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5호(2-3월) |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가 한반도 안보에 주는 전략적 함의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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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김덕기 작성일22-03-17 22:38 조회1,043회 댓글0건본문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가 한반도 안보에 주는 전략적 함의
김 덕 기(동아대 특임교수)
I. 시작하면서
최근 미국과 중국이 남중국해, 인도·태평양은 물론 동아시아의 전략적 이익을 두고 경쟁하는 가운데 러시아가 다양한 이유로 우크라이나를 군사적으로 위협하면서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특히 러시아가 미국과 EU에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 거부와 NATO의 동진(東進)을 멈추고 안전보장을 요구한 가운데 서방이 이를 수용하지 않으면서 우크라이나 사태가 악화되었다.
러시아의 입장에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역사의 기원(起源)이자 슬라브 공동체를 구성하는 핵심 국가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가 크림반도(이후 크림) 병합(2014) 이후 독립국가연합(CIS)을 탈퇴하였으며, NATO와 유럽연합(EU) 가입을 통해 러시아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실현하기 위한 전략을 추진 중이다.
반면 과거 ‘강한 러시아’를 재현하려는 푸틴의 입장에서 우크라이나는 CIS 국가 중 두 번째로 큰 국가이면서 NATO의 확장을 저지하고 EU와의 정치·경제적 관계를 연결하는 지정학적 요충지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곳이다. 푸틴은 2021년 7월 12일 발표한 에세이에서 “우크라이나의 진정한 주권은 러시아와 협력해야만 가능하다.··· 우리는 한민족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하며,1) 유라시아 지역의 패권 부활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표방하고 있다.
최근 우크라이나 상황으로 미국과 전략 경쟁 중인 중국은 미국이 어떻게 대응하는가를 통해 남중국해는 물론, 대만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전략적 교훈을 얻을 좋은 기회다. 또한, 러시아·우크라이나 갈등은 최근 북한이 핵을 개발하고 미사일 발사로 우리는 물론, 주변국을 위협하는 가운데 한반도 안보에 주는 전략적 함의도 크다.
동 논문은 이러한 배경하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를 국제정치의 틀로 분석하고, 한반도 안보에 미치는 전략적 함의를 도출하는 데 있다.
II. 러시아-우크라이나 갈등의 역사적 근원
최근 우크라이나 사태는 1990년대 말부터 NATO를 확장한 서방과 강대국 지위를 다시 찾으려는 러시아의 충돌이다. 1990년대 소련이 붕괴되면서 동부 유럽국을 비롯해 소련연방 옛 소속국들이 잇따라 NATO에 가입하면서 러시아와의 갈등이 시작됐다. 헝가리 폴란드 체코가 1999년, 발트 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 옛 소련권 7개국이 2004년 NATO에 가입하면서 NATO 회원국은 30개국으로 늘어났다. 회원국이 늘면서 NATO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범위가 러시아 국경에서 약 1,000km 떨어진 지역까지 확대됐다. 특히 2008년 발표된 NATO 정상 선언문에서 ‘우크라이나와 조지아의 NATO 가입’ 추진을 공식적으로 밝히면서 러시아가 발끈했다.
그러나 이후 2010년 집권한 친(親)러시아 성향의 빅토르 야누코비치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NATO 가입을 다시는 추진하지 않겠다’라고 선언하면서 갈등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하지만 2014년 민주화운동으로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쫓겨나고 친서방 정부가 들어선 뒤 다시 NATO 가입을 추진하면서 러시아·우크라이나 관계가 악화되었다. 최근 미·중 간 전략 경쟁을 ‘신냉전’이라고 한다면 우크라이나 사태는 상대가 구소련에서 러시아로 바뀐 것을 빼면 ‘냉전의 부활에 가깝다.’ 즉 구소련 붕괴 이후 약 30년 동안 유럽의 수면으로 가라앉았던 냉전의 기운이 되살아나고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그 근원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피를 나누고 역사를 공유한 형제로 여기고 있다. 두 나라의 역사적 뿌리는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를 중심으로 9세기에 등장한 키예프 공국이다.2) 조상도 스칸디나비아에서 이주해 온 루스족(族)으로 같다. 러시아는 ‘루스인의 땅’이라는 뜻이다. 그리스 사람들은 바이킹이 노를 젓는 작은 배를 타고 좁은 물길 사이를 다니는 이들을 ‘루스’라고 불렀다. 그리고 우크라이나도 한때 ‘우크라이나 루스’를 자처했었다.
우크라이나 지역은 13세기까지 러시아의 중심지였다. 하지만 모스크바로 중심이 이동하면서 변방 취급을 받았다. 러시아는 1917년 혁명으로 세계 최초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다. 1922년 12월 12일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 3국이 군사·경제적 연합을 합의한 이후, 이 연합은 15개의 공화국, 20여 개의 민족자치공화국, 8개의 민족자치주, 10개의 민족자치구로 구성된 연방으로 발전, 최초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즉 소련이 탄생했다. 그리고 1991년 12월 8일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 정상의 결정으로 소련은 70년 역사를 뒤로하고 15개국으로 분리되었고, 며칠 뒤인 21일 러시아 등 12개국은 독립국가연합(CIS)을 만들어 경제적으로 협력하기로 했다.
그 이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CIS 국가들과 갈등이 계속되었다. 특히 우크라이나는 드네프르강을 기준으로 친서방 성향의 서쪽 지역과 친러 성향의 동쪽 지역 간 분쟁이 지속되었고, 결국 2014년 친러 성향이 강한 우크라이나의 크림이 러시아에 병합되었다. 그 이후 우크라이나가 NATO와 EU 가입을 서두르면서 러시아와의 갈등은 깊어졌다.3)
특히 1994년 우크라이나는 미국·러시아·영국·프랑스 등(후에는 중국도 가담해 유엔 차원의 조치는 아니지만 안보리 상임이사회 5개국이 모두 포함되었음)이 안보를 보장할 테니 핵무기를 포기하라는 요구에 ‘부다페스트 의정서(Budapest Memorandum)’에 서명(1994.12.5)했다.4) 그러나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병합하고 지금은 동부 국경을 압박하는 사태에 이르렀지만, 의정서나 우호조약은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이것은 비망록, 의정서, 협약 등에 기초한 주권과 영토 보장은 얼마든지 어느 한순간에 휴지조각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히틀러의 팽창 직전 뮌헨협정부터 독·소 불가침 협약 등이 아무런 효력이 없었던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다.
III. 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사태를 악화시켰나?
최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사태를 악화시킨 이유를 국제정치 분석의 틀, 즉 개인, 국가, 국제체제 차원에서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개인적인 차원에서, 러시아를 장기 집권하고 있는 푸틴 대통령은 과거 ‘소련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의도에서 우크라이나 사태를 만들었다고 본다. 미국 New York Times 칼럼니스트 프리드먼도 최근 칼럼에서 우크라이나 사태가 푸틴의 장기 집권 야망과 관련이 있다고 지적했다. ‘2024년 선거에서 확실하게 승리하기 위해서는 전쟁 분위기를 만드는 것으로 ‘전시 대통령’이 되려 한다.’라고 지적했다.5) 또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분쟁 지역’으로 묶어 두고, 안보 위기를 지속해 권위주의적 통제체제를 강화하고, 서방으로부터 최대한 경제적인 이익과 외교적 양보를 끌어내겠다는 구상이다. 푸틴은 2014년 크림을 침공, 강제 합병 후, ‘러시아 민족주의’를 고취해 정치적으로 푸틴 지배체제를 더 공고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NATO 규정상 분쟁 중인 국가는 NATO에 가입할 수 없으므로,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을 효과적으로 방해할 수 있다는 인식이다.
둘째, 국가 차원에서 보면, 지정학적으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가 포기할 수 없는 지역이다. 우크라이나의 ‘크라이나’는 ‘땅’ 또는 ‘변경(국경지대)’이란 뜻의 러시아어에서 찾을 수 있다. 강대국들 사이에 낀 지정학적 상황이 국명에 들어있다. 우크라이나는 2차대전 때 ‘유럽의 빵 공장’을 노리는 히틀러와 ‘러시아의 식량 창고’를 지키려는 스탈린 사이에서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우크라이나 전체 인구 4,200만 명 중 러시아계는 약 700만 명이며, 러시아에 거주 중인 우크라이나계는 약 200만 명으로 추산된다. 우크라이나의 대외 교역에서 러시아는 주요 교역국이다. 크림병합에 따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갈등이 격화된 시기에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최대 교역국 위상을 유지했다.
역사적으로 1783년부터 크림에 주둔하고 있는 러시아 흑해함대는 흑해 지역은 물론, 중동·지중해에 대한 전략적 균형을 유지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따라서 러시아 지도층의 입장에서 보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상호 의존의 관행과 유사한 정체성을 바탕으로 발전해 왔기 때문에 우크라이나를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민족이다.
셋째, 국가 차원에서 보면, 경제적으로 우크라이나 흑토(黑土) 지대는 아르헨티나 팜파스, 북미 프레리와 함께 세계 3대 곡창지대다. 비료 없이도 곡식이 자란다. 우크라이나는 프랑스에 이어 국토의 2/3가 곡창지대로 유럽 2위의 농업국가이며, 연간 2,200만 톤의 밀을 생산해 예로부터 러시아와 소련에 공급해 왔다.
약 4,200만 명의 인구와 CIS 국가 중 두 번째로 큰 경제 규모를 가진 우크라이나를 러시아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지경학적 요충지다. 그러나 이러한 지경학적 중요성 때문에 1930년대 초반 스탈린이 밀어붙인 집단농장 실패로 우크라이나인 수백만 명이 굶어 죽은 ‘홀로도모르’라는 대기근으로 우크라이나 국민 상당수가 러시아에 뿌리 깊은 불신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스탈린은 흑토에서 난 농작물을 팔아 러시아 산업화의 밑천으로도 썼다.
최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공급하는 가스를 이용하여 전략적으로 억압하면서 불신의 폭이 더 커졌다. 일례로, 2005년 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공급하던 가스 가격을 단번에 4배가량 올린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하고, 2006년 1월 1일부터 가스공급을 전격 중단하여 억압한 사례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에 대한 믿음의 불신이 팽배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국제체제 차원에서 보면, 최근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러시아와 서방과의 갈등의 근본적인 요인은 크림병합의 정당성과 ‘민스크 협정’ 이행에 대한 책임 공방으로부터 시작된다. 미국과 EU 등 서방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크림병합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러시아에 경제 제재를 시행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동부 국경 돈바스 지역의 분리 내전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중재 아래 2014년 ‘민스크 협정’ 2014년 9월 5일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도네츠크 인민공화국(DPR), 루스간스크 인민공화국(LPR) 사이에 서명한 돈바스 전쟁의 정전협정이다. 이 협정은 OSCE의 중재 아래 벨라루스의 민스크에서 서명되었다. 이 협정은 돈바스 전쟁의 여러 협정과 마찬가지로 즉시 정전이 발효되었지만, 돈바스 전쟁을 완전히 멈추게 하는 데는 실패했다. “Ukraine Revels vow to take back Cities,” SKY News, October 23, 2014.
이 체결되었지만,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반정부군의 대립은 지속되는 상황이다. 미국을 포함한 서방은 ‘민스크 협정’이 이행되지 않은 배경으로 우크라이나 반군에 대한 러시아의 지원을 의심한다. 반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민스크 협정’을 위반해 러시아계 주민을 위협하는 등 국경 지역의 안정을 훼손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크림병합과 ‘민스크 협정’ 이행을 두고 서방과 러시아 간 극명한 인식 차이는 상호 간 불신으로 축적됐으며, 양보 없는 대립이 현재의 우크라이나 상황을 초래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2021년 3월 돈바스에서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반정부군 간 교전에서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돈바스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당시 러시아는 전(全) 군관구를 대상으로 대규모 대비태세 검열을 시행하며 서부지역의 우발상황에 대응했다. 또 우크라이나와 인접한 서부 및 남부군관구는 일부 병력과 장비를 국경 지역에 주둔시켜 돈바스 지역 상황 악화에 대비했다.
이에 미국과 NATO 등 서방은 국경 지역에 배치된 러시아군의 주둔 목적을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려는 의도로 평가하고, 우크라이나 국경 인근에 배치된 러시아군을 압박하고, 돈바스 지역에 대한 러시아의 군사적 개입을 차단하기 위해 2021년 NATO는 러시아가 인접한 흑해 및 우크라이나, 발트 지역에서 ‘스테드패스트 디펜더(Steadfast Defender),’ ‘시 브리즈(Sea Breeze)’ 훈련을 했다.
반면 러시아는 2021년 10월부터 NATO가 미국과 흑해 일대에서 한 연합훈련을 엄중한 도전이라고 평가하고, 우크라이나와 인접한 남부 및 서부군관구 일대에 러시아 병력을 집결하면서 우크라이나와 EU를 중심으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우려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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