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네덜란드 전쟁 해전에 관한 연구 > E-저널 2019년 ISSN 2465-809X(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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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저널 2019년 ISSN 2465-809X(Online)

제38호(4-5월) | 영국·네덜란드 전쟁 해전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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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조덕현(충남대학교 교수) 작성일19-05-15 10:24 조회1,54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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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네덜란드 전쟁 해전에 관한 연구

조 덕 현
충남대학교 교수


Ⅰ. 서 론

  스페인의 번영을 계승한 국가는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한 영국이 아니라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네덜란드였다. 네덜란드는 독립을 쟁취하였을 때 이미 무역을 전 세계에 확장하고 있었으며, 암스테르담이 유럽의 경제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네덜란드는 1602년에 동인도회사를 설립하고 이를 중심으로 중개무역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켜 나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1세기 전에 포르투갈이 장악했던 동방무역의 패권을 네덜란드가 장악하게 되었다.
  영국의 호국경 크롬웰Oliver Cromwell은 1651년 그 유명한 항해조례Navigation Act를 선포하였다. 이 조례에 의하면 영국과 그 식민지로부터 반입되는 상품은 영국 선박 또는 생산품 산지의 선박에 의해서만 수송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조례의 목적은 네덜란드의 중개상업에 타격을 가하기 위한 것이었다. 저지대 국가인 네덜란드는 자원이 빈약한 국가로서 국민의 생계를 해양에 의존하고 있었고 상선대가 국가의 동맥이었다. 항해조례로 인해 타격을 받게 된 네덜란드는 전반적으로 전쟁 준비가 되어 있기 않았지만 해군력에 의존하여 영국과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세 차례에 걸쳐 벌어진 영국-네덜란드전쟁Anglo-Dutch War, 1652~1674 : 이하 영란전쟁은 기본적으로 무역전쟁이었다. 따라서 전쟁은 주로 해전으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네덜란드의 생명선인 해상교통로는 영국해협을 통과하든지 아니면 스코틀랜드 북단을 돌아가도록 되어 있었는데, 두 항로는 영국 해군의 공격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따라서 네덜란드는 국가의 사활이 걸린 해상무역을 보호하기 위하여 대규모 선단호송함대를 조직하였는데, 이 선단이 바로 전투의 중심이 되었다. 그리고 네덜란드 연안에는 천수로와 사주가 많기 때문에, 네덜란드 함선은 흘수가 얕은 평저선으로 건조되었으며, 이들 함선은 대체로 영국 함선보다 크기가 작았으며 견고하지 못했다.
  양측 함대는 해상에서 조우하면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치열한 해전을 전개하였는데, 많은 해전 가운데 포틀랜드 해전Battle of Portland, 1653년 2월 28일~3월 2일, 로웨스토프트 해전Battle of Lowestoft, 1665년 6월 13일. 4일 해전 Four-days’ Battle, 1666년 6월 11일~14일 및 텍셀 해전Battle of Texel, 1673년 8월 11일 등은 격렬했던 해전으로 유명하다. 트롬프Martine Tromp 제독과 드루이터Michiel de Ruyter 제독이 지휘한 네덜란드 해군은 상선대를 보호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었지만 영국 해군과 많은 해전을 치르면서 전반적으로 호각지세를 유지하면서 선전분투하였다.
  제1차 영란전쟁1652~1654에서 영국함대는 네덜란드의 해상무역을 봉쇄하려고 하였으며, 이에 따라 네덜란드함대는 상선대를 보호하면서 영국함대와 해상에서 전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해전은 주로 영국해협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였다. 그러나 전쟁에서 지친 양국은 1654년 4월에 제1차 웨스트민스터 평화조약Treaty of Westminster을 체결하였는데, 네덜란드는 항해조례의 대부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양국의 평화조약은 일시적인 휴전에 불과하였다. 이후 제2차 영란전쟁1665~1667이 발발하였는데, 전쟁의 원인은 역시 무역을 둘러싼 해양패권 경쟁이었다. 제2차 전쟁에서 드루이터 제독이 지휘한 네덜란드 함대가 대체로 해전에서 우위를 유지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국력을 소모한 네덜란드가 휴전을 희망하여 1667년 8월에 양국은 브레다조약Treaty of Breda을 체결하였는데, 네덜란드는 뉴암스테르담New Amsterdam : 현재의 New York을 포기하고 미국 동부해안의 해상통제권을 영국에 양도하였다.
  제3차 영란전쟁1672~1674에서는 영국의 찰스 2세CharlesⅡ, 재위 1660~1685와 동맹을 맺은 프랑스의 루이 14세Louis ⅩⅣ, 재위 1643~1715 가 네덜란드를 공격하였다. 두 적대국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소국인 네덜란드는 육상에서는 막강한 프랑스 지상군의 공격을 받고 해상에서는 강력한 영국 해군과 전쟁을 수행하느라 위기를 맞게 되었다. 결국 네덜란드는 장기간의 전쟁으로 국력을 탕진하고 영국과 강화를 맺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네덜란드는 1674년 영국과 제2차 웨스트민스터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해양에서 영국의 우위를 인정하게 되었다.
  네덜란드가 영국과 강화를 체결하고 프랑스와 전쟁을 하는 동안 네덜란드가 지배했던 해상무역은 점진적으로 영국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더욱이 영란전쟁이 끝나고 15년 후에 네덜란드의 왕자 오렌지공 윌리엄William of Orange이 영국 왕William Ⅲ을 겸하게 됨에 따라 네덜란드 해군은 영국 해군과 병합하게 되었다.

 

Ⅱ. 주요 해전

  1. 포틀랜드 해전Battle of Portland, 1653년 2월 28일~3월 2일

 

  제1차 영란전쟁 기간에 발생한 포틀랜드 해전은 1653년 2월 28일부터 3월 2일까지 3일 동안 영국해협에서 진행되었다. 이 해전은 네덜란드의 트롬프 제독이 약 70척의 전투함을 지휘하여 상선대를 호송하고 항해하였을 때, 영국해협에서 초계하던 영국의 블레이크Robert Blake 제독이 역시 비슷한 세력의 전투함을 지휘하여 네덜란드의 상선대를 포획하기 위해 트롬프의 진로를 차단함으로써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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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포틀랜드 해전 당시의 주변국

 

양측 함대는 각각 3개 전대로 나누어 집단전투를 벌였다. 당시의 전술은 화력을 집중하여 적을 혼란으로 몰아넣고 상대방의 과오를 유도하는데 목표를 두고 있었다. 트롬프는 즉각 전대를 공격하였고, 드루이터 역시 블레이크 전대의 측면을 공격하여 트롬프를 지원하였다. 트롬프와 드루이터가 블레이크를 협공할 때 영국의 펜William Penn 전대가 트롬프 전대의 측면을 공격하였다. 한편, 네덜란드의 에베르센Johan Evertsen 전대가 멀리 떨어져 있는 영국의 몽크George Monk 전대를 공격하였다. 이와 같이 해전은 일정한 전투진형을 형성하지 않은 채 전대의 기함을 중심으로 집단 전투 즉, 난전melee으로 진행되었다.
  2월 28일에 라호그 갑Cape La Hogue 근해에서 시작된 전투는 해협을 따라 북동쪽으로 이동하면서 결정적인 승패없이 3월 2일까지 계속되었다. 트롬프는 선단을 본국으로 향하도록 조치하고 자신은 선단과 영국함대 사이에 위치하였다. 3월 2일 트롬프가 고군분투하는 가운데 탄약마저 고갈된 상태에서 전투가 종료되었다.
  이 해전에서 네덜란드 함대는 전투함 11척과 상선 30척 그리고 2,000명의 승조원을 잃었다. 그러나 트롬프는 선단의 대부분을 생환시킴으로써 그의 임무를 달성하였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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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 포틀랜드 해전도

 

  영국 함대는 전투함 1척을 상실하였지만 1,000명에 달하는 인명 피해를 보았으며 블레이크 자신도 중상을 입었다. 이 해전에서 영국 해군은 네덜란드 해군을 상대로 하여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포틀랜드 해전을 치른 후 영국의 블레이크, 몽크 등은 질서 있는 전투진형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그해 3월에 『전투지침서Fighting Instructions』를 작성하여 함대에 배포하였다. 전투지침서의 요지는 각 전대의 모든 전투함은 종렬진을 유지하고 전투하라는 것과 풍상을 점유해서 전투하라는 것이었다. 이후 전투지침서는 해전에서 매우 엄격하게 준수되었다.


  2. 로웨스토프트 해전Battle of Lowestoft, 1665년 6월 13일

  제2차 영란전쟁 기간인 1665년 6월 13일, 영국 남동해안에서 발생한 로웨스토프트 해전은 영란전쟁 시에 제해권 경쟁을 위한 가장 치열한 해전 가운데 하나였으며, 전투 중에 종렬진을 유지하는 원칙을 엄격하게 적용하면서 병항전을 전개한 해전이었다. 전투에 참가한 양측 함대는 각각 100척 이상의 함선으로 구성되었으며, 또한 화공선을 보유하였다. 영국왕 찰스 2세의 동생인 요크 대공Duke of York이 영국함대를 지휘하였다. 3개 전대로 편성된 영국함대는 전투함 53척, 무장상선 21척, 화공선 21척을 포함하여 총 109척으로 구성되었으며 4,200문의 포를 장착하였다.
  기병장교 출신인 오프담Wassnaer van Opdam이 지휘한 네덜란드함대는 전투함과 무장상선 103척, 화공선 11척과 소형선 7척으로 구성되었으며, 4,900문의 포를 보유하였다. 7개 전대로 편성된 네덜란드함대는 영국함대에 비해 수적으로 약간 우세하였으나, 전반적으로 전투함의 크기와 포의 구경이 작았다. 오프담은 내각으로부터 즉각 전투하라는 불가피한 명령을 받고 있었다.
  양측은 서로 풍상의 위치를 점유하려고 노력하였는데, 결국 풍상의 위치를 선점한 요크 대공이 유리한 위치를 끝까지 유지하였다. 영국함대는 네덜란드 함대의 종렬진에 대하여 평행이 되는 종렬진을 전개하였으며, 요크 대공은 두 번에 걸친 90˚ 회전 – 처음 1회는 접근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다음 1회는 종렬진으로 전개하기 위한 것이었다 – 을 성공적으로 집행하여 주도권을 장악하고 네덜란드함대를 압박하였다.
  오프담은 풍상의 위치를 점유하려던 기도가 수포로 돌아가자 영국 함대사령관을 나포하기 위하여 재빨리 자함을 영국함대에 접근시켜 공격하였다. 오프담 예하의 함선 4척이 영국 기함에 맹렬한 공격을 가하기 위하여 오프담의 기동을 따랐다. 그 순간부터 양측은 평행으로 항해하면서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다. 그때 네덜란드 함대의 차석지휘관인 코르테나에르Egbert Kortenaer 제독이 전사하였다. 그러자 코르테나에르가 승조했던 기함의 승조원들이 낙담한 나머지 전열의 유지를 포기하고 자함을 전열에서 이탈시키고 말았다. 이와 같이 네덜란드함대의 전열에 돌파구가 생기자, 영국함대의 차석지휘관인 샌드위치 경Earl of Sandwich이 이곳을 돌파하여 네덜란드 진형을 분리시켜 혼란을 가중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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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3> 로웨스토프트 해전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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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4> 로웨스토프트 해전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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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5> 로웨스토프트 해전도 3

잠시 후에 오프담의 기함에서 탄약고가 폭발하여 화염에 휩싸였고 오프담이 사망하였다. 둘로 분리된 네덜란드의 함선군은 영국 화선의 공격을 받아 다시 몇 척이 화염에 휩싸이면서 일대 타격을 받았다. 저녁 무렵에 에베르센과 트롬프Cornelius Tromp : 유명한 Martin Tromp 제독의 아들 제독이 패전한 네덜란드 함선을 수습하여 본국으로 안전하게 귀환하였다. 이 해전에서 네덜란드함대는 함선 17척을 상실하였으며 제독 3명을 포함하여 승조원 4,000명을 잃었다. 영국함대는 함선 2척을 상실하고 제독 2명과 승조원 800명을 잃었다.


  3. 4일 해전Four-Days’ Battle, 1666년 6월 11일~14일

  1666년 6월 11~14일, 영국과 네덜란드 함대는 제해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영국해협에서 4일 해전을 벌였다. 6월 11일 드루이터 제독이 지휘한 네덜란드함대가 영국함대를 공격하기 위하여 덩커크Dunkirk를 출항하였다. 전투함 84척으로 구성된 네덜란드함대는 포 4,600문을 보유하였으며 승조원 22,000명이었다. 드루이터가 주력함대를 지휘하였으며, 에베르센이 전위 그리고 트롬프가 후위를 맡았다. 이때 루퍼트는 20척을 이끌고 프랑스 함대를 감시하기 위하여 멀리 떨어져 있었다.
  11일 정오경에 몽크가 밀집된 종렬진으로 트롬프 전대를 공격하였다. 이때 투묘하고 있었던 네덜란드함대는 급히 닻줄을 끊고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응전하였지만 고전하였다. 16:00시경에 드루이터와 에베르센이 합류함에 따라 네덜란드함대가 우세를 확보하기 시작하였다. 오후 전투에서 에베르센이 전사하였으며, 드브리스de Vries가 뒤를 이어 전위를 지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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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6> 4일 해전도

 

6월 12일, 몽크가 나란히 항해하고 있던 네덜란드함대를 다시 공격하였다. 이때 영국함대가 47척, 네덜란드 함대가 77척이었다. 6월 13일이 되자 이제 30척 밖에 남지 않은 몽크는 테임즈 강으로 후퇴한 다음, 그날 오후에 루퍼트와 합류하였다. 6월 14일, 양측 함대는 다시 최후의 결전을 시도하며 서쪽으로 항진하였는데, 네덜란드 함대가 풍상에 위치하였다. 영국 함대의 전위와 중위 사이에 간격이 벌어지자 드브리스가 지휘한 네덜란드의 전위가 이 공백을 돌파하였다. 곧이어 트롬프가 후위를 이끌고 풍하 쪽으로 접근하여 영국함대의 중위와 후위를 협공하였다. 이때 드루이터가 다시 영국의 중위를 돌파하였다. 이제 둘로 분리된 영국함대는 심한 타격을 받고 마침내 전투를 포기하였다. 네덜란드함대 역시 탄약이 다 떨어졌기 때문에 귀향하였다.
  4일 해전에서 영국함대는 함선 17척을 상실하고 5,000명이 전사하였으며, 3,000명이 포로가 되었다. 네덜란드함대는 함선 6척을 상실하고 2,000명이 전사하였다. 이 해전에서 드루이터는 전술적인 면에서 승리하였지만 영국함대를 완전히 격파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드루이터는 영국 해협을 다시 통제하고 테임즈 강 하구를 봉쇄하여 한동안 영국 해군에게 치욕을 안겨주었다.


  4. 텍셀 해전Battle of Texel, 1673년 8월 11일

  제3차 영란전쟁 시에는 프랑스 왕 루이 14세가 네덜란드에 선전포고하였다. 네덜란드의 함대사령관 드루이터는 이제 영국함대와 신생 프랑스함대를 동시에 상대해야만 했다. 드루이터는 함대를 수심이 얕은 곳에 정박시켜 두었다가 기회가 포착되면 즉시 출동하여 공격을 감행하곤 하였다.
  1672년 6월 7일, 솔베이 해전Battle of Sole Bay에서 드루이터는 네덜란드 침공을 준비하던 영국‧프랑스 연합함대를 공격하여 그들의 상륙작전을 좌절시켰다. 1673년 6월 7일, 제1차 슌네벨트 해전Battle of Schooneveldt에서 드루이터는 연합함대의 침공 계획을 무산시켰으며, 6월 14일, 제2차 슌네벨트 해전에서도 드루이터는 영국·프랑스 연합함대를 다시 격퇴하여 연합군의 네덜란드 침공 계획을 분쇄하고 네덜란드의 선단을 안전하게 귀향시켰다. 솔베이 해전과 두 차례의 슌네벨트 해전은 드루이터의 전략‧전술적 승리라고 할 수 있다.
  1673년 8월 21일, 네덜란드 연안에서 벌어진 텍셀 해전은 영란전쟁 기간 동안에 일어난 마지막 해전이었다. 8월 21일, 루퍼트 왕자가 지휘한 영국‧프랑스 연합함대가 상륙작전을 엄호하기 위해 네덜란드 연안의 텍셀 섬으로 향하였다. 연합함대는 전열함과 프리깃함 90척, 화공선 30척으로 구성되었다. 네덜란드 함대는 전열함과 프리깃함 75척, 화선 30척이 있었다.
  연합함대에서는 루퍼트 왕자가 주력부대, 프랑스의 데스뜨레Jean Ⅱ d'Estrées제독이 전위 그리고 영국의 스프라지Edward Spragge 제독이 후위를 지휘하였다. 네덜란드함대에서는 드루이터가 주력부대, 뱅케르트Adriaen Banckert가 전위 그리고 트롬프가 후위를 각각 지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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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7> 텍셀 해전도

 

  해안과 연합함대 사이에 위치하는 데 성공한 드루이터가 먼저 공격하였다. 풍상에 위치한 네덜란드 함대는 횡렬진으로 전투를 개시하였고, 연합함대는 종렬진으로 대응하였다. 양측 함대는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뱅케르트는 데스뜨레, 드루이터는 루퍼트 그리고 트롬프는 스프라지와 각각 교전하였다. 트롬프는 전투가 시작되자 즉각 횡렬진으로 스프라지 전대를 향해 돌격을 감행하였다. 전위전대인 뱅케르트는 4일 해전의 제4일째 전투에서 드브리스가 한 것처럼 영국의 중위전대와 프랑스의 전위전대 사이를 돌파하여 데스뜨레 전대를 강력하게 밀어붙이고, 예하의 일부를 중위전대에 증원하도록 지원하였다. 뱅케르트의 공격을 받아 뒤로 물러난 프랑스 전대는 그 이후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 한편, 양측의 주력인 주력전대는 병항전으로 교전하였는데, 네덜란드의 주력전대가 전위에서 파견된 증원에 힘입어 우세를 유지하였다.
  양측은 해가 질 때까지 교전한 후 프랑스함대가 철수하고 영국함대도 귀항하였다. 이리하여 네덜란드 함대가 이 해전에서 승리하고 다시 연합군의 상륙작전을 무산시켰다. 이 해전에서 양측 함대는 침몰한 함선이 없었으나, 많은 함선이 심한 손상을 입었다. 연합함대는 거의 2,000명의 인명을 잃었으며, 네덜란드 함대는 절반 정도의 인원을 잃었다. 네덜란드는 이제 해양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 동인도 선단을 안전하게 운항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후 영국은 1672년 2월에 스페인의 중재를 통해 독자적으로 네덜란드와 화해하게 되었는데, 그 결과 2월 19일에 웨스트민스트조약을 체결하게 되었으며,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➀ 이 전쟁 중에 네덜란드가 탈환하였던 뉴욕을 다시 영국에 양도한다.
➁ 동인도에서 무역할 때 네덜란드는 영국에게 유리한 조건을 부여한다.
➂ 네덜란드는 전쟁배상금으로 영국에 800,000파운드를 지불한다.
➃ 네덜란드 해군 함선은 영국 해군 함선에 대해 경의를 표한다.

  이 조약에서 볼 수 있듯이 네덜란드는 해전에서 승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영국과의 제해권 쟁탈전에서 패배하였다. 네덜란드는 프랑스의 침공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굴욕적인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영국과의 해전에서 우위를 차지함으로써 영국으로 하여금 프랑스와의 동맹을 파기시키게 되었다는 점은 결코 간과할 수 없다. 영국의 그러한 행동은 프랑스의 정복 전쟁을 중지시켰으며, 이것은 네덜란드의 해군이 국난을 극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Ⅲ. 결 론

  해양패권을 둘러싼 영란전쟁은 다음과 같은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제1차 영란전쟁은 주로 네덜란드 선단에 대한 공격과 방호를 위한 전투로 이어졌고, 제2차 영란전쟁은 제해권 경쟁을 위한 전투함대 간의 전투로 진행되었으며, 제3차 영란전쟁은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상륙작전 기도에 대한 네덜란드 함대의 반격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제1차 영란전쟁 시 포틀랜드 해전의 경험을 통해 이후 해전에서 종렬진 전투체계가 확립되었다. 현측에 배치된 모든 포를 활용하여 전투를 하기 위해서 모든 함선이 적의 종렬진에 대하여 평행이 되는 종렬진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전투는 병항전으로 전개되었으며, 각 함은 1:1 전투를 수행하였다. 만약 백병전이 필요하면 적전에 돌진하여 자함의 제1사장bowsprit을 전선의 색구에 걸어 백병전을 수행하였다.
  100척에 달하는 함선을 지휘하여 질서정연한 종렬진을 유지한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함대는 항해할 때나 전투할 때 전술적으로 전위van - 주력부대main body - 후위rear로 구성된 3개 전대로 분리되었다. 이와 같이 함대를 분할하는 목적은 전투 시에 보다 융통성과 적응성을 부여하고 신속하게 신호를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해군전술이 더욱 복잡해지는 가운데 전투함대에서 무장상선이 점차 제외되고 표준화된 전열함ship of the line이 증가하였으며, 또한 함대를 구성하는 함선의 수도 점차 감소하였다.
  영란전쟁 시의 여러 해전에서 양측 함대는 화공선을 사용하였다. 발화성 혼합물을 적재한 화공선은 적선의 현측에 접근시켜 점화물질로 불을 지르기 위하여 승선한 몇 명의 용감한 인원에 의하여 조종되었다. 화공선의 사용은 공격자 측이 풍상에 위치했을 때로 국한되었으며, 적의 함대가 항해할 때보다 정박했을 때 더 효과적이었다. 이들 화공선은 함대가 항해하는 동안 자력으로 함대를 따라 항해하거나 다른 함선에 의하여 예인되었다. 따라서 함대는 속력이 느리고 예인해야 하는 화공선의 동행을 기피하게 되었다. 19세기 후반에 출현한 어뢰정이 현대화된 화공선의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세 차례에 걸쳐 진행된 영란전쟁 기간 동안 수없이 전개된 해전에서 네덜란드 해군이 대체로 우세한 전투를 수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전투 기량이 뛰어난 네덜란드 해군과 이들을 지휘했던 트롬프 부자, 드루이터 등 훌륭한 제독들이 선전 분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에 비해 소국인 네덜란드는 전쟁을 치르면서 국력의 지나친 소모로 말미암아 결국 영국과의 해양패권 경쟁에서 패배하였던 것이다.
  영란전쟁에서 네덜란드는 다음과 같은 취약점을 노출시켰다. 첫째, 네덜란드는 국가의 생존을 절대적으로 해양에 의존하고 있었다. 둘째, 네덜란드는 해양국경sea frontier과 함께 육상국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국가의 자원과 인력을 축성과 지상군의 유지에 투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셋째, 네덜란드 함선은 수적으로 우세하였지만, 천수로인 그들의 항구에 출입하기 위해 크기가 작고 조정하기 힘든 평저선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투에서 불리하였다.
  반면에 영국은 네덜란드와 전쟁을 수행함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유리하였다. 첫째, 영국은 해양패권을 추구하기 위해 국가정책을 일관성 있게 추진하였다. 크롬웰의 항해조례나 “네덜란드가 너무나 많은 무역의 이익을 누리고 있는데, 영국은 그 이익을 탈취하려고 결심하였다.”라고 한 몽크의 언급에서 볼 수 있듯이, 영국은 네덜란드의 무역을 탈취하기 위한 국가적 집념을 가지고 이를 추구하였으며 결국 오랜 숙적이며 위험한 프랑스와도 동맹을 맺었다. 둘째, 지리적으로 유리한 영국이 네덜란드 연안의 접근로인 해양을 통제할 수 있었다. 셋째, 대체적으로 영국 해군이 네덜란드 해군에 비하여 해군전술의 개발에 한 발 앞서 나갔다.
  영란전쟁 기간 동안에 일어났던 해전을 통해 다음과 같은 교훈을 도출할 수 있다.
  첫째, 전시에 주요 해협의 통제는 전쟁의 전개 상황을 지배할 수 있다. 영란전쟁에서 전쟁의 목적무역전쟁과 전쟁의 성격해전으로 볼 때, 영국해협의 통제는 전쟁의 전반적인 상황을 지배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전쟁에서 네덜란드의 해상교통로와 본토를 위협하는 영국해협에 대한 제해권이 초점이 되었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공세적 전략을 취할 수 있었던 영국이 유리했던 반면 네덜란드는 불리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해전에서 자연적 조건의 효과적인 이용은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 수 있다. 제3차 영란전쟁 시에 네덜란드의 드루이터 제독은 영국‧프랑스 연합함대를 상대하는데 있어서 적의 함대가 함부로 공격할 수 없도록 사주를 전략적으로 이용하였으며, 바람이 불리할 때서풍이 불 때에는 대피하였다가 유리해 지면동풍이 불 때 출동하여 적을 공격하였다. 이와 같이 자연적 조건을 적절하게 이용하는 것은 전투에서 전술적 효과를 증대시킬 수 있다.
  셋째, 해전에서 질서정연한 함대기동은 승리의 기초가 된다. 로웨스토프트 해전에서 요크 대공은 두 번에 걸친 90˚회전을 정확하게 집행하였는데, 이는 요크 대공과 예하 함장들의 기동술이 우수하였다는 점과 함정들 간의 원만한 협조 그리고 신호 전달의 신속성을 과시한 것이었다. 반면에 네덜란드 함대에서는 일부 함선이 전열을 이탈함으로써 혼란을 야기시켰으며 결국 이것이 로웨스토프트 해전에서 패전의 원인이 되었다.


<참고 문헌>
조덕현. 『세계사 속의 해전』. 서울: 신서원, 2006.

조덕현. 『해전사 속의 해전』. 서울: 신서원, 2010.

조덕현. 『전쟁사 속의 해전』. 서울: 신서원,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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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nglo-Dutch War (New York: Boydell Press, 2011).
Grant, R.G. Battle at Sea: 3,000 Years of Naval Warfare (Lond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1).
Ireland, Bernard. Naval Warfare in the Age of Sail (New York: W.W. Nor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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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sprey Publishing,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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