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근대시기 해양안보 요충지, 진해지역의 해전과 수군 유적 > E-저널 2020년 ISSN 2465-809X(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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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4호(4-5월) | 전근대시기 해양안보 요충지, 진해지역의 해전과 수군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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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제장명 작성일20-05-14 15:31 조회1,92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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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근대시기 해양안보 요충지, 진해지역의 해전과 수군 유적



순천향대학교

이순신 연구소장 제장명


Ⅰ. 머리말
  
  임진왜란(1592~1598) 당시 웅천현이었던 오늘날 진해 지역은 조선 건국기부터 왜구들의 침입을 많이 받은 곳이다. 고려 말부터 노골화된 왜구들의 빈번한 침략으로 인해 조선은 건국 후 무질서하게 입국하는 왜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삼포를 개항하였다. 즉 1407년(태종7) 부산포(동래)와 내이포(일명 제포, 웅천), 1426년(세종8) 염포(울산) 등 삼포를 개항하고 왜관(倭館)을 설치하여 교역 또는 접대의 장소로 삼았다. 다시 말해 오늘날 진해지역인 웅천은 이미 조선 건국 초부터 국제무역항으로서의 위상을 가졌으며,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였기 때문에 해상으로부터의 안보 위협을 많이 받아온 곳이다.
  이런 이유로 이곳에는 일찍부터 수군진이 설치되어 해상으로부터 침입해 오는 적을 방어하였으며, 제포왜관에 대한 감시임무도 수행하였다. 가장 먼저 설치된 제포진은 조선전기에 경상우수영의 기능을 가졌다가 임진왜란 시기에는 만호진으로 감격 운영되었다. 안골포의 위치가 해상안보에 매우 중요한 곳으로 평가됨으로써 이곳에도 만호진이 설치되어 운영되었으며, 제포진과 함께 임진왜란을 맞이하였다. 
  임진왜란 시기 진해의 전략적 위상은 더욱 높게 인식되었다. 조선 수군에게는 침략일본군의 본거지였던 부산을 공격하기 위해 반드시 지나야 할 항로에 위치한 곳이었으며, 일본군에게도 그들의 해상보급로 확보와 근거지 마련에 가장 중요한 곳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다보니 당시 진해지역에서는 여러 차례 해전이 벌어졌다. 1592년 5월 7일에 있었던 합포해전, 같은 해 7월 10일의 안골포해전, 1593년 2월 10일부터 3월 6일까지 7차례나 전투가 벌어졌던 웅포해전이 대표적이다. 현재 남아 있는 주요 해전지 소개 표지나 웅천왜성·안골왜성 등은 이 지역이 당시 조선 수군에게나 침략한 일본군에게나 전략적으로 요충지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아울러 임진왜란의 교훈에 따라 조선 후기에는 풍덕진, 신문진, 청천진 등의 수군진이 추가로 설치되어 운영되기도 하였다.
  여기서는 진해지역에서 벌어졌던 당시의 해전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고 당시 수군진에 대해서도 소개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전근대 시기 수군 활동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고 해양안보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정립하는 데 일조하고자 한다.


                 
Ⅱ. 임진왜란 초기의 합포해전

  이순신이 이끈 전라좌수군과 원균이 이끈 경상우수군은 1592년 5월 7일 주력전선인 판옥선 28척과 보조선인 협선 17척, 동원어선인 포작선 46척으로 거제 옥포에서 적선 30여 척을 맞아 26척을 분멸시키는 큰 전과를 거두었다. 이 해전은 조선 수군의 첫 해전으로서 옥포해전이라고 부른다. 당시 정오 무렵에 시작된 전투가 오후 4시경 종료되어 조선 수군은 거제 영등포로 물러나 쉬려고 하였다. 이때 척후장으로부터 적선 5척이 인근 해역에 나타났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따라서 조선 수군은 적선을 추격하였는데, 결국 저녁 무렵에 합포(현재의 경남 창원시 진해구의 학개마을 앞바다)에 도착하여 일본군선 5척과 교전을 벌였다. 일본군은 합포에 배를 버리고 육지에 올라가 조총을 쏘면서 조선 수군을 공격해 왔는데, 조선 수군은 우수한 화력을 바탕으로 적을 물리치고 적선 5척을 모두 분멸시켰다. 

  합포해전은 비록 다른 해전에 비해 규모가 작았지만, 조선 수군의 첫 출전에서 두 번째로 거둔 해전 승리로서 이어서 벌어진 적진포해전(5월 8일 고성 적진포에서 적선 13척을 분멸시킨 해전)에서의 승리에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흔히 이 합포해전의 위치에 대해 현재 마산의 합포로 위치 비정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잘못 비정한 것이다. 당시 이순신의 장계(‘옥포파왜병장’)에 분명히 ‘웅천땅 합포’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현재 진해구 행암동 학개마을로 비정하는 것이 정설이다. 합포해전이 포함된 조선 수군의 제1차출전 상황도를 다음 [그림1]과 같이 도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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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합포해전 상황도

 

Ⅲ. 한산대첩 한 축으로서의 안골포해전

 

  조선 수군은 1592년 7월 8일 한산도해전에서 58척의 주력전선으로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가 지휘하는 일본의 정예수군 함대 73척을 맞아 59척을 분멸시키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조선 수군은 그날 밤을 견내량에서 보낸 후 7월 9일에 가덕으로 출항하려던 중 ‘안골포에 왜선 40여 척이 대어있다’는 탐망군의 보고를 받았다. 

  그런데 그날은 해상상태가 고르지 못하여 조선 수군 함대는 온천도(거제 칠천도)에 머물면서 저녁에 작전회의를 가진 후 7월 10일 새벽에 발선하였다. 당시 조선 수군 지휘부는 안골포의 적을 물리치기 위한 작전계획을 다음과 같이 수립하였다. 즉 전라우수군은 안골포 바깥바다의 가덕 변두리에 결진해 있다가 적의 후원세력이 나타나는지를 감시한다. 그런 후 전라좌수군과 경상우수군이 접전을 시작하게 되면 복병을 남겨두고 급히 지원하도록 한다. 그리고 전라좌수군은 선봉에서 학익진을 벌여 먼저 전진하고 경상우수군은 전라좌수군의 뒤를 따르게 하였다.

  조선 수군함대가 안골포에 이르렀을 때 선창에는 대선 21척, 중선 15척, 소선 6척 등 총 42척이 머물고 있었다. 이곳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수군 장수는 와키자카와 함께 부산에 내려왔던 구키 요시다카(九鬼嘉隆)와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였는데, 모두 도요토미 직속의 정예수군이었다. 이들은 단독으로 출전을 감행한 와키자카를 뒤쫓아 7월 7일 김해로 이동하였고, 다음날 이곳 안골포로 옮겨 와서 정박 중이었다. 이들은 도요토미의 공격 명령을 수행하고 앞서 출전한 와키자카 함대를 돕기 위해 서둘러 출발해 왔던 것이다. 조선 수군은 한산도 해전에 이어 일본의 또 다른 정예수군 함대를 맞이한 것이다.

 

  그런데 7월 10일 아침 학익진을 형성한 조선 수군이 안골포로 진격했을 때 대응해 나올 줄 알았던 일본 수군은 나오지 않고 정박한 가운데 육지로 올라가 대응하였다. 게다가 안골포의 전투 환경은 조선 수군의 학익진 형성에 적합하지 않았다. 즉 안골포는 포구의 지세가 좁고 얕아서 조수가 물러나면 육지가 드러날 것이므로 판옥선과 같은 대선은 용이하게 출입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였다. 따라서 여러 번 유인작전을 펼쳤지만 한산도 해상에서 와키자카 함대가 참패를 당한 사실을 알게 된 일본 수군은 일절 포구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순신은 진형을 변경하여 일종의 ‘장사진(長蛇陣)’을 구성하여 공격하였다. 이것은 안골포구가 좁아서 학익진으로 공격하는 것보다 장사진으로 공격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그리고 약속대로 전라우수군까지 합세하여 병력 집중의 원칙을 견지함으로써 전투의 효율성을 배가시켰다. 또한 장수급이 타는 대선을 위주로 선제공격하는 전술을 구사하였다. 안골포해전 시 조선 수군의 작전상황도를 보면 [그림2]· [그림3]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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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안골포해전 상황도 1         <그림 3> 안골포해전 상황도 2

 

 


  조선 수군의 집중공격에 당하지 못한 일본군 다수가 육지로 도주하였다. 그런데 당시 안골포 산 속에는 많은 백성들이 잠복해 있었다. 이순신은 일본 군선들을 모조리 없앨 경우 궁지에 빠진 일본군들에 의해 백성들이 비참한 살육을 면치 못할 것을 염려하였다. 이순신의 애민사상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따라서 대선 위주로 깨트려 불태우고 작은 전선은 남겨둔 채 1리쯤 물러나와 밤을 지냈다. 일본 수군들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왔을 때 일망타진할 계획이었다.

  다음날인 11일 새벽에 다시 돌아와 포위해 보았으나 일본군들이 당황하여 닻줄을 끊고 밤을 이용하여 몰래 도망한 흔적만 발견하였다. 일본 함대는 조선 수군이 일부러 남겨두었던 소선으로 야간을 이용해 안골포를 탈출, 부산 쪽으로 도주한 것이다. 

  이 날의 전투결과를 보면 대선 20척 이상의 적선을 분멸시켰으며, 아군은 한 척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 다만 약간 명의 사상자만 발생했을 뿐이다. 어쨌든 한산도해전에 이어 적의 또 다른 정예 수군을 완파한 의미 있는 해전이 안골포해전인 것이다.

  

 

 Ⅳ. 임진왜란 최초의 상륙전 웅포해전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듬해 초에 벌어진 해전이 바로 웅포해전이다. 당시 전황을 보면 1593년 1월 8일 이여송이 이끈 명나라 원군 4만 3천여 명이 조선 관군과 합세하여 약 7개월간 일본군의 수중에 있었던 평양성을 탈환하였다. 이에 일본군은 남하하여 한성에 집결하고 있었다. 

  이 무렵인 1593년 1월 하순 경에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조정으로부터 ‘평양성에서 물러난 일본군이 남하하여 도망가므로 한 척의 배도 돌아가지 못하도록 하라’는 내용의 지시를 받았다. 이에 조선 수군은 출전을 시작하여 2월 10일 웅천 앞바다에 도착하였다. 이때 조선 수군의 전선은 총 100척 남짓하였는데, 거제 칠천량과 가덕 앞바다 등지를 왕래하면서 명나라 군대의 남하 여부와 일본군의 동향에 대해 파악하였다. 

  그런데 조선 수군이 부산 쪽으로 진출하려고 할 때 웅천의 웅포에 적들이 주둔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조선 수군은 먼저 이 적을 제거하고 부산으로 진격할 계획을 세웠다. 따라서 2월 10일, 12일, 18일, 20일에 복병을 보내어 유인하기도 하고, 혹은 드나들면서 싸움을 걸었다. 그러나 적들은 우리 수군의 위세를 겁내어 바다로 나오지 못하고 잠깐 포구에 출몰할 뿐이었다. 동시에 산기슭에 성을 쌓고 주둔하여 철환을 쏘면서 대응하였다. 그나마 2월 18일에는 유인작전이 약간의 성공을 거두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적들이 험한 설비를 해두었을 것이 의심스러워 포구 안까지는 깊이 들어가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적들은 깊숙한 포구에 배를 감춘 채 굳은 방비를 설치하고 소굴을 많이 만들어 둔 가운데 조선 수군의 유인작전에 응하지 않았다. 이에 육군이 아니고서는 적을 몰아 나오게 하기 어려우므로 적의 기세가 꺾인 때를 타서 수륙으로 합공하려고 경상우도 순찰사 김성일에게 육군의 지원을 요청했지만 무산되었다. 

  결국 이순신은 수군 단독으로 적을 물리치는 최선의 방안을 강구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2월 22일에 있었던 상륙작전을 병행한 작전이었다. 이를테면 이순신이 모집하여 거느린 의승병과 3도의 정예 사부(射夫)들을 태운 10여 척의 전선을 서쪽으로는 제포쪽에, 동쪽으로는 안골포쪽에 상륙시켜 결진하도록 하였다. 동시에 3도의 수군에서 각각 경완선 5척을 내어 모두 15척으로써 웅포로 번갈아 돌격하면서 지자·현자총통을 쏘아 적선을 반이나 쳐부수고 다수를 사살하였다. 적들은 당황한 채 수륙으로 협공당하는 것이 두려워서 동서로 분주하며 응전하였다. 상륙한 의승병들은 하루 종일 돌격하여 무수한 적을 무찔렀다. 이 해전의 상황도는 [그림4]와 같다. 

  그 후 2월 28일과 3월 6일 두 차례의 추가 공격이 있었지만 큰 성공은 거두지 못했다. 결국 이 7차례의 전투에서 조선 수군은 다양한 전술로 적을 공격하였으며, 특히 2월 22일에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작전인 상륙작전을 단행하여 적을 크게 물리친 것에 대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육군의 도움이 없는 가운데서도 수군 단독으로 상륙작전을 단행한 것은 웅포해전만이 가지는 독특한 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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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웅포해전 상황도

Ⅴ. 진해의 수군진 흔적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진해지역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어 수군진에 대한 정비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창원시 진해구 해안 일대는 제포진(薺浦鎭)·제덕토성(薺德土城)·안골포진(安骨浦鎭) 등 기존 수군진성에다가 추가로 풍덕진(豊德鎭)·청천진(晴川鎭)·신문진(新門鎭) 등이 설치되어 운영되었다, 이를 통해 볼 때 진해 지역이 조선 시대 해안 방위의 최전선이었음을 알 수 있다.

  1. 제포진성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성내동의 웅천 읍성(熊川邑城)에서 남쪽으로 바닷가에 이르면 진해구 제덕동 제덕리[일명 안지개]가 있는데, 제덕리는 과거에 경상도 우수군의 본영인 경상우수영(慶尙右水營)이 있던 자리이다. 제덕리는 조선 초기에 내이포(乃而浦)로 불리다가 1452년(단종 즉위) 이후에는 제포(薺浦)로 명칭이 바뀌었다.
  조선 시대에 들어서 1403년(태종 3)에는 내이포에 경상우도 수군 도안무 처치사영(慶尙右道水軍都按撫處置使營), 곧 경상 우수영이 설치되어 처치사가 낙동강 하구를 기준하여 경상도 서쪽 해역을 관할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내이포가 왜선들이 출입하는 입구로서 웅천·창원의 해안 방어와 마산포의 조운(漕運)을 보호하기 위한 군사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내이포의 경상 우수영은 1419년(세종1)에 거제도 오아포(吾兒浦)[현 경상남도 거제시 동부면 가배리의 조선 전기 명칭]로 옮겨졌고, 내이포에는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를 두었다가 뒤에 수군 만호로 강등되었다. 제포 수군 만호진은 1895년에 구군제(舊軍制)가 혁파될 때 폐진되었다.

  
 2. 제덕토성
  제덕토성은 제포진[제포 수군진성]과 근접하여 진해구 제덕동 제덕리 동쪽 뒷산에 그 흔적이 있다. 조선 초기에 제포·부산포·염포의 삼포를 개항하고 왜관(倭館)을 두면서 상주(常住)하는 왜인을 60명으로 제한하였다. 일반적으로 왜관의 외부에는 목책(木柵)을 두르고, 다시 밖에 성을 쌓아 일반 주민과의 접촉을 차단하였다. 제덕 토성은 이러한 왜인들을 통제할 목적으로 왜관과 유사하게 축성되었다. 제덕 토성의 축성 연대는 문헌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서 확실하게 알 수 없다. 다만 1507년(중종 2)에 조선 정부가 삼포에 축성하기 위하여 성터를 측량하자 거주하던 왜인들이 축성을 중지하여 줄 것을 요청하여 병조(兵曹)와 축성도감(築城都監)에서 이 문제를 상의하였던 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 시기에 축성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남아있는 제덕 토성의 규모는 길이 340m, 높이 3.5m이며, 성벽 기단부는 5m 정도이다.

  3. 안골포만호진성
  안골포진은 제포진 동쪽의 진해구 안골동에 있다. 김해 가망포(加望浦)에 있던 수군 만호진을 1462년(세조8)에 안골포진으로 옮겨왔다. 안골포진성은 수군의 방어 원칙이던 선상수어(船上守禦)를 완화하여 남해안 일대 각 포에 축성하기로 결정한 후 1490년(성종21)에 축성되었다. 그 후 안골포진은 임진왜란으로 왜군에게 함락되어 폐허가 되었으나, 전란 후에 복구되어 전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伺候船) 2척이 배치되었다. 역시 임진왜란 때 함락되었던 가덕진(加德鎭)·천성보(天城堡)·제포진이 부활되어 한동안 안골포진에 머물다가 각각 본래 위치로 복귀한 적이 있다. 
  현재 안골포진성은 대부분 파괴되고 남벽 일부와 서벽의 기단부 일부만 남아있는데, 임진왜란으로 이 성이 함락되고 바로 옆에 왜성이 축조되면서 안골포진성의 석축을 헐어내어 이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안골포진의 전선이 정박하였던 굴강(掘江)[해변에 돌무더기로 방파제를 둘러 쌓아 배를 정박시키던 곳] 유적 일부가 현재 마을 해안 도로변에 남아있어 안골포진의 역사를 웅변해주고 있다.

  4. 풍덕진성
  풍덕진은 창원시 진해구 풍호동 바닷가에 있었다. 『웅천현 읍지(熊川縣邑誌)』에 따르면 본래 별장이 주둔한 소모진이었으나, 소모진의 기원은 임진 왜란 때 국가의 비용이 부족하고 또 군사들을 보내기 어려운 요충지들에 민간에서 자원하여 선박이나 장정들을 모아 방어하였던 데서 유래한다. 공식적으로는 1600년(선조 33)에 사도 도체찰사 이원익이 남쪽 지방을 순시하면서, 울산·동래·창원 세 곳에 소모진을 설치하고, 임시로 별장을 두어 거느리게 하였던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606년(선조39)에 수군 기지가 되었다. 
  그 후 1669년(현종10)에 사포(蛇浦)[사포의 위치는 자세하지 않음]로 옮겼다가  1751년(영조27)에 폐진된 것으로 전한다. 풍덕진에는 종9품 별장이 거느리는 전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2척이 배치되어 있었다. 풍덕진이 위치하였던 풍호동 바닷가는 현재 군사 기지로 바뀌어 옛 유적지는 모두 사라졌다.

  5. 신문진성
  안골포진으로부터 동·서 각 0.8㎞ 지점에 임진왜란 후 청천진과 신문진이 설치되었다. 신문진은 본래 김해 유하면에 있던 신문 소모진[현 경상남도 김해시 장유면 신문리]이 1657년(효종8)에 창원시 진해구 안골동으로 옮겨왔다. 청천진과 신문진에는 종9품의 별장(別將)이 거느리는 전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2척이 각각 배치되어 있었다. 좁은 안골만에 안골포진을 포함하여 세 개의 수군진이 촘촘히 배치된 것은 이곳이 국방상의 요해지였기 때문이다. 청천진과 신문진은 대체로 1864년(고종1) 전후에 폐진되었으며, 현재 유적은 남아있지 않다.

  6. 청천진
  청천진은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청안동 청천 마을에 있는 조선 후기 수군 별장진을 말한다, 청천진이 설치된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웅천현 읍지』에 따르면, 조선 시대에 공신에 관한 사무를 보던 관아인 충훈부(忠勳府)에서 별장을 둔 곳으로서, 김해 청천면에 있던 청천 소모진이, 1656년(효종 7) 8월에 창원시 진해구 청안동의 청천 마을로 옮겨왔다고 한다.
  청천 수군 별장진은 고종 초기(1864년경)에 폐쇄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청천 마을은 안골만 내의 북동쪽 해변에 위치하여, 안골만을 사이에 두고 남쪽으로 안골포 굴강·안골포 진성·안골 왜성 유적을 마주하고 있다. 진해 청천진지에는 현재 기념할 만한 시설이 없다. 일반인들이 유적지로 식별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곳이지만, 인근의 수군진들과 함께 임진왜란 이후 여러 수군 관방(關防)이 한곳에 집중된 특별한 사례를 보여 주는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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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고지도에 보이는 진해의 수군진

                  
                  
 Ⅵ. 맺음말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임진왜란 시기 진해(웅천)지역에서는 합포해전, 안골포해전, 웅포해전 등이 있었다. 아울러 관방의 요충지로서 수군진들이 다수 설치되어 운영되었다. 이곳이 일본군의 해상 침략에 최전선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본군 역시 이 지역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왜성을 축조한 가운데 장기 주둔하면서 전쟁 수행을 지원하는 후방기지로서 이용하였다. 이러한 지리적·전략적 요충지였기에 일본군은 근대시기 일본 해군의 중심 기지로 진해를 택한 것으로 보인다. 
  미래 한국 해양안보를 굳건히 하기 위해서는 해양 역사에서 주는 교훈을 배워야 한다. 따라서 국민들이 해양안보사에 대해 기억하고 제대로 학습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해전지를 포함하여 해당 전유적지들에 대한 홍보자료와 시설물을 설치하여 이들 지역에 대한 탐방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등 전근대시기 해양역사에 대해 효과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각별한 관심이 요구된다. 이런 이유에서 진해지역 해전지와 수군유적은 좋은 학습의 장이 될 것으로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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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정무기체계 연구개발 사업의 발전방향 충남대학교 전)교수 신정호 ​ Ⅰ. 서 론 2006년 1월 1일부로 방위사업청이 개청되면서 국내에서 연구개발하는 일반무기체계의 획득절차는 탐색개발단계, 체계개발단계, 양산단계로 이루어졌다. 반면에 함정무기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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