히 공격하였다. 그러므로 영국함대의 전 함선이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의 일부분에 대하여 공격을 집중할 수 있었다. 이에 반하여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의 전위는 빌뇌브의 신호에도 불구하고 적시에 전투현장에 도착하지 못했다.
13:30시경에 넬슨 제독은 뷔상또르를 뒤따르고 있던 리다우터블Redoubtable에서 발사한 총탄에 맞아 명예롭게 전사하였다. 그러나 전투는 맹위를 떨치며 17:30시까지 계속되었다. 마침내 프랑스‧스페인 함선 19척이 격침되거나 나포되었으며 빌뇌브도 생포되었다. 대패한 연합함대의 나머지 함선들은 황급하게 카디즈로 도주하였다. 연합함대는 2,600명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했으며 7,000명이 포로가 되었다. 영국함대는 전열함의 손실은 없었으나 전열함의 절반이 심한 손상을 입었으며 1,7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트라팔가르 해전의 패배로 인해 프랑스함대는 재기가 불능하게 되었으며, 영국을 침공하려던 나폴레옹의 계획은 무산되었다. 반면에 영국은 1588년에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퇴하면서 장기간 추구하던 해양패권maritime hegemony을 획득하였다. 트라팔가르 해전 이후 영국은 대 프랑스 봉쇄를 더욱 강화하였으며, 나폴레옹은 대륙체제로 이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일부 국가가 나폴레옹에 항거하여 영국과 내통하였기 때문에 나폴레옹의 대륙체제도 끝나고 말았다.
3. 해전의 의의 및 승패요인
프랑스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에서도 영국 해군과 프랑스 해군의 대결은 계속되었다. 영국 해군은 프랑스의 주요 항구에 함대봉쇄를 가하여 프랑스 해군의 활동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려고 하였으며, 프랑스 해군은 영국에 대해 통상파괴전을 수행하였다. 영국을 침공하려던 나폴레옹의 야망은 영국해협을 통제하고 있던 영국함대의 존재로 인해 끝내 좌절되고 말았다.
126년간에 걸친 영국과 프랑스의 해양전쟁에서 대미를 장식한 것이 트라팔가르 해전이었다. 이 해전에서 넬슨 제독은 범선시대의 전형적인 해전 양상인 병항진을 선택하지 않고 직각으로 적 전열의 중앙을 돌파하여 부분적 우세를 유지하여 전과를 확대하고 승리를 거둠으로써 범서시대 전술의 절정을 보여주었다. 그리하여 이 해전은 영국과 프랑스 해양전쟁에 종지부를 찍었으며, 영국이 전 세계의 해양패권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아가 영국은 제해권을 바탕으로 세계 곳곳에 해외 식민지를 경영하며 국위를 떨쳤으며, 그 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1세기 동안 「영국 지배 하의 평화Pax Britannica」를 유지할 수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해양전쟁에서 이러한 결과가 나타난 영국의 승인을 살펴보면, 첫째, 영국은 상대국보다 항상 우세한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둘째, 영국 해군은 프랑스 해군을 상대로 공세적으로 함대를 운용하였다. 그리하여 영국 해군은 전략적으로는 프랑스 해군의 활동을 원천적으로 봉쇄하였고 전술적으로는 전투에서 프랑스 해군을 압도하였다. 셋째, 영국은 뛰어난 해군 지휘관들을 보유하였다. 제해권의 의미를 잘 이해하고 있었던 저비스, 넬슨 및 콜링우드와 같은 훌륭한 지휘관들이 항상 공세적 작전을 추구하고 적의 함대를 격파하기 위해 왕성한 공격 정신과 전술적 우세를 추구하였다. 넷째, 영국 해군이 통솔, 사기, 훈련 및 의지력 면에서 뛰어났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프랑스의 패인을 살펴보면, 첫째, 프랑스의 해군력이 약화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프랑스 해군은 혁명 전에 근무하던 장교의 약 80%가 전역하였고, 후임자들은 경험과 훈련이 부족하였으며 조선소와 병기공장은 열악한 상태에 있었다. 또한, 영국 해군의 봉쇄로 말미암아 프랑스 해군은 함선용 자재의 획득에도 곤란을 겪었다. 둘째, 프랑스는 해군력의 집중에 있어서 지리적으로 불리하였다. 프랑스는 주로 브레스트에 기지를 둔 대서양함대와 툴롱에 기지를 둔 지중해함대로 해군을 분할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영국이 장악한 지브롤터와 영국해협이 프랑스함대의 집중을 방해하였다. 셋째, 프랑스 해군은 수세적 전략과 전술을 추구하였다. 넷째, 영국에 대한 프랑스의 대륙체제와 통상파괴전이 효과적이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프랑스 해군은 정신전력이 부족하였다. 나일강 해전에서 프랑스 함대는 한 달간의 정박으로 인해 승조원들이 무기력에 빠져 안일한 생각에 젖어 있었다. 그리고 프랑스의 해군 지휘관은 정신력에서 이미 패배하였는데, 예를 들면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를 지휘했던 빌뇌브 제독은 나일강 해전에서 넬슨함대의 가공할 공격을 받고 혼비백산해서 도주했던 후위전대 지휘관이었다. 그러한 빌뇌브는 트라팔가르 해전에 앞서 넬슨을 두려워하여 정신력에서 이미 패배해 있었던 것이다.
4. 교훈
● 제해권은 전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나폴레옹이 막강한 지상군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을 침공하지 못한 것은 영국 해군이 영국해헙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을 중단하고 귀국한 것 역시 나일강 해전에서 승리한 넬슨함대가 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프랑스 원정군의 해상교통로를 위협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이베리아반도 전쟁에서 영국과 그 동맹군이 승리한 것은 제해권을 바탕으로 한 해상교통로가 육상교통로보다 유리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 함대봉쇄는 적 함대의 집중과 연합을 방해하고 적의 해상 활동을 원천적으로 제한시키는 전략적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영국 해군은 나폴레옹의 침공계획에 대응하여 프랑스와 그 동맹국의 항구에 대해 공세적인 함대봉쇄를 가함으로써 그들의 집중과 연합을 방해하고 영국 해협에 대한 제해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반면에 프랑스와 그 동맹국 해군은 수세적 전략을 취하여 영국함대에 함대봉쇄를 허용함으로써 나폴레옹의 대계획을 무산시켰으며 이후 전쟁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 질서정연한 기동을 할 수 있는 함대만이 기동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평소에 훈련이 습관화된 함장만이 급변하는 상황에 적응할 수 있다. 범선시대의 영국함대는 전투지침서에 따라 엄격한 전열의 유지에 속박되어 있었다. 그러나 넬슨은 여러 해전을 통해서 전투지침서에 따른 기동의 굴레에서 벗어난 기동을 함으로써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며, 예하 함장들도 넬슨의 기대에 부응하여 나일강 해전의 양측 협공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적시에 기동과 전투의 기회를 포착하고 행동할 수 있었다. 실전에서 이러한 임기응변은 모두 평소에 끊임없는 교육과 훈련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 창의적인 전술은 적의 의표를 찌르고 전투 효과를 증대시킬 수 있다. 넬슨은 전통적인 병항전의 개념을 완전히 배제하고 쉬프랑과 로드니와 같이 독창적인 전술을 창안하였다. 넬슨이 적의 부분에 대하여 공격을 집중한다는 원칙 아래 독창적인 전술을 사용하여 적의 의표를 찌르고 승리한 해전이 나일강 해전과 트라팔가르 해전이었다. 이 두 해전에서 나타난 넬슨의 전술은 범선시대 전술의 백미였다고 할 수 있다.
● 창의적인 전술은 적용이 가능하도록 충분히 논의되고 구체화되어야 한다. 넬슨은 트라팔가르 해전에 앞서 9월 28일부터 10월 19일까지 20일 동안 카디즈 외해에서 자신이 원하는 전투계획에 대해서 부하 장교들과 토론하였다. 넬슨은 적을 접촉하였을 때, 신호의 필요성을 최소한으로 감소시키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10월 10일에 그는 부하들과 논의했던 전투계획을 마무리 짓고 비망록memorandum을 작성하였다. 넬슨이 그의 비망록에서 구상한 전투계획의 요지는 수적으로 우세한 적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의 한 부분에 대해 공격을 집중하는 것인데, 영국함대가 복종렬진으로 적 전열의 중앙을 직각으로 돌파한 후 적의 중위와 후위에 대하여 화력을 집중하고 적을 제압한다는 것이었다. 넬슨은 급변하는 전투 상황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전투 방법까지 함장들에게 교육하였다. 이처럼 넬슨은 그의 구상을 부하 함장들에게 충분히 교육하고 훈련을 통해 구체화하였다는 점에서 다른 제독들보다 훌륭했다고 볼 수 있다.
● 방심은 패배를 자초한다. 나일강 해전에서 프랑스함대는 한 달 동안의 정박으로 인해 무기력해지고 안일한 생각에 젖어 있었으며, 결국 많은 인원이 상륙하였기 때문에 겨우 한쪽 현측에만 전투요원을 배치할 수 있을 정도로 무방비 상태였다. 특히, 프랑스함대는 야간전투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이것은 프랑스함대는 항해 중 야간전투는 혼란을 초래하기 때문에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준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음 날 아침에 상륙한 인원이 모두 귀함하여 충분한 인원으로 전투를 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더욱이 사령관 브뤼스는 정박 중인 예하 함대의 전투 진형이 영국 함대가 침투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방비된 상태라고 과신하고 있었다. 반면에 넬슨은 두 달 동안 지중해를 정찰하면서 철저한 전투준비와 훈련을 실시했을 뿐만 아니라, 예하 함장들은 화력을 집중한다는 넬슨의 전투계획을 충분히 이해하고 실전에서 이행하였다. 더욱이 넬슨함대는 현측에 수평 조명등을 설치하고 프랑스함대의 예상과는 달리 야간전투를 준비했던 것이다.
<참고 문헌>
조덕현. 『세계사 속의 해전』. 서울: 신서원, 2006.
조덕현. 『해전사 속의 해전』. 서울: 신서원, 2010.
조덕현. 『전쟁사 속의 해전』. 서울: 신서원, 2016.
Richter, Florian. The Battle of Trafalgar 1805: Profile Models of Every Ship in Both Fleets (New York: Helion and Company, 2018).
Schon, Alan. Trafalgar: Countdown to Battle, 1803-1805 (London: Sharpe Books, 2018).
Char River Books. The Battle of the Nile: The History of the Decisive Royal Navy Victory that Trapped Napoleon in Egypt (New York: Char River Books,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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