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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저널 2021년 ISSN 2465-809X(Online)

제 52호(8-9월) | 대마 해전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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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조덕현 작성일21-09-14 16:18 조회1,05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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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 해전에 관한 연구​

 

한국해양전략연구소 조덕현

 

1. 서론 및 배경

 러일전쟁 중 러시아는 일본을 압박하기 위해 함대를 동원하였다. 그러나 일본 해군보다 3배나 많은 함대를 보유하면서도 각 지역에 흩어진 러시아 함대를 모으기는 쉽지 않았다. 흑해함대는 오스만 제국에 의해 출동할 수 없었기 때문에 출동이 가능한 함대는 태평양함대밖에 없었다. 러시아 해군 사령부는 태평양함대만으로는 일본함대에 대항하기 힘들다고 판단해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이 이끄는 발틱함대와 네보가토프 제독이 이끄는 제3태평양함대를 추가로 파견했다.

 제2태평양전대로 편성된 발틱함대가 로제스트벤스키(Zinovy P. Rozhdestvensky) 중장 지휘 아래 1904년 10월 15일 발틱해의 리바우(Libau)를 출항하여 극동해역을 향해 18,000마일의 항해를 시작하였다. 발틱함대의 전력은 신형 전함 4척을 포함한 전함 7척, 구식장갑순양함 3척, 순양함 4척, 구축함 7척 그리고 보조함 9척으로 구성되었다. 발틱해와 블라디보스톡 사이에는 발틱함대가 이용할 수 있는 수리시설과 석탄 기지가 없었기 때문에, 함정의 수리와 보급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문제는 우호적인 중립국(특히 프랑스의 보호령)의 항구의 협조를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발틱함대는 계약을 맺은 독일 선박회사의 석탄 보급에 의존하며 항해하였다.

 10월 21일, 발틱함대는 북해의 도거뱅크(Dogger Bank) 근해에서 영국 어선을 일본 어뢰정으로 오인해 발포함으로써, 영국 국민을 격분시키고 거의 영국을 전쟁에 끌어들일 뻔하였다. 이 사건은 발틱함대가 안고 있었던 극도의 긴장감을 표출한 예라 할 수 있다. 영국의 여론이 악화됨에 따라 영국함대가 발틱함대에 대해 시위 기동(스페인 근해에서 항해 시), 봉쇄 위협(탕헤르 입항 시) 및 감시(발틱함대에 관한 정보를 일본에 전달) 등의 시위 행동을 벌여 발틱함대의 신경을 자극하였다.

 11월 4일, 탕헤르(Tangier)에 도착한 로제스트벤스키는 소형함들을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게 하고 대형함들은 자신의 지휘 아래 아프리카 남단을 회항하도록 함대를 분리하였다. 발틱함대는 1905년 1월 9일 마다가스카르(Madagascar)의 노시베(Nosy Be)에서 수에즈 운하를 통과한 전대와 합류하였는데, 이때 여순항의 패전 소식을 들었다. 4월 14일, 베트남의 캄란 만(Camranh Bay)에 도착한 로제스트벤스키는 캄란 만의 사용이 금지되자, 다시 인근의 반퐁(Van Fong)으로 이동한 후 네보가토프(Nikolai Nebogatov) 전대와 합류하기 위해 그곳에 머물렀다. 5월 9일에 합류한 네보가토프전대는 구형 전함 1척, 장갑해방함 3척, 순양함 1척으로 모두 낡고 속력이 느렸다. 이제 총 53척으로 증강된 발틱함대는 마지막 전투준비를 갖춘 후 5월 14일 베트남 해역을 출항하였다.

 로제스트벤스키가 블라디보스톡으로 항해하기 위해서는 세 항로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첫째 항로는 대한해협이며, 둘째 항로는 쓰가르해협 그리고 셋째는 소야해협이었다. 대한해협은 일본함대가 대기할 가능성이 가장 많았으며, 쓰가르해협과 소야해협은 항해에 장애요소협수로, 안개 그리고 기뢰부설의 가능성가 많았고 1천 마일 이상의 항해가 더 요구되었다. 로제스트벤스키는 이러한 조건들을 검토한 후 결국 최단 항로인 대한해협 동수로를 선택하였다.

 발틱함대는 5월 23일에 상해 근해에서 석탄선으로부터 마지막 석탄 보급을 받았는데, 각 함정은 창고를 가득 채우고 갑판에 쌓을 정도로 석탄을 만재하였다. 25일 야간에 일부 소송선이 함대에서 이탈하여 상해로 향했다. 로제스트벤스키는 야간 어뢰 공격을 우려한 나머지 주간에 대마도를 통과하기 위해 순항속력을 8노트로 감속하였다. 그러나 대마도 근해의 주간 통과는 일본 전투함대의 집중적인 차단이 예상되었다.

 또한, 로제스트벤스키는 세 가지 목표를 해결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첫째, 일본함대와의 교전, 둘째, 발틱함대의 블라디보스톡 입항, 셋째,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차단과 블라디보스톡의 제한된 시설을 감안한 보조함선의 동행이었다. 그는 전투와 항해 그리고 선단의 방호를 동시에 해결하려고 계획하였다. 그의 전투계획은 전함전대가 전열을 형성하여 교전하고 순양함으로 전함전열을 지원하거나 선단을 방호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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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발틱함대의 항로>


 이에 비해 일본함대의 목표는 오로지 발틱함대의 격파에 있었다. 이를 위해 일본 연합함대는 정비와 훈련을 마치고 만반의 전투준비를 갖춘 상태였다. 일본함대의 각 함정은 여순함대가 궤멸된 1904년 12월부터 1905년 2월까지 사세보와 구레 정비창에 입거하여 모든 정비를 마치고 2월 21일 진해만에 입항하였다. 일본 연합함대가 진해만을 선택한 것은 지리적으로 발틱함대를 포착하기 쉬운 곳이며 묘박지로도 적합하여 훈련을 계속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연합함대는 발틱함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한편, 진해만을 근거지로 하여 전 함대가 지속적으로 훈련하였다. 연합함대는 함포사격, 어뢰 발사, 접적 기동, 야간전투 등의 훈련을 했고, 특히 사격훈련과 구축함 및 어뢰정의 야간공격 훈련을 중요시하였다.

 일본함대는 5월 19일 이후 대한해협 남서해역에 경비함정 70여 척을 배치시켜 경비에 집중하며 발틱함대를 기다렸다.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 도고는 작전참모인 아끼야마 중령의 구상에 따라 발틱함대를 따라 점차 북상하면서 4회의 주간전투와 3회의 야간공격을 감행하는 7단수비전법으로 발틱함대를 맞아 전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2. 대마 해전 (Battle of Tshshima)

 5월 27일 주간에 대한해협 동수로 즉, 대마도 동쪽 해상에서 시작된 대마해전은 28일 주간에 울릉도 근해에서 발틱함대가 항복함으로써 종결되었다. 대마해전은 러시아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발틱함대가 패함으로써 사실상 러일전쟁의 대미를 장식한 해전이었다. 그리고 대마 해전은 전략적으로나 전술적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해전이었다.

 1905년 5월 27일 04:45에 일본의 정찰선 시나노마루가 발틱함대를 발견하고 무전으로 긴급 보고하였다. 06:30에 진해만을 출항한 일본 연합함대는 발틱함대를 차단하기 위해 대마도 동쪽을 향해 항진하였다. 일본의 주력 전투함대는 제1전대도고 제독이 직접 지휘, 기함 미카사三笠 전함 4척과 장갑순양함 2척 그리고 제2전대사령관 카미무라, 기함 이즈모出雲 장갑순양함 6척으로 구성되었다. 그 외에 각각 4척으로 구성된 3개 순양함전대가 뒤따랐으며, 구축함 21척과 어뢰정 44척이 동행하였다.

 발틱함대의 주력 전투함대는 각각 4척으로 구성된 3개 전대로 편성되었다. 제1전대는 로제스트벤스키의 기함인 수보로프(Suvorov)를 선두로 알렉산더 3세(Alexander III, 보로디노(Borodino) 및 오렐(Orel) 등 신형 전함 4척으로 구성되었으며, 제2전대는 오슬리아비야(Osliabya)를 포함한 전함 3척과 장갑순양함 1척 그리고 제3전대는 네보가토프가 지휘하는 구형 전함 니콜라이 1세(Nicolai I)와 장갑해방함 3척으로 구성되었다. 그 외에 순양함 8척과 구축함 9척이 동행하였다.

 양측 전투함대의 주요 무장은 [표-1]과 같았다. 발틱함대는 230mm 이상 대구경포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하였으나, 중구경포에 있어서는 일본함대가 우세하였다. 일본함대의 포는 발틱함대의 포 보다 현대화되어 사정거리가 길고 탄약의 성능도 우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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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1] 양측 전투함대의 주요 무장

 27일 오전에 일본 순양함전대가 발틱함대를 집요하게 추격하자 로제스트벤스키는 함대의 진형을 여러 차례 변경하였다. 13:30경 종렬진을 형성한 일본 전투함대제1 및 제2전대가 북서 침로로 발틱함대의 7마일 전방을 횡단하였을 때, 발틱함대는 3개 종렬진 즉, 복종렬진 형태로 북북동을 향해 항진하고 있었다. 좌측에 제2전대와 제3전대가 종렬진으로 항진하고 있었고 중앙에 제1전대가 역시 종렬진으로 항진하였으며, 그 후방에 순양함전대가 뒤따랐다. 우측에는 순양함과 구축함전대가 위치하여 후방의 선단을 방호하고 있었다. 일본 전투함대가 출현하자 로제스트벤스키는 자신의 전투함대 제1~3 전대에게 종렬진을 형성하도록 신호를 보냈다.

 13:55에 도고가 발틱함대 좌현 함수 방향에서 발틱함대에 대하여 역방향인 남서침로를 취했을 때, 기함 미카사의 마스트에 「황국의 흥망이 이 전투에 달려있다. 각자 최선을 다하라.」는 신호기가 게양되었다. 남서로 항진하던 도고는 14:05에 갑자기 좌현으로 회전하여 북동동으로 변침한 다음 후속함들을 뒤따르게 하였다. 일본함대는 발틱함대에 대하여 T자를 씌우며 발틱함대의 선두를 압박하였다. 종렬진의 종전(corpen)은 후속함들이 한 위치에서 계속 선회해야 하며 또한 선회 시에는 속력을 줄여야 하므로 적이 포격할 경우에는 위험하였다.

 호기를 잡은 수모로프가 14:08에 7,000야드 거리에서 포격을 개시하였는데, 발틱함대는 그때까지 종렬진을 완전히 형성하지 못하고 일부 함정이 감속하거나 정지하며 혼란스러운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절호의 기회를 활용하지 못했다. 14:10에 일본함대가 응사하면서 14노트로 항진하며 발틱함대의 선두함인 수보로프와 오슬리비야에 대해 포격을 집중하였다. 교전한 지 30분이 지나면서 발틱함대 전열의 여러 척이 손상을 입었다. 14:45에 오슬리비야가 심한 손상을 입고 전열에서 이탈하여 30분 후에 침몰하였다. 15:00에 수보로프가 전투력을 상실하고 전열에서 이탈하였으며, 중상을 입은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은 나중에 구축함으로 이송되었다. 이렇게 하여 최초의 결정적이었던 제1단계 교전이 끝났다.

 제2단계 교전은 15:00경부터 시작되었다. 알렉산더 3세(Alexander III)를 선두로 한 발틱함대는 북북동으로 침로를 유지하고 계속 블라디보스톡을 향해 도주하려고 하였으나 속력이 우세한 일본함대에 번번이 차단당하고 T자 씌우기를 당했기 때문에 두 번이나 시계방향으로 선회하였다. 16:35에 도고는 교전거리를 벌린 다음 구축함에 어뢰 공격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구축함의 어뢰 공격이 성과가 없었고 연기와 안개로 인해 상당한 시간 동안 접촉을 상실하였기 때문에 일본함대는 다시 남진하여 발틱함대를 포착하였다. 제1전대는 발틱함대를 따라 북북서진하였고 카미무라의 제2전대는 남쪽에서 교전하는 순양함전대를 지원하였다.

 제3단계 교전은 17:55부터 도고가 직접 지휘한 제1전대가 발틱함대를 좌현 함수에 두고 양측이 북서진하는 가운데 진행되었다. 일몰이 다가오는 가운데 일본 제1전대 6척과 발틱함대 10척이 교전하는 상황에서 도고전대의 포격은 선두함인 알렉산더 3세에 집중되었는데, 약 15분 후에 알렉산더 3세가 전열에서 이탈하여 19:00에 침몰하였다. 도고전대는 이제 선두함이 된 보로디노에 포격을 집중하였고, 보로디노 역시 19:20에 침몰하였다. 이렇게 하여 발틱함대의 주력을 형성했던 신형 전함 5척 가운데 4척이 격침되었다.

 어둠이 다가오자 네보가토프가 생존자를 구조하고 혼란에 빠진 나머지 발틱함대를 지휘하여 북상하였다. 도고는 구축함분대와 어뢰정전대에게 야간공격을 명령하고 전함과 순양함을 지휘하여 14노트의 속력으로 예정된 집결 장소인 울릉도 근해를 향해 북상하였다. 20:30경부터 일본 전투함대는 울릉도 동남 해역에서 전함 오렐과 니콜라이 1세 그리고 장갑해방함 2척과 순양함 1척을 포착하고 그 후방에 위협사격을 가했다. 10:30에 네보가토프가 백기를 게양하고 일본함대에 항복하였다. 이날 오후 낡고 속력이 느린 장갑해방함 우사코프(Ushakov)가 항복을 거부하고 일본 순양함 2척과 교전한 후에 자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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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 대마 해전도


 발틱함대의 전열을 형성했던 12척 가운데 전함 6척을 포함하여 7척이 격침되었고 장갑해방함 1척이 심한 손상을 입고 자침하였으며, 전함 2척과 장갑해방함 2척이 항복하였다. 그 외에 순양함 2척이 격침되고 2척이 좌초되었으며, 구축함 4척과 보조선 3척이 격침되었다. 로제스트벤스키가 승함한 베도브이(Bedovyi)를 포함하여 구축함 2척과 병원선 2척이 나포되었다. 순양함 3척, 보조함 3척 그리고 구축함 1척이 중립항에 입항하여 그곳에서 억류되었다. 대한해협에 들어선 38척의 발틱함대 함정 가운데 블라디보스톡에 귀항한 세력은 순양함 1척과 구축함 2척 그리고 보조함 1척에 지나지 않았다. 발틱함대의 인명손실은 전사 5,000명, 부상 500명 그리고 포로가 6,000명이었다. 일본함대의 전열에서는 몇 척이 손상을 입었는데, 가장 심한 손상을 받은 것은 도고의 기함인 미카사였다. 그 외에 순양함 1척이 전투력을 상실했고 구축함 8척이 손상을 입었다. 격침된 것은 어뢰정 3척뿐이었다. 일본함대에서는 전사 116명, 부상 570명이 발생하였다.

 대마해전에서 발틱함대가 결정적으로 패함에 따라 러시아는 더 이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더욱이 국내의 정치적인 불안으로 인해 극동에 군사력을 더 증강시킬 수도 없었다. 이에 따라 러시아는 미국이 중재하는 강화회담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만약 대마해전에서 일본 연합함대가 패하였더라면, 그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을 것이다. 일본 육군은 교통선이 차단되어 만주에서 고립되었을 것이며, 러시아는 극동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강대국으로 존립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대마해전은 러일전쟁의 승패를 결정한 결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3. 해전의 의의 및 승패 요인

 러일전쟁은 양국에 정치‧군사적인 면에서 많은 영향을 미쳤다. 발틱함대가 패한 후 러시아와 일본은 미국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의 중재를 받아들여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조약(Treaty of Portsmouth)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에 따라 러시아는 만주에서 철수하고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이익을 인정하였으며, 여순 항과 요동반도 그리고 사할린(Sakhalin) 남부를 일본에 양도하였다.

 러일전쟁의 결과에 따라 러시아의 남진정책이 좌절되었다. 그리고 러시아에서 패전의 후유증은 정치적 불안을 가져와 볼세비키혁명(Bolshevik Revolution)을 유발하는 간접적인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반면에 일본은 조선 침략을 본격화하고 대륙침략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한, 군사강대국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세계 열강의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 이러한 국제적 지위의 확립과 더불어 일본은 군사 대국 그리고 주요 해군국가로 부상하였다.

 러일전쟁의 결과는 해군의 전략과 전술 그리고 해군 무기체계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대마해전의 결과로 인해 대구경포를 장착한 대형 전투함만이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해양을 제패할 수 있다는 거함거포주의 전략사상이 대두하였다. 그리하여 화력을 집중한 주력함(capital ship)이 등장하였는데, 단일함의 다종다포주의에서 탈피해 대구경의 단일종포를 다수 탑재한 전거포함(all-big-gun-ship)이 출현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예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출현한 노급전함(Dreadnought)과 전투순양함(battle cruiser)이었다. 한편, 야간전투 수단으로 어뢰정과 구축함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러일전쟁의 결과로 각광 받게 된 거함거포주의와 더불어 함대의 적극적인 공세로 제해권의 장악을 주장한 마한의 함대결전 사상에 따라 열강은 해군력 건설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거함거포주의를 전략적으로 뒷받침하는 함대결전 사상은 양차 세계대전 시에 열강 해군의 함대편제와 진형에 영향을 주었는데, 특히, 일본 해군의 전략사상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발틱함대의 격파라는 전략적 성공에 고취된 일본 해군은 그 후 함포 교전의 주체가 된 전함을 중심으로 함대를 건설하였으며, 이러한 함대에 의한 결전을 기본 전략으로 삼아 제2차 세계대전 시 미국 해군을 상대하였던 것이다. 한편, 요새함대 전략을 취한 러시아의 여순함대가 패함에 따라 주요 해군에서 요새함대 전략 사상이 퇴조하게 되었다. 전술적 측면에서는 종렬진과 현측사격(broad fire) 그리고 우세한 속력을 이용한 기동, 특히 T자 씌우기 등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전술을 원활하게 구사하기 위해서는 동일한 전술적 특성을 가진 동형함으로 진형을 형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인식되었다.

 러일전쟁에서 양국 해군은 강한 애국심을 가지고 조국을 위하여 훌륭하게 싸웠다. 비록 패배하였으나 러시아 해군은 인천해전에서부터 대마해전에 이르기까지 분투하였으며, 최악의 경우 자침함으로써 나포되는 굴욕을 피했던 것이다. 운동경기와 마찬가지로 전쟁에서도 승자와 패자가 있게 마련이다. 전쟁의 결과를 두고 보았을 때, 승자의 전략뿐만 아니라 패자의 전략을 통해서도 교훈을 삼을 수 있다. 여기에서는 주로 해전과 관련된 승패 요인을 중심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첫째, 일본의 승리는 영일동맹의 영향을 받았다. 러일전쟁에 앞서 일본은 1902년에 영국과 동맹을 체결함으로써 1:1 대결구도가 된 대 러시아 전쟁에 대해 자신을 갖게 되었으며, 특히, 주력함을 확보하는 데 있어서 영국의 지원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도거뱅크의 영국 어선에 대한 발틱함대의 포격사건으로 인해 영국의 여론이 악화됨에 따라 영국 해군이 발틱함대에 대해 위협적인 시위를 한 후 감시하였다. 또한, 영국의 외교적 압력으로 인해 발틱함대의 중립항 입항과 군수지원이 실제로 방해를 받았는데, 이러한 영국의 방해가 발틱함대의 원정항해를 더욱 피로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둘째, 일본 해군은 중앙 위치에서 내선작전의 이점을 이용하여 분할된 러시아 해군을 각개 격파하였다. 전쟁 초기에 일본 연합함대는 여순함대와 블라디보스톡전대 사이에서 중앙 위치를 차지하고 내선작전을 수행함으로써 자신의 집중된 세력으로 러시아 해군을 각개 격파하였다. 또한, 발틱함대의 원정 시에도 일본 연합함대는 진해만에 위치하여 발틱함대와 블라디보스톡 중앙 위치의 이점을 활용했다.

 셋째, 전투함의 성능과 편성에서 유리하였다. 일본해군의 전함과 장갑순양함은 당시 세계 최강의 우수한 성능을 지녔으며 동형함으로 전투전대가 편성되었기 때문에 그 성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하여 러시아 해군은 우수한 신예 전함도 있었지만 함형과 성능, 무장과 속력이 서로 다른 함정으로 편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투전대로서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따라서 대마해전의 경우 발틱함대는 저속함을 기준으로 10노트의 속력으로 전투를 수행하였지만, 일본 연합함대는 15노트의 속력으로 유리한 전술기동을 할 수 있었다.

 넷째, 일본 해군의 사격술이 우수하였다. 황해해전과 대마해전에서 승패를 좌우한 공격력은 대구경 함포였다. <표-1>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양측 전열이 보유한 대구경포에 있어서는 일본함대가 열세하였으나, 일본함대는 압도적으로 뛰어난 사격술을 바탕으로 발틱함대를 제압하였다. 대마해전 시 일본함대의 명중률은 진해만에서의 사격훈련의 결과로 황해해전 시 – 일본함대에 비하여 여순함대의 사격률이 26%, 명중률은 8.6%였다 – 에 비하여 3배 정도 강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다섯째, 시모세 화약의 위력이 뛰어났다. 일본 해군이 사용한 시모세 화약은 포탄이 작렬할 때 러시아 해군의 포탄에 비해 두 배의 위력을 발휘하였다. 시모세 화약을 사용한 포탄이 명중되었을 때 파괴력도 컸지만 탄착관측이 용이하고 포수의 사기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반면에 러시아 함정이 발사한 포탄은 지연신관이었기 때문에 명중되어도 잘 관측되지 않았다.

 여섯째, 지휘관의 역량이 탁월하였다.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 도고 제독은 청일전쟁 시에 순양함 나니와(浪速) 함장으로 참전했고, 풍도해전에서 고승호(高陞號)를 격침시킨 장본인이었다. 그는 청일전쟁 후 8년 동안 함대 소속 주요  부대를 지휘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는 카미무라 중장과 같은 노련한 지휘관과 아끼야마 중령과 같은 유능한 참모를 예하에 두고 있었다. 도고는 발틱함대가 대한해협을 통과할 것을 예측하고 진해만에서 연합함대의 전비태세를 고도로 유지했다. 대마해전에서는 T자 씌우기(Togo Turn)를 감행함으로써 초기에 기선을 제압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면밀한 계획과 고도의 훈련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었다. 그는 연합함대 사령관으로서 함정과 승조원을 뛰어난 전투력으로 결속시키는 탁월한 지휘 역량을 발휘하였다. 

 일본 해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 외에도 인천해전과 여순 항 기습 등 선제기습을 통한 주도권 장악, 청일전쟁의 경험을 통한 전장의 특수성 파악, 육군과의 원활한 합동작전, 정보활동의 우세 그리고 장병들의 뛰어난 사기 등 많은 요인이 있었다.

 다음으로 러시아의 패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요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러시아 함대의 분할을 들 수 있다. 우선 러시아 해군은 전체적으로 우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태평양 해역에서 일본 해군을 압도할 수 있는 세력을 사전에 이동시키지 못했다. 전쟁 초기에 일본 연합함대에 대해 겨우 대등한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러시아의 태평양함대는 여순전함 7척과 블라디보스톡장갑순양함 4척, 그 가운데 1척은 항해 불가에 분할되어 있었으며, 전쟁이 발발한 후 부대 배치의 실책을 만회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시도한 여순함대의 블라디보스톡 이동은 허사가 되고 말았다. 결국 여순함대, 블라디보스톡전대 그리고 발틱함대는 차례로 일본 연합함대에 각개 격파당하고 말았다.

 둘째, 전비태세가 미흡하였다. 러시아의 태평양함대는 개전이 임박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상응하는 전비태세를 유지하지 않았다. 무방비 상태에서 여순 항의 기습을 허용한 것이 그 예가 될 것이다. 당시 여순함대는 모든 등화를 점등하고 대어뢰 방어망도 없이 외항에 정박하고 있었으며, 장교들의 무도회 참석, 장병들의 상륙, 해상 경비를 수행한 구축함의 부적절한 접적보고와 조치 등 전혀 경계태세를 갖추지 않고 있었다.

 셋째, 여순함대의 조기 궤멸과 발틱함대의 출동 지연 및 항해 지체를 들 수 있다. 여순함대의 상황이 급박해진 가운데 태평양 해역을 향한 발틱함대의 출항이 7월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정부의 무능력, 정비의 지연 그리고 정치적 불안 등으로 인해 발틱함대의 출항이 애초부터 지연되었으며 이들이 항해하는 도중 여순이 함락되었다. 또한, 이들의 원정 항해도 후속 부대와 합류한다는 이유로 도중에 많이 지체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피로만 누적시켰다. 반면에 여순함대의 조기 궤멸과 발틱함대의 지체는 일본함대에 충분한 정비와 훈련 시간을 제공하였다.

 넷째,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의 지휘 역량 결여를 들 수 있다. 대함대를 지휘하여 7개월 이상 18,000마일을 항해한 로제스트벤스키의 용기와 인내력은 존경 받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그는 예리한 두뇌의 소유자였지만 관료적이었고 전투경험이 없었으며, 장기간의 항해에 따른 정신적‧육체적 피로와 함께 여순 항의 함락으로 인해 자신감을 상실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정작 대마해전을 치르는 과정에서는 전투지휘관으로서 역량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는 일본함대와의 교전, 블라디보스톡 도착 그리고 선단의 방호라는 세 가지 목표를 동시에 수립하지 않았으며 일본 연합함대를 발견하고 난 뒤에 비로소 함대의 전투진형을 지시하는 등 전술적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지휘역량을 보였다.

 다섯째, 대마해전에서 발틱함대 패인 중 하나는 석탄의 과적이었다. 발틱함대의 각 함정은 5월 23일 마지막 석탄보급 시 약 1,000마일의 항정을 남겨 놓고 3,000마일을 항해할 수 있을 만큼 갑판 위까지 석탄을 쌓아 올렸는데, 이는 목적지인 블라디보스톡의 열악한 군수조건이 고려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석탄의 과적은 함정의 속력을 감소시키는 원인이 되었고 함정의 안전에도 방해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투 시에 화재의 위험과 시야 장애 등의 지장을 주었다. 이외에도 러시아 함정의 저속과 강도가 약한 장갑 및 열세한 화력, 훈련의 부족과 이에 따른 명중률의 저조 그리고 러시아 해군장병들의 저하된 사기 등 여러 요인을 들 수 있다.

4. 결론 및 교훈

 러일전쟁 시 해전의 수행 과정과 승패 요인을 통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몇 가지 교훈을 도출할 수 있다.


 1) 대등한 적과 대적할 경우 전투함대는 집중되어야 한다. 러시아가 패전하게 된 여러 가지 이유 가운데 가장 명백한 이유는 러시아함대가 발틱해와 태평양에 분할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태평양함대는 여순과 블라디보스톡 및 인천에 분할되어 있었고, 분할된 태평양함대는 결국 집중된 일본 연합함대에 각개 격파 당했으며, 마침내 발틱함대도 궤멸되고 말았다. 따라서 전투함대는 현저하게 우세하지 않는 한 집중되어야 한다.


 2) 요새함대 전략은 무용한 전략이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요새함대 전략을 취한 러시아 여순함대의 경우도 결국 요새와 함께 궤멸되고 말았다. 요새함대는 공격자 측의 함대봉쇄와 배후로부터의 지상공격에 의해 항복하든지청일전쟁 시 위해위 봉쇄전에서 청함대, 탈출하다가 격파당하든지미서전쟁 시 산티아고 봉쇄전에서 스페인전대, 아니면 끝까지 저항하다 항내에서 궤멸되었다여순함대. 해상과 지상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수 있는 고립된 요새는 결코 난공불락이 될 수 없기 때문에, 함대가 공세를 취하지 않고 요새의 비호를 받는 요새함대 전략은 근본적으로 소극적이며 무용한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3) 분할된 목표는 우유부단한 결과를 초래한다.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은 대한해협에 접근하면서 함대전투와 블라디보스톡 입항 그리고 선단의 방호라는 세 가지 목표를 동시에 추구하였다. 물론 세 가지 목표가 동시에 달성될 수 있다면, 그것은 최상의 결과가 되겠지만 당시에 그에게 있어서는 막연한 기대에 지나지 않았다. 전투함대가 궤멸된다면 설령 보조선단이 블라디보스톡에 입항하더라도 발틱함대의 원정항해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함대전투를 최우선시했어야 하며, 만반의 전투준비를 갖추고 전투함대와 순양함 및 구축함을 대동하여 대한해협에 진입했어야 했다. 그가 블라디보스톡 입항을 목표로 했다면 일본 연합함대와의 접촉을 최소화할 수 있는 항로를 선택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는 분할된 목표를 동시에 추구한 나머지 우유부단한 행동을 취하여 결과적으로 아무 것도 달성하지 못했다.


 4) 함대전투에서는 초기 주도권의 확보가 결정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대마해전에서 승패의 향방은 교전 30분 만에 결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후의 전투는 일본 연합함대의 일방적인 소탕작전(mopping-up operation)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는 7단수비전법과 같은 일체화된 훈련에 의해 성취되었다.


 5) 기함 및 선두함에 대한 집중 공격은 적의 전열을 와해시킨다. 일반적으로 선두함은 그 함대에서 가장 유력한 함정이 배치되며, 선두함에는 함대사령관이나 제독이 위치한다. 그리고 선두함은 기동 시에 기준이 되는 향도함으로써 역할을 담당한다. 따라서 선두함이 치명타를 받으면 가장 유력한 전투함이 전투기능을 상실할 뿐만 아니라, 함대의 지휘기능이 마비되고 진형이 혼란에 빠지게 된다. 황해해전에서 여순함대는 기함이며 선두함인 전함 차레비치 함이 포격을 받아 사령관이 전사하고 함대의 전투 진형이 와해되어 패하였다. 대마해전에서 일본 연합함대는 발틱함대의 선두함에 대해 집중적인 포격을 가하여 초전에 오슬리비야 제2전대 기함 함과 수보로프사령관 로제스트벤스키의 기함 함을 전열에서 이탈시킨 후 기선을 제압할 수 있었다.


 6) 일체화된 훈련은 목표 달성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이다. 일본 연합함대는 발틱함대의 격멸이라는 확고한 목표 아래 진해만에서 장기간에 걸쳐 일체화된 훈련 사격, 기동 및 야간공격 훈령 등을 실시하여 함정과 승조원을 뛰어난 전투력으로 결속시킬 수 있었다.


 7) 저속함의 동반은 함대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게 할 수 있다. 황해해전 시 여순함대의 비트게프트 사령관은 전함 레트비잔이 수면 하 손상으로 인해 속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자 함대의 속력을 14노트에서 12.5노트로 감속하였다. 그 결과 일단 추격을 벗어났던 여순함대는 속력이 우세한 일본 연합함대에 추격을 당하여 패하였다. 이때 비트게프트는 레트비잔을 단독으로 여순에 입항하도록 조치하고 자신은 나머지 함대를 이끌고 전속력으로 블라디보스톡으로 이동하는 것이 바람직하였다. 지휘관은 종종 이처럼 “전체를 위해서 일부를 희생시킬 것인가 아니면 일부를 끝까지 구해야 할 것인가?”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 시 도거뱅크 해전(Battle of Dogger Bank), 1915년 1월 24일에서 독일의 히페르(Hipper) 전대가 이러한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 대마해전에서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은 구형전함과 장갑해방함으로 구성된 네보가토프 소장의 제3전대와 동행하여 전투함대의 속력이 10노트로 감속될 수밖에 없었으며, 그 결과 발틱함대는 속력이 4~5노트 우세한 일본 연합함대에 시종일관 압도당하고 참패하였다. 이 경우 로제스트벤스키는 제3전대가 선단을 방호하게 하고 자신은 나머지 전투함을 지휘하여 블라디보스톡을 향해 전속력으로 돌파하는 방안을 택할 수도 있었다. 만약 그렇게 했더라면 발틱함대 전체가 궤멸되는 최악의 상황은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8) 함대전투에서 유리한 전술적 위치를 확보하기 위한 꾸준한 노력이 요구된다. 대마해전 시 도고 제독은 과감한 T자 씌우기 전법을 실시하여 발틱함대에 대해 기선을 제압하고 시종일관 유리한 전술기동을 유지하면서 발틱함대를 압박하였다. 일본 연합함대의 과감하고 일사불란한 기동은 황해해전 시에 한때 여순함대에 대한 접촉을 상실했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꾸준히 연구하고 훈련한 결과라 볼 수 있다. 또한, 일본 해군은 이러한 결과에 따라 7단수비전법과 같이 연속적인 주야간 공격을 감행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일본 전투함대가 적전 대회전을 하는 순간에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았던 발틱함대는 자신의 진형도 완성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절호의 기회를 활용하지 못했던 것이다.


9) 전투부대는 동형함으로 구성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도고 제독은 전투력과 전술적 특성이 비슷한 동형함으로 전투전대를 편성하여 일사불란하게 기동하면서 전투를 수행하였다. 또한, 도고는 자신의 주력부대인 제1전대를 직접 지휘하면서 카미무라 중장이 지휘하는 제2전대에게 융통성을 주었다. 그리하여 주력부대가 필요로 했던 시간과 장소에 제2전대가 기동함으로써 전투효과를 증대시킬 수 있었다. 

 

<참고 문헌>

조덕현. 『세계사 속의 해전』. 서울 : 신서원. 2006.

조덕현. 『해전사 속의 해전』. 서울 : 신서원. 2010.

조덕현. 『전쟁사 속의 해전』. 서울 : 신서원. 2016.

Busch, Noel F. The Emperor’s Sword: Japan vs Russia in the Battle 

     of Tshshima. Funk & Wagnalls. 1969.

Graber, Gray. Tsushima 1905: Pre-Dreadnought Naval Battle 

     Miniatures Rules. Independently Published. 2019.

Lardas, Mark. Tsushima 1905: Death of a Russian Fleet. Osprey 

     Publishing. 2018.

Pleshakov, Constantine V. The Tsar’s Armada: The Epic Journey to 

     the Battle of Tshshima. Basic Books.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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