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생충의 제시카송으로 다시 뜨는 "독도는 우리땅" 노래, 왜 가사가 바뀌었는가? > E-저널 2020년 ISSN 2465-809X(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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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3호(2-3월) | 영화 기생충의 제시카송으로 다시 뜨는 "독도는 우리땅" 노래, 왜 가사가 바뀌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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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한봉준 작성일20-03-06 16:27 조회2,141회 댓글0건

본문

 

영화 기생충의 제시카송으로 다시 뜨는 "독도는 우리땅​1)" 노래,

왜 가사가 바뀌었는가?​2)


공군

 대령 한봉준


 왜 가사가 바뀐 것일까?

다른 부분은 그렇다 치더라도 ‘하와이는 미국땅 대마도는 일본땅’이 ‘하와이는 미국땅 대마도는 조선땅’으로 바뀐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1. 1949년 1월 7일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첫 연두 기자회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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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對馬島)는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에 조공을 바친 우리 땅이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이 그 땅을 무력 강점했지만, 결사 항전한 (대마도) 의병들이 이를 격퇴했고 의병 전적비(戰蹟碑)가 대마도 도처에 있다. 1870년대에 대마도를 불법적으로 삼킨 일본은 포츠담 선언에서 불법으로 소유한 영토를 반환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돌려줘야 한다.“


 이날 이승만은 한일 국교 재개를 언급하면서 대마도 문제를 꺼냈다.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하라는 미국 요구에 맞서기 위한 지렛대로 대마도 카드를 뽑아 든 것이다. 이 대통령의 발언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다. 그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한 지 사흘 뒤인 8월 18일 성명에서 '대마도는 우리 땅'이니 일본은 속히 반환하라고 했다. 일본이 항의하자 이승만은 외무부를 시켜 그해 9월 '대마도 속령(屬領)에 관한 성명'을 발표했다.

이승만의 연두 기자회견 직후인 1949년 1월 18일 제헌 의원 31명이 '대마도 반환촉구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얼마 후 있게 될 샌프란시스코 미일 강화회의에서 대마도 반환의 관철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국내의 한 언론이 2005년 입수한 미국 국무부 외교문서에 따르면, 1951년 4월 27일 한국 정부는 미 국무부에 보낸 문서에 다음과 같이 썼다."한국은 일본이 대마도에 대한 모든 권리, 호칭, 청구를 분명히 포기하고 그것을 한국에 돌려줄 것을 요청한다(In view of this fact the Republic ofj Korea request that Japan specifically renounce all right, title and claim to the Island of Tsushima and return it to the Republic of Korea)"고 밝혔다. 아쉽게도 같은 해 7월 9일 양유찬 주미 한국대사가 국무부에서 존 덜레스 미국대사를 만나 대마도 문제에 대한 한국의 입장을 전하자 덜레스는 "대마도는 일본이 오랫동안 통제하고 있고 이번 평화조약은 대마도의 현재 지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며 한국의 요구를 거부했다. 이후 우리 정부도 더 이상 대마도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대마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은 조선 초에도 강력하게 제기됐었다. 그것은 고려 때 대마도에 대한 인식이 여진족과 탐라(제주도) 중간쯤이었기 때문이다. 고려와 접경한 여진족은 고려 관직을 받는 것을 영예로 생각했고 이 전통은 청나라가 성립되던 조선 중기까지 이어졌다. 탐라도 상대적 독립을 누리다 고려에 복속됐다. 반면 대마도는 상대적 독립을 유지했지만 고려나 조선의 관직을 얻고 생필품을 얻기 위한 교역을 꾸준히 요청했다.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 대마도를 다루는 고려와 조선의 원칙이었던 것이다. 왜구의 침략이 계속되자 세종 원년(1419년) 상왕 태종은 대마도 정벌을 결심한다. 그때 밝힌 교유문(敎諭文)의 서두다.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대마도는 섬으로 본래 우리나라의 땅이다. 다만 궁벽하게 막혀 있고 또 좁고 누추하므로 왜놈들이 거류하게 두었더니 개같이 도적질하고 쥐같이 훔치는 버릇을 가지고 경인년부터 뛰놀기 시작했다.” "태종의 교유문은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그리고 정벌이 끝난 후 대마도 도주에게 교유문에서 그는 다시 한번 대마도가 우리 땅이었음을 명확하게 밝힌다.“ "대마도가 섬으로 경상도의 계림(鷄林-경주)에 예속되었던 바 본시 우리나라 땅이라는 것이 문적(文籍)에 실려 있어 확실하게 상고할 수 있다.”

 물론 대마도가 제주도나 거제도 같은 우리 땅은 아니다. 이승만 대통령도 대마도가 우리에 조공을 바치던 땅이라고만 말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태종 때 대마도가 일본 땅도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15세기 초 태종 이방원의 대마도 인식과 20세기 중반 대통령 이승만의 인식은 일맥상통한다.

이후 조선은 대마도에 대해 소극적 태도로 일관했다. 그저 왜구의 근거지 역할만 해주지 않으면 좋다는 정도였다. 임진왜란이 대마도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양다리를 걸쳤던 대마도주는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일본화를 지향했고 임란 직후인 17세기 초 일본의 막번체제에 편입됐다. 조선 전기 때만 해도 조선의 신하임을 당당히 밝혔던 대마도 도주가 일본으로 넘어간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지적대로 1870년대 완전히 일본화됐다. 지금 대마도는 일본이 실효 지배하고 있다. 


2. 일본​4)과 대마도​5)

 1859년 3월 31일 미일화친조약(美日和親條約)으로 개항한 일본은, 미국과 영국의 유도에 의해 국내 정세가 크게 변했다. 도쿠가와 막부는 대마도가 대행하고 있던 조선과의 외교와 무역을 직접 관장하려 했다. 1868년 1월 3일 도쿠가와 막부의 조번체제(朝藩體制)가 붕괴하고 왕정복고·왕위 친정체제를 구축하려는 정변이 일어났다(메이지유신​6)). 이로써 웅번(雄藩)들은 판권봉환​7)(版權奉還)에 들어가, 도쿠가와 막부의 제15대 장군인 도쿠가와 시게노부(德川鹿喜, 1837~1913)도 정권을 개혁 조정에 반환하게 되었다. 1871년 8월 29일에는 폐번치현​8)(廢蕃置縣)을 실시했다. 이로인해 대마도주 종의달(宗義達, 1847~1902)도 대마도를 판적봉환​9)(版籍奉還)하게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종의달은 조선과 근위소장(近衛小將)이라 칭하고 이스하라(嚴原) 번지사(蕃知事)가 되었다. 그러나 1877년 대마도는 나가사키현에 편입되면서, 현에 속한 지방 행정지로 격하되었다.


3. 오가사와라제도​10)와 대마도

 오가사와라 제도는 1593년 전국시대 마츠모토(松本)지역 세력의 오가사와라 사다요리(小笠原定頼)라는 사람이 발견하였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실제 남아있는 자료는 확인되고 있지 않다. 현재 17세기 초 에도 막부 시절 일본인이 표류하여 발견한 것이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남아있다. 이 지역에 최초로 주민이 거주하게 된 것은 1830년으로, 미국인 5명과 하와이 왕국등의 폴리네시아 주민 20명이 거주하여 포경선 등 원양선의 중간보급 기지의 형태로 유지한 것이 시작이다. 그 후, 메이지 유신 이후인 1876년 내무성의 관할지역이 되어 공식적으로 일본의 영토가 되었으며, 1880년에 도쿄부(東京府)에 속하게 된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미국령으로 편입되어 관리 되다가 1968년에 다시 일본으로 반환되면서 이전에 거주하고 있었던 원주민의 재정착이 허용되고, 1979년에 오가사와라촌으로 지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11)


 문제는 일본이 1860년대 오가사와라 제도를 두고 미국과 분쟁하던 당시 독일 동양학자인 클라프로스가 번역한 일본의 대학자 하야시 시헤이가 지은 삼국통람도설의 프랑스어판을 증거로 제시해 영유권을 인정받았다는 것이다.  이 책에 수록된 지도는 기록에 의하면 1788년 ~ 1873년까지 일본정부의 공식지도로 활용되었으며, "삼국접양지도"(프랑스어판, 1832년)는 1806년 "삼국통람도설​12)" 원본1권이 프랑스에 소개되어 1832년 프랑스어 번역본에 수록된 클라프로트의 번역 지도(1832년 제작)이고, 1853년 미국이 무인도 오가사와라제도(일본남쪽 1,000Km 떨어진 무인도군도)를 점령하여 식민지화 하였는데, 1861년에서야 일본이 이 사실을 알아채고, 오가사와라제도를 일본령으로 표시한 "삼국접양지도"(일본어 필사본)을 제시하였으나 거부당하자, 다시 "삼국접양지도"(프랑스어판, 1832년)을 제시하여 국제적으로 지도가 인정되고, 오가사와라제도가 일본 영토로 공인된 것이다. 그러나 내용이 달라진 위조 지도가 만들어져 오랜 세월동안 배포되었다. 위조 지도에서도 독도는 여전히 조선땅이지만, 대마도는 일본땅으로 둔갑되었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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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 삼국통람도설​14)의 조선팔도지도 (도호쿠대 소장) 제작자 하야시 시헤이의 서명과 함께 대마도가 조선땅으로 표시 

                      우) 대마도가 일본땅으로 표시된 위조본​15) 등장​

 

4. 과거를 잊은 국가에 미래란 없다.​16)

 “영화 기생충의 제시카송으로 다시 뜨는 <독도는 우리땅>노래, 왜 가사가 바뀌었는가”에서 출발한 이 글은 독도가 아닌 <대마도>에 관한 글이다. 나는 이 글을 통해서 극우와 민족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지금 자라나고 있는 내 아이들에게 국제안보환경과 국력의 차이로 인해 말 못하고 있는 사실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대마도와 관련하여 과거 우리정부에서 추진하였던 것, 일본이 대마도를 언제부터 어떻게 자국화 하였는가를 확인하여 봄으로써 한국과 일본에 관한 근대사의 관련사실을 확인하여 역사의 긴 흐름속에서 우리의 자녀, 우리보다 후대의 사람들에게 과거의 발자취를 사실대로 인식시켜주고 싶을 뿐이다.


‘순수와 순진’의 차이점은 무엇인가?​17)

 깨끗하고 투명한 두 개의 유리잔이 있다. 맑은 물이 가득 채워진 한 잔은 ‘순수’이고, 비워져 있는 다른 한 잔은 ‘순진’이다. 물이 가득 채워진 잔에는 더 이상 들어갈 틈이 없어 깨끗함 그 자체이고, 다른 빈 잔은 깨끗한 물이 담길 수도 더러운 물이 들어갈 수도 있다. 순수와 순진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니 순수는 ‘전혀 다른 것의 섞임이 없음’, 순진은 ‘마음이 꾸밈이 없고 순박함’으로 나와 있다. 복잡하고 치열한 현실 속에서 ‘순수하다’라는 말은 소신이 있고 주관이 뚜렷하여 세속에 물들이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반면, ‘순진하다’라는 말은 어리석다는 뜻일 수도 있다. 

‘순진’이란 말은 어릴 때 간직할 수 있는 말이지, 어른이 되어서도 순진하다면 세상을 잘 모르는 사람이다. 하지만, ‘순수’는 나이가 들어도 누구나 가질 수 있다. 거짓이 없고, 자기 말에 책임을 지며,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순수한 사람이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도 않고, 겸손의 미덕을 가지고, 남의 잘못은 용서하지만 자신에게는 엄격하다.


나는 사랑하는 우리의 아이들이 순수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원한다.

미주

1) 기존의 '독도는 우리땅'은 박인호(본명 박문영) 작사, 작곡에  1982년 정광태 씨가 부른 노래로, 몇 가지 오류도 있었고, 단위 표시도 현대식이 아니어서 2012년 박문영씨가 직접 가사를 수정
2) - 울릉도 동남쪽 뱃길 따라 200리(리 단위 사용) ▶울릉도 동남쪽 뱃길 따라 87km
- 경상북도 울릉군 남면도동 일번지(새 주소)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 평균기온 12도 강수량은 1300(울릉도 기후) ▶평균기온 13도 강수량은 1800
- 오징어 꼴뚜기 대구 명태 거북이(개체 수 감소) ▶오징어 꼴뚜기 대구 홍합 따개비
- 연어알 물새알 해녀 대합실(독도 지킴이) ▶주민등록 최종덕 이장 김성도
- 17만 평방미터 우물하나 분화구(실면적과 우편번호) ▶19만 평방미터 799에 805
- 세종실록지리지 오십 페이지 셋째 줄(잘못된 부분) ▶세종실록지리지 강원도 울지현
- 하와이는 미국땅 대마도는 일본땅 독도는 우리땅(정체성) ▶하와이는 미국땅 대마도는 조선땅
3) 1949년 1월 7일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이 첫 연두 기자회견의 이하는 조선일보의 이한우 기자의 기사를 정리한 내용임.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7/25/2008072501220.html
4)  왜국에서 일본이라는 국호의 공식적인 사용은 서기 701년 다이호오(大寶) 율령 제정 후에 쓰이게됐다. 그렇다면 백제가 660년 나당연합군에 패하고 663년 부흥운동마저 실패한 후로부터 40여 년 후의 일이다. 그러므로 백제 멸망 후 왜국이라는 기존의 일본열도를 나타내는 국호로부터 일본(日本)이란 새로운 국명이 정식 채택된 것으로 볼 수 있다.(http://www.seoulpost.co.kr/news/25466)
5) 일본과 대마도 이하 내용은 대한신문 2016.6.20. “잃어버린 우리땅 대마도”을 정리함.
   (http://www.daehansinbo.com/bbs/board.php?bo_table=51&wr_id=19)
6) 메이지 유신은 혁명이 아니다. 서양의 시민 혁명처럼 아래로부터 일어난 시민 계층이 권력을 잡아 새로운 사회를 이룩한 것이 아니다. 메이지 유신은 소외 번의 하급 사무라이가 주도하였고, 하급 사무라이 역시 하나의 지배 계층이었다. 이런 점에서 메이지 유신은 일본의 지배 계급 내의 사무라이 사이에서 일어난 권력 이동인 셈이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은 봉건 질서를 해체하고 근대라는 큰 세계를 창출했다는 점에서, 단순한 권력 이동이라 부를 수 없다. 메이지 유신의 지도자들은 서양으로부터 당당하게 독립하여 강한 국가를 만들려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메이지 유신은 근대를 성공시킬 수 있는 획기적 지점을 창출한 놀라운 사건이었다.[네이버 지식백과] 막부 멸망과 메이지 유신을 만든 사람들 - 메이지 유신(1868년) (일본사 다이제스트 100, 2011. 12. 30., 정혜선)
7) 왕정으로 복귀함에 따라 각번의 영주들의 영역권을 천황에게 바치는 것
8) 막부시절의 번을 없애고 근대적 지방 행정기관인 현을 두는 것
9) 1869년 7월 25일 일본의 메이지 시대 초기에 행해진 조치로, 다이묘들이 일본 천황에게 자신들의 '영지(領地)'와 '영민(領民)', 즉 '판적'을 반환하였던 일이다.
10) 일본 본토에서 남으로 약 1,000㎞ 떨어진 서태평양에 있는 제도이다. 다양한 생물이 서식하고 있어 동양의 갈라파고스라 불리며, 2011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되었다.
11) 본 내용은 나무위키의 오가사와라제도의 내용을 정리한 것임. (https://namu.wiki/w/%EC%98%A4%EA%B0%80%EC%82%AC%EC%99%80%EB%9D%BC%20%EC%A0%9C%EB%8F%84)
12) 일본 에도시대 대학자 하야시 시헤이(1738~93)이 1785년에 지은 "삼국통람도설"은 조선, 오키나와, 북해도 3국에 대한 정치지리서이다.
13) 출처 : 시대정신(2019.2.17.) http://blog.daum.net/jh1459/356
14) 하야시 시헤이가 1785년에 지은 "삼국통람도설"에는 조선정벌의 타당성도 포함하고있는데, 일본의 아시아침략 정점에 있던 1942년 일본 국가지정문화재로 등록되었는데, 그 책자는 1924년에 지도와 내용 등을 수정해 만들고 하야시 시헤이의 이름을 넣은 수정본으로 조선총독부 도서관 소장본이다.
15) 오가사와라 분쟁당시 활약했던 다나베는 1863년, 1868년 주불대사로 활동하면서, 1868년 대마도의 일본귀속을 앞두고, 대마도가 조선영토로 표시되어 배포했던 클라프로트의 "삼국접양지도"(프랑스어판, 1832년) 수집, 폐기한다. 이때 만들어진 것이 위의 위조본이다.
16) 1940년 5월 14일 처칠의 라디오 연설 중(“A nation that forgets its past has no future”)
17) 출처 : 무간섭은 배려(2018.9.11.) https://blog.naver.com/pcs0386/221575522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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