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4호(12-22,1월) | 이순신 장군과 노량해전(露粱海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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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이세영 작성일22-01-18 13:42 조회2,372회 댓글0건본문
이순신 장군과 노량해전(露粱海戰)
이세영 교수
670km를 걸어 남해로
이순신 장군은 32세 늦은 나이에 무과에 급제하여 노량해전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22년 동안 군 생활을 했다. 오늘날 군 간부들이 임관하여 장기 복무를 하고 전역하게 되면 대부분이 군에서 평생을 보내고 제2의 인생을 살아간다고들 한다. 하지만 진정으로 평생을 군에서 보낸 분이 이순신 장군이다. 장군은 군관 신분으로 군 생활을 하던 중 노량해전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세상을 떠났으니 그야말로 군에서 평생을 보냈다는 말이 맞다. 이순신 장군은 군인의 길을 걸으시면서 초지일관(初志一貫) 나라와 백성만을 사랑하였다. 우리들은 이순신 장군을 평가할 때 주로 해전에서의 승리만을 초점을 맞춰 평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사실은 장군의 군 생활 전체의 삶을 바라보면 세계 역사상 찾아보기 드문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순신 장군의 진면목은 군 생활 동안에 겪었던 두 번의 백의종군(白衣從軍) 신분이 되었을 때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백의종군은 말 그대로 계급과 모든 권한을 내려놓고 계급도 권한도 없는 어찌 보면 군인으로서 가장 수치스러운 일일 것이다. 장군의 신분에서 하루아침에 아무런 권한도 없는 비천한 신세가 되었다면 대부분은 비통함과 분함에 빠져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도 아무런 잘못이 없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두 번씩이나 백의종군을 당하였는데도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거나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장군의 인생에서 가장 쓰라린 처벌을 받았는데도 전혀 마음의 동요를 하지 않고 초지일관 나라와 백성만을 생각하였다.
백의종군을 당한 이유를 살펴보면 이순신 장군의 곧은 정신과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싸움에서 반드시 승리하겠다는 일념으로 생각하고 행동했던 것들이 이순신 장군을 평소에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간신배들이 그럴듯한 이유를 들어 눈이 먼 선조에게 이순신 장군이 다른 뜻이 있음을 지속적이고 끈질기게 상소하자 이에 선조는 잘못 판단하여 두 번씩이나 이순신 장군을 백의종군 신세로 전락하게 만든 것이다. 결국 두 번째 조정으로 압송되었을 때는 10명이면 9명이 죽어 나올 정도의 가혹한 형벌과 함께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처지였으나 진정으로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던 몇몇 충신들이 이러한 풍전등화와 같은 난국에 둘도 없는 명장인 이순신 장군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간곡한 상소에 따라 백의종군 신세로 옥문을 나오게 되었다. 정말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심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흐트러지지 않고 그 모진 고문을 의연한 자세로 이겨냈다. 이런 상황이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모함하고 죽기 직전까지 선조를 부추겼던 사람들에 대한 원한으로 반드시 원수를 갚고 말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정상일 것이다.
옥문을 나온 이순신 장군은 자신을 아끼던 몇몇 분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곧바로 남해를 향해 670km라는 먼 거리를 말 한 필을 끌고 내려가기 시작한다. 가는 길에 제대로 된 잠자리도 식사도 없었다. 오직 나라만을 생각하면서 쉼 없이 걷고 또 걸었다. 설상가상으로 내려가는 도중에 모친의 별세 소식을 듣고 잠시 아산에 들러 장사를 치르고는 슬픔이 가시기도 전에 또다시 남해를 향하게 된다. 이순신 장군은 그 당시 남해로 내려가는 가장 빠른 길을 택하기 위해 가능하면 직선상으로 갈 길을 계획하였다. 그러니까 어머님의 별세로 잠깐 아산에 들리지 않았다면 가장 빠른 길로 이동했다는 말이 된다. 이는 그만큼 남해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이순신 장군은 한시라도 빨리 내려가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정상적이라면 아산에서 3년 상을 치르는 것이 자식 된 도리였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한 달여 만에 남해에 도착하게 된다. 내려가는 목적이 뚜렷했던 이순신 장군은 이동 중에도 어떻게 하면 남해를 지킬까 하는 생각에서 수많은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주요 수군지휘관들과 서신을 통해 의견을 교환하였으며, 의병장들과도 만나는 등 곧 다가올 해전을 어떻게 하면 승리할 수 있을까 하는 방안을 찾는 데만 온 신경을 쏟았다. 이순신 장군은 두 번째 압송하기 전까지 남해 일대에서 여러 전투를 치러 전승을 거두었다. 이러한 수차례 해전을 통해 왜군들의 전략과 약점을 알고 있었다. 남해를 왜군에게 내어주게 되면 결국 조선 땅 전체가 왜군 손아귀에 들어가고 백성들은 비참한 꼴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이순신 장군이었다.
남해에 도착하자마자 들리는 연이은 패전소식에 이순신 장군의 마음은 무척 무거웠다. 특히 원균이 그렇게도 큰소리치며 출전하였던 칠천량 전투에서 대패하여 원균 자신도 목숨을 잃고 대부분의 병력과 전투함을 잃게 되었다는 소식은 장군에게 너무도 뼈아픈 소식이었다. 남은 전투선은 전투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배설이 가져온 12척의 배와 수리하여 고친 1척 그러니까 13척의 배와 약간 명의 병력뿐이었다. 식량도 무기도 없었다. 이 상황을 알게 된 선조는 그 정도의 전투력으로는 패전할 것이 분명하니 육상으로 나와 지원임무를 수행하라는 교지까지 내려온 것을 어찌 보면 당연한 명령일 수도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1958년 8월 3일 그러니까 노량해전을 3개월 앞두고 백의종군 신분에서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 된 것이었다. 원래의 자리로 복직한 이순신 장군은 잠시도 쉬지 않고 동분서주하면서 전투준비에 온 신경을 쏟았다. 무엇보다도 식량 자급자족을 위해 직접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둔전을 마련하고, 무기 확보와 함께 군사훈련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나마 큰 힘이 되었던 것은 이순신 장군이 그동안 남해 일대에 복무하는 동안 진정으로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위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 백성들에게 감명으로 비쳐졌기에 많은 지역주민들이 장군을 돕겠다며 발 벗고 나선 점이다.
12척의 전투함으로 자신감을
오죽하면 선조도 그 정도의 전투력으로 왜군에 맞설 수 없다는 점을 인지하고 육상으로 나와 지원하라고 했을까? 그 누가 보아도 상대가 될 수 없는 보잘것없는 전투력임엔 틀림없었다. 거기다가 이순신 장군이 투옥되자 왜군 장수들은 자신들이 두려워했던 이순신 장군이 없으니 조선의 해군을 격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며 서로가 앞다투어 나서려 했다. 이런 상황을 알고 있는 선조는 당연히 내리 수 있는 하명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습니다(今臣戰船尙有十二). 그리고 죽을 함을 다해 항거해 싸우면 오히려 해볼 만합니다”라고 당찬 의지를 표하여 끝까지 남해를 지키고 승리할 것을 다짐하게 된다. 이순신 장군은 비록 전력은 열세하나 죽지 않은 한, 적들을 반드시 물리치겠다는 약속을 지키겠다는 장계를 선조에게 보낸다. 이것이 이순신 장군은 다가올 전투에서 패하게 되면 조선의 운명도 없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각오로 하루도 편히 쉬지 못하고 전투준비에 모든 힘을 쏟아부었다. 이순신 장군은 이전에 치렀던 전투에 출전할 때마다 죽을 각오를 하고 출전하였지만, 이번 전투에 임하는 마음자세는 그 어떤 전투보다도 반드시 싸워 승리해야 한다는 결의에 찬 모습을 보여주었다.
드디어 이순신 장군의 일생 마지막 전투가 벌어지고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 새벽에 일본의 요시히로 등이 이끄는 일본함대 500여 척에 수군 6만여 명을 싣고 노량해협으로 진입하면서 시작된 노량해전을 떠올리게 된다. 왜군은 1592년 4월 13일 부산상륙을 시작으로 20일 만에 한양을 무혈입성한 후 여세를 몰아 대동강까지 진출하였다. 그리고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본토에 대기 중인 2진 병력과 함께 을 남해 및 서해 바다를 통해 합세하여 곧바로 명나라를 향해 공격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남해 바다에는 이순신 장군이 버티고 있었다.
왜군은 이순신 장군의 전세가 매우 약하다는 것을 잘 알고 일본함대 500여 척에 수군 6만여 명을 싣고 노량해협으로 진입하게 된다. 왜군이 노량해협에 진입하자 매복해 있던 조선과 명의 연합군과 왜군 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순신 장군은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선제공격을 가했다. 왜선 200여 척이 근접전으로 부서지고 죽고 부상당한 자들과 부서진 배의 나무판자 등이 바다를 뒤덮었다. 조·명 연합군의 공격에 왜군은 버티지 못하고 마침내 관음포로 도망하기 시작한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이순신 장군은 왜선을 앞장서서 추격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추격 간 안타깝게도 이순신 장군은 도망가면서 사격하는 왜군의 총탄을 맞게 된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자신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왜군이 알게 되면 도망가던 왜군이 분명 배를 돌려 총공세를 해 올 것을 염려하여 고통 속에서도 부하들에게 방패로 자신을 신체를 가리게 하고 부하들에게 알리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11월의 차가운 남해 바다에서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순신 장군은 지금도 살아 남해를 지키고
이순신 장군은 23전 23승이라는 신화 같은 승리를 했다. 그것도 조정으로부터 제대로 된 병력과 무기, 식량 등을 지원받지 못한 상태에서 이루어낸 놀라운 전과이다. 필자는 이순신 장군을 떠올릴 때 우리나라 역사 속에 나타났던 수많은 호국인물 중에 한 사람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이순신 장군은 단순한 전투에서의 승리를 했던 인물이 아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만약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남해 바다를 지키지 않았다면 왜군은 그들의 계획대로 추가적인 병력과 전쟁 물자를 남해와 서해 바다를 통해 성공적으로 이동시켜 대동강에서 기다리고 있던 1진과 합세하여 조선 땅을 짓밟고 곧바로 명나라를 향해 공격했을 것이다. 결국 조선의 문명은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절대 절명의 순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시기에 이순신 장군이 남해 바다를 철통과 같이 지키고 있었고 이를 무너트리려는 왜군의 수차례의 공격을 모두 물리치는 전과를 올렸기에 왜군이 본토로 철수하게 되고 조선을 지켜내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순신 장군이 없으셨다면 오늘날 대한민국도 존재하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
우리들은 420여 년 전 12월에 차가운 남해에서 나라의 운명을 걸고 싸웠던 노량해전이 있었다는 사실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에 이순신 장군이 여전히 살아 남해를 지키고 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나라 어려울 때마다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던 이순신 장군을 비롯한 수많은 선열들을 늘 기억하며 그들이 지킨 이 땅을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든든하게 지켜나가겠다는 다짐을 한 해를 정리하고 새해를 맞을 준비를 하는 이 시점에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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